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그리움으로 정착하며<수필>

<양은희 수필>

2007-12-09     동북아신문 기자

가을이라는 이름속에서는 그리움의 냄새가 난다.

한여름의 더위가 예고도 없이 식어버리고 어느 아침 싸늘한 바람이 볼을 스치는 날 나는 서러움의 빛갈같은 하늘을 망연히 바라보며 출근길을 머뭇거린다. 걷다 서다를 반복하며 련인을 기다리는 소녀처럼 망설인다.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 어딘가로 떠나버리고싶은 절박한 이 서성임을 그 누가 귀기울여주랴…    

가지끝에 아슬하게 매달려 바람에 나붓기는 나무잎을 보며 또다시 머뭇거린다. 좋은 글 페지마다에 끼워놓은 책갈피같은 미련이 진동하듯 감겨들어 나를 휘청이게 한다. 삶에, 세월이 지나간 자욱마다에 년륜처럼 상처를 조각해놓고도 미련은 아직 남아있는가.

슬픔이 물감처럼 온몸으로 번질 때 나는 끝끝내 발길을 돌리고만다. 가을바람에 묻어나는 그리움의 실체를 찾고싶다. 가을바람에 나붓기는 저 락엽과 저 모르는 사람의 검은 스프링코드자락과 내 긴 머리카락은 모두 그리움에 떨고있는것이다.

강을 따라 걸었다. 강물이 이렇게 맑아진것도 이제야 비로소 느낀다. 누군가 말했지. 우리 고장 강물은 한많은 족속의 멍든 가슴같은 빛갈이라고. 정말 그런가. 늘 칙칙하던 강물이 언제 저리도 푸르게 변했을가.

해란강과 연집강 합수목 쯤에서 강변포장도로가 끝나고 모래자갈길이 맨살로 드러난다. 낮다란 야산과 이어진 길에는 바람에 불려온 락엽들이 이리저리 널려있어 제법 멋진 산책로다. 이제 저 강물들은 여기서 만나 마반산, 장안을 거쳐 도문에 이르고 도문에서 두만강과 만나 훈춘쪽으로 흐르며 방천 막끝에서 드디여 동해바다에 흘러들게 되리라. 

그러니 내 어찌 저 진하디진한 그리움의 냄새를 맡지 않을수 있으랴. 먼 백두산자락에서 잉태된 강물이 지금 내 눈앞을 흘러 아직도 먼먼 바다로 가야만 하니… 바다로 흘러가면서 자신이 처음 생겨난 땅을 강물은 그리워할것이다.

강에서 태여난 연어, 은어는 바다에 나가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기어이 강으로 되돌아온다는데 그들은 어떻게 강과 바다를 가려낼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물고기들은 바로 냄새를 따라 강줄기를 찾을것이라고. 그래, 냄새때문일것이다. 비릿하고 쯥쯜한 바다와 강물의 냄새는 다를것이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엄마같은 냄새, 피속에 잠재한 윈시적인 그리움을 좇아 연어는 바다에서 강으로 회귀할것이다…

가을에서는 그리움의 냄새가 난다. 동으로 흐르는 연집강을 따라 한시간가량 걷노라면 마주오는 해란강을 만나게 된다. 두 강물은 하룡촌에서 만나 북쪽방향으로 흐르며 굽이를 돈다. 해란강줄기를 거슬러 다시 걷는다. 이번에는 해란강이 서쪽으로 흘러들기에 강을 거스르며 한창을 걷게 된다. 바람이 불 때마다 락엽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무잎은 눈을 트면서 나무와 꽃과 바람과 새와… 사랑을 하고 새들이 날아갈 때마다 슬픔으로 큰다. 그러다가 가을이 오면 마지막 푸르름을 수목에 남겨두고 작은 몸은 노랗게 익어서 뿌리가 묻힌 땅으로 되돌아온다. 땅으로 내려앉는 락엽의 모습이 저토록 편하게 보일수가 없다.

어느 한시기 나는 가을을 힘들어했다. 가을이 올무렵이면 벌써 몸이 아프고 마음이 시리고, 눈굽에는 자꾸만 맑은 이슬이 감돌군 했다. 원인도 알수 없었던 30대말의 그 서러운 가을 나는 고독이라는 단어를 하루 세끼 밥먹듯이 입속으로 외우며 가을은 고독의 계절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러다가 초목이 짙게 푸르고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여름날 망극하게도 아버지를 잃고서 가을대신 기름진 여름을 힘들어하게 되였다. 너무나 강렬한 여름의 열정은 나를 낯설게 했고, 열정같은것과는 멀리에 서있는 내게 조락의 가을이야말로 오랜 친구같은 존재로 바뀌게 되였다.

계절은 그렇게 흐르고 철은 또 그렇게 들어 올해도 벌써 만추, 그리움은 피빛같은 열정으로 다시 가을을 물들인다. 하지만 이 가을의 이 뜻모를 그리움은 다시 꽃으로 피여날수 있을가.
지난해 가을 나이 젊은 형부는 손에 꼭 잡았던 삶의 끈을 마흔다섯의 자태고운 색시앞에 수액으로 쏟아내고 10월의 붉은 락엽처럼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셨다. 그 찬란한 회귀… 인간도, 태여나서 죽는순간, 자연을 향한 회귀의 욕망 또한 그토록 강렬한것을… 모든 영욕 다 풀어놓고 눈물처럼 땅속으로 스며드는 긴 그리움, 형부같은 가을인것을…

천사같이 편한 모습으로 눈을 감으며 아픔도 슬픔도 한없이 내려놓는 형부에게 언니는 자신의 손으로 한번 또 한번 혈액을 주입시키며 멀어져가는 형부의 령혼을 애절히도 불렀다. 그러나 언니도 끝내는 들어야 했던가, 창밖에서 락엽지는 소리를… 부부로 맺어진 인연의 매듭짓는 소리를… 그리움의 이름으로 기억해야 할 이 가을의 바람소리를…

가을은 참으로 모든게 그리운 계절이다. 가을의 곳곳에서는 그리움의 냄새가 난다. 가을냄새는 후각 이전의 감각이며 기억이며 느낌이다. 알고 모르는 모든 인연에 아련한 그리움이 돋고 모천으로 회귀하는 은어연어들이 맡아내는 강물냄새처럼 원초적인것들만 그들먹한 계절이다.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에 시간을 보니 벌써 점심때. 정오의 한줌 볕이 내 정수리에 내려 뜨겁다. 해빛에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고 걷기를 세시간, 문뜩 그리움의 실체가 보이는듯 하다. 나로 하여 만들어진 모든 인연에 대한 추억, 그런것들과의 나누고싶음이며, 내가 아직 모르는 그래서 내가 죽는 순간까지 다가가야만 할 내 령혼의 소망이요, 느낌이여…  

평강벌, 세전이벌에서 푸른 벼들이 누름으로 익어가는 가을, 저 합수목에서 만난 연집강, 해란강이 한어린 족속의 서러움같은 빛으로 멍들어가는 가을, 나무들이 서둘러 옷벗고 락엽은 서둘러 뿌리에게로 돌아가는 가을, 나는 드디여 내 중년의 방황을 마친다. 한줌 흙이 되여 정착해야 할 어머니가슴같은 기다림의 역을 나는 찾아내고야만것이다…

양은희: 연변 유명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