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콤플렉스/학위콤플렉스

<우상렬 수필>

2007-09-13     동북아신문 기자

 인간은 이 세상에 와서 땅을 뚜지는 것으로 기본 생계수단의 하나로 삼아왔다. 그래서 背朝天, 脸朝地, 농민이 생계를 위하여 치르게 되는 고역이다. 노동의 신성함이고 자시고 땅뚜지기는 일종 고역이다. 햇빛에 얼굴은 가마 잡잡해지고 ‘베적삼이 흠벅 젖는 것’이 우리 농민의 자화상이다.

농민 스스로가 주눅이 들어 허리 굽혀진다. ‘시내놈’에 비긴 스스로의 자조 섞인 ‘우리 촌놈...’, 우리 어릴 때는 중국의 10억 인구에 8억이 농민. 物以稀爲貴 차원에서도 농민은 많은 것이 문제라 천대꾸레기. 그래서 자연히 쌓이는 것이 농민콤플렉스.

내가 소학교에 다닐 때다. 우리 집은 워낙 시교에 있은 지라 내가 다닌 학교에도 工人(그때 우리는 노동자를 이렇게 불렀음) 자제와 농민 자제가 섞여 있었다. 그때는 工人階級이 領導一切할 때라 그 기세가 욱일승천할 때다. 학교에까지 工人선전대가 들어오고.그래서 우리 소학교에서도 工人자제들은 좀 우쭐렁거린다. 그 대신 우리 농민자제들은 기가 죽는다. 그때 工人자제나 농민 자제를 판단하는 데는 겉모양만 보고도 곧바로 알 수 있다. 工人들은 대우가 좋은지라 그 자제들은 얼굴도 해맑고 옷도 깔끔하다. 그러나 우리 농민자제들은 얼굴도 디디하고 옷도 데데하다. 그때 쩍 하면 工人호구나 농민 호구를 조사한답시고 工人호구 손 들엇, 농민호구 손 들엇 하던 선생이 얼마나 미웠는지 모른다. 工人호구 손 들엇 하면 工人호구 자제들은 기분이 좋아 손을 높이높이 들지만 농민호구 손 들엇 하면 농민호구 자제들은 기분이 잡쳐 손을 보일락말락하게 든다. 나는 그때 학교운동대회가 제일 싫었다. 그때는 운동대회를 할 때면 학부모들이 동참하도록 되어 있다. 바로 이 운동대회 때 나는 주눅이 든다. 우리 ‘촌놈’ 부모들은 너무 겉늙었고 시커멓고 데데하다. 여기에 반비례하여 ‘시내놈’ 부모들은 젊어 보였고 희어멀끔하고 깔끔하다. 이는 우리 ‘촌놈’ 부모 자제들을 기죽인다.  

전 사회적으로 죽으나 사나 工人階級이 되고 볼 판이다. 그때 농민이 工人으로 되는 것은 일대 출세! 工人이 되면 皇粮을 먹게 되고 이런저런 부대적인 대우도 받게 된다. 그래서 농민들은 목을 쭉 빼들고 工人을 쳐다본다. 그리고 농민자제들은 너도나도 군에 지원한다. 군에 갔다 오면 대개 工人으로 직업배치를 해주기 때문. 그러다가 대학문이 열리자 죽기 살기로 모여든 곳이 대학입시. 光宗耀祖고 자시고 그저 대학에 입학하여 촌놈 딱지를 떼는 것이 유일한 소원. 내가 대학에 입학하니 모두들 축하한다는 말이 출세했다는 것이다. 그 말인즉 개천에서 용이 나듯 촌놈 딱지를 떼어버렸다는 것이다. 내가 대학에 입학해 보니 우리 반에는 이 촌놈 딱지를 떼기 위해 대학시험을 네댓 번 친 친구들이 수두룩하다. 그때 처녀들도 工人에게 시집가기가 붐. 工人이면 코가 눈덩에 붙었어도 장가는 가는 세상.

 

오늘날 工人이 下崗하는 세상, 그 대신 농민이 農民工으로 부상.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농민콤플렉스를 떨쳐버리는 듯하여 좋다.

 

어느새 우리 중국의 농촌이 근대화 바람을 타고 도시화에로의 박차가 가해지고 있는 듯하다. 새 농촌 건설의 국가적 정책과 더불어 아스파트길이 쭉쭉 들어오고 기와집이 쭉쭉 일어선다. 눈에 띄는 하드는 그럴듯하다. 이른바 새 중국이 성립되어서 공산주의 실현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농민과 工人의 차이, 농촌과 도시의 차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 등 3대  차별 가운데 첫 번째, 두 번째 차별소멸을 실현하는 듯하다. 많은 곳에서 농촌호구와 도시호구 구별제를 폐지하고 있다. 전국 각 곳에서 심심찮게 눈에 띄는 農民工 및 이들에 대한 권익보호는 그간의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현재 내가 있는 중경에서는 농촌인구의 도시진출을 적극 지지하고 있는데 어떤 데서는 정착금에 장려금까지 준다고 한다. 농민 자제들도 부담 없이 시내학교에 다닐 수 있단다. 농민콤플렉스가 확 풀리는 듯하여 좋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장 핵심적인 농촌의 도시화와 더불어 농민이 얼마나 실속 있게 사회보장을 받는가 하는 소프트문제가 놓여있다. 생계보장, 의료보장, 퇴직보장 등 생로병사에 관계되는 일련의 보장이 뒤따르는가 하는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의 고향인 심양 소가툰의 일부 조선족촌의 농민들은 이런 아무런 보장도 없이 땅을 팔아 일시불로 돈을 얼마씩 챙기는 것으로 농민딱지를 떼며 만사대길인 줄로 안다. 그들의 앞으로의 생계는 무엇으로 하겠는지?


2007. 9.6

 


학위콤플렉스    
<우상렬 수필>

 

동북아신문 기자 pys048@hanmail.net

 

 

동물은 학위콤플렉스가 없어서 참 좋겠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스스로 참 많은 콤플렉스를 만들어간다. 학위콤플렉스가 그 중의 하나. 요새 한국에서 가짜학위파문으로 시끌벅적한 것은 그 한 보기. 사실 그리 시끌벅적할 것도 없다. 학위 일방통행사회에서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사건이 우리의 학위콤플렉스를 자극하면서 학위가 뭐길래하는 생각을 해보게 함은 두말할 것도 없다.

 

어쩌면 이런 콤플렉스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어야 하는 하나하나의 통과제의인지도 모른다. 학위콤플렉스를 보자. 너도나도 똑똑하단다. 그러니 머리만 까딱 놀리고 입만 냠냠 놀리며 큰 떡 먹겠다고 개미떼처럼 몰리기. 그래서 똑똑度 차원에서 레벨을 두는 학위제도라는 것을 내왔지.

 

그리고 바로 이 맹목성이 없지 않아 있는 학위제도건만 현실에 안주하고 나태하기 쉬운 인간을 분발하고 향상하게 하는 하나의 기폭제이기도 하지. 옛날에는 소학교만 졸업해도 대단한 학위 맞잡이였는데 현재는 대학교가 다 뭐야, 석사, 박사가 줄을 서 있다. 여기에 또 박사후(포스트닥)라는 것이 척 죽 치고 앉아 있다. 정말 이 산 올라가면 저 산 높고 저 산 올라가면 또 ...... 끝없는 학위의 바벨탑, 바라보기조차 아득하다. 그러나 인간은 이로부터 큰다.   

 

그런데 이런 콤플렉스가 분명 우리를 피곤하게 만들고 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이런 콤플렉스를 날려버릴 방법을 생각해본다. 우선 학위를 우습게 보자. 학위가 빛 좋은 개살구일 수 있다는 거, 기억하자. 턱걸이 하듯이 겨우 학위를 딴 것도 있다는 거, 기억하자. 그럭저럭 내지는 얼렁뚱땅 학위도 있다는 거, 기억하자. 여기에 좀 더 심하면 가짜 학위도 있는 법. 결론적으로 학위는 별 볼일 없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학위 없이도 대성을 하여 명인이 되고 위인이 된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학위제도는 현재 별 수 없이 취하게 되는 인간사회의 苦肉제도의 하나. 그러니 학위를 위한 학위, 학위를 위해 전 생을 거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기도 한다. 앞으로 학위제도가 없는 사회가 오겠지! 그럼 학위콤플렉스는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그리고 眞才實學가 진정으로 통하는 사회가 올 것이다. 한국에서 고시시험 때 학위고 자시고 오로지 그때 시험성적에만 따라서 인재를 선발하기, 그리고 일부 대기업에서 고정관념을 깨고 무슨 졸업증이고 학위고 자시고 실무시험이나 실제 면접시험을 통하여 직원을 채용하는 것은 학위콤플렉스에서 자유로운 한 길을 틔운 셈이다.  

 

우리 한번 기대해보자!

2007.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