돌아서다 되돌아서서(수필)
<연변 양은희>
잊지 못해 서성이는 어리석은 그리움처럼 떠나지 못한 겨울이 매서운 칼을 품고 황진이의 춤사위같은 통한의 몸부림을 한다. 그냥 꽃샘추위라 부르기엔 지나친, 따뜻한 겨울을 나고 이제 겨울이 다 갔다고 여겨질쯤에 오히려 제대로 된 겨울을 알게 한 올봄의 추위는 앞으로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잊혀지지 않을것 같다.
가다가 되돌아선 추위, 그속에는 《마지막》이라는 낱말이 숨겨져있다. 그때문일가. 꽃샘추위에서 나는 질투의 색갈을 느끼며 다하지 못한 사랑에 흐느끼는 중세녀인들의 눈물을 본다. 병마에 시달리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씻은듯 일어나 앉으면 어른들은 그게 그 인생의 마지막 생명의 연소라고들 한다. 부시돌에 불이 이는 순간만큼이나 짧지만 반짝 하고 빛나는 그 빛은 누구에게도 경이롭게 다가간다…
발목 깊숙이 빠지는 숫눈길을 걸어 출근을 하며 얼굴을 때리는 싸늘한 눈바람을 피해 자꾸만 뒤돌아서는 내 눈속에 알몸으로 눈바람을 맞고있는 광고판 미녀들이 안스럽게 비쳐든다. 한시간만에야 하남교에 다달은채 나는 눈덮인 부르하통하를 이윽토록 내려다보았다. 하늘과 땅을 마주 붙여놓은 눈, 온통 눈의 세계 그리고 하늘에서 땅을 핥으며 내려와서는 다시 하늘을 향해 날으는 바람의 질주.
《세한도》의 구도속으로 들어가 꽁꽁 숨어버리고싶도록 몸과 마음이 옹송거려진다. 몇그루의 라목에 바람이 감돌고 장방형의 집채와 삼각형의 이영, 원으로 된 문, 이마가 다치지 않도록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갈것 같은 적막하고 쓸쓸한 느낌의 세한도. 그속에서 한껏 겨울잠에 갇혔다가 어둡던 릉선이 푸르게 일어서고 응달진 뒤동산에 진달래가 흐드러질 때 바람같이 새여나오면 좋겠다.
실제로 세한도의 구도속으로 들어가버리고싶을만큼 가슴답답한 날에는 그 그림을 방불케 하는 시골로 향한다. 아직까지 우리 이곳에는 몇그루의 구부정한 나무가 앙상하고 바람에 쓰러질듯 한옆으로 밀려나는 장방형초가, 그 세한도 풍경같은 시골은 얼마든지 있다.
창문 하나 트일수 없게 비닐로 꽁꽁 감싸버린 컴컴한 집안으로 들어서면 족히 십여분쯤은 가만히 서있어야만 한다. 장님의 그것처럼 아무것도 보이는건 없고 낯선 냄새뭉치가 얼굴을 후끈 때리기때문이다. 스스로 찾아간 시골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숨이 꺽 막혀 되돌아서고싶어진다.
늘 같은 생각을 하지만 시골의 겨울은 인내를 가르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것들과 빈 들을 가득 채우는 바람의 언어까지 인욕의 가슴으로서만 비로소 열리는 까닭이다. 눈에 걸치는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세한도가 명품이듯 앙상한 겨울시골이야말로 내게는 알곡더미같은곳이다.
그러나 묵직한 손이 있어 알량한 백일몽을 사정없이 깨뜨리며 내 령혼을 도로 이 날카로운 꽃샘추위앞에 잡아다 세워놓는다. 귤색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눈 치는 사람들속에서 나이들어보이는 한 아주머니가 삽은 한켠에 치우고 장갑은 벗어 겨드랑이에 끼며 지나가는 소년을 불러세운다. 책가방을 멘채 휴학소식을 접하고 도로 집으로 가는 길인듯한 소년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돼있다. 그런 소년에게 아주머니는 무릎을 꺾고 옷에 달린 모자를 당겨 씌워주곤 끈을 당겨 꽁꽁 조여주며 뭐라고 아이에게 사설한다. 두손으로 얼굴을 몇번 쓰다듬어주고서야 등을 다독이며 어서 가거라 제새끼처럼 따뜻한 아주머니…
스르르… 눈녹는 소리가 들리는것같은 착각이 일며 가슴속에서 열정을 동반한 이름못할 기운이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저 아주머니의 손보다 주머니속에 든 내 손이 더 따뜻할텐데 내게는 왜 소년이 보이지 않았을가.
열정과 사랑이 없는 인생에는 그만큼의 회한이 자리를 틀고 들어앉는다고 한다. 그러나 후회없는 인생을 사는데는 또한 고디바부인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고디바, 알몸으로 백마를 타고 천년을 런던시교 어느 성당앞 광장에 서있던 아름다운 령주부인이 바람찬 저 황야를 달려오고있다. 11세기 영국 코벤트리에서 령주의 부인으로 살며 령주내 모든 가난한 사람들을 향해 뜨거운 열정과 따뜻한 사랑을 지녔던 녀자, 과중한 가렴잡세때문에 가난한 삶을 영위해가는 백성들이 안스러워 남편에게 세금을 감면해줄것을 요구해 령주남편으로부터 알몸으로 말을 타고 마을을 한바퀴 돌아오면 들어준다는 조건을 제시받고 정말로 시종들의 눈물어린 배웅을 받으며 알몸으로 말을 타고 대문을 나선 그녀, 그러나 거리에는 사람 하나 얼씬 하지 않았고, 집집의 창에는 어두운 카텐이 드리워져있었다. 자신들을 위해 모욕을 참고 희생한 고디바부인을 위해 마을사람들은 누구도 거리에 나가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그 일마저 오랜 세월 비밀에 붙였다는 감동의 이야기다. 도저히 실행불가능한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감세요구를 포기하게 하려던 령주에게 도전한 고디바의 용기는 후세에 용기의 대명사로 되였고 사람들은 말을 탄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대대손손 추앙하게 했다.
어느덧 생의 한가운데 이르렀어도 한번밖에 없는 그 생을 아낄줄 모르는 삶이 슬프다. 물처럼 쉼없이 흘러가버리는 인생을 두고, 누구의것도 아니요, 그 누구도 대신할수 없는 내 생을 보내면서 좀 더 온전한 삶을 살아가야지 않는가.
겨울답지 않았던 올겨울처럼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후 때아닌 추위로 천지를 다시 떵떵 얼궈버리는 샘추위처럼 인생의 어느 저문녘에야 깊은 회한으로 한숨지으며 충족하지 못한 생을 두고 락망할것인가. 그렇다고 인생의 마디마디는 매듭으로 이어져 아무때건 원한다고 그 시절로 되돌아갈수 있는것도 아닌데…
고디바부인이 저만치서 꽃샘추위를 무릅쓰고 내게로 오고있다. 꽃샘추위의 통한이 삶을 휘여잡는 일이 없도록 용감하게 살라고 거친 광야를 달려오면서 온 몸으로 말하고있다…
양은희: 연변 유명 수필가. 수상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