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심천을 말한다(연재 1)
<허영섭의 기업세계>
며칠 전에 나는 심천주재 한국인 기업가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많은 한국인들이 심천, 광주, 상해, 북경 등 도시에 대해 무언가 더 깊이, 많이 알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1989년도부터 심천에 자리 잡은 나로서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보고 들은 것들을 두루 수집하여 심천의 발전에 대해 몇 줄 적을까 한다.
1, 심천경제특구의 탄생과 발전은 중국역사 흐름의 자연추세이다.
1979년의 중국대륙, 공화국의 모든 경제는 쇄퇴 상태에 처해 있었으니 그 어떤 방법으로든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지 않으면 나라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
금방 다시 정권을 장악한 등소평은 “개방”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는 중국지도를 펼쳐 놓고 깊은 사색에 잠겼다. 끝내 그는 홍콩과 육지로 잇대어 있는 심천이란 작은 어촌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1979년7월 중국국무원은 심천, 주해, 산두, 하문을 경제특구의 시험지로 결정했다. (1988년4월13일 7기 인민대표대회에서 또 해남경제특구를 결정했다.)
하문: 하문은 대만과 바다를 사이 두었고 거리도 비교적 멀다. 당시 하문은 군사중요기지로서 경제 발전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중국대륙과 대만사이의 관계는 홍콩처럼 밀접지가 못했다. 그리고 당시 하문은 밀수가 너무 성행했다. 이리하여 심천처럼 경제특구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산두: 산두는 주로 밀수가 너무 큰 비중을 차지하여 원기를 상했다.
주해: 주해는 아직까지도 그 때 심어놓은 반복건설의 쓰라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계를 놀라게 하는 속도로 발전한 것이다. 세계도시 발전역사에서 심천
은 모두가 승인하는 1위이다. 이는 등소평의 걸작이고 중국역사 흐름의
자연추세이다.
2, 심천경제특구 발전중 남모르는 어려움과 고통
공화국이 건립한 이래 3반, 반우파, 대약진, 인민공사, 문화혁명 등 많은
운동을 벌렸고 모두가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정치성이 강한 운동이었다. 그러니 당시 등소평이 심천경제특구를 결정할 때 중앙내부를 포함한 많은 영도자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자칫하면 목이 날아나는 착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천특구건설은 사구(蛇口)공업구로부터 시작되었다. 허허벌판에 중국경제특구를 건립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돈이었다. 심천 영도들이 등소평한테 건설자금을 요구했는데 등소평은 “중앙에는 돈이 없다. 혈로를 뚫고서라도 당신들이 알아 해결하라.”는 명확한 대답을 주었다.
이 표어(구호)는 지금도 심천 사람들의 정신적 상징으로 남아 있지만 당시는 무시무시한 행동선언이고 아주 모험적인 발상이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