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한국인에 대한 日帝殖民化교육의 이모저모
—李 幸 俊
머 리 말
나는 40년전에 중국의 길림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하고 수십년을 탄광안전계기와 呼吸保护器具 및 기체센소연구사업에 몸바쳐 온 중국조선족과학기술인원의 한사람이다.오늘 비록 내 청춘은 추억속에 남고 육신은 여로를 걸어도 배달민족의 사명감으로 우리민족의 번영발전을 위하여 미약한 나의 힘이나마 아낌없이 기여하리라고 생각한 나는 5년전부터 우리민족이 한 세기가 넘는 긴긴 세월속에서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이국타향인 만주땅에서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국권회복을 위하여 청춘과 생명을 바쳐 싸우던 력사의 흔적을 찾는 고행길에 들어서게되였다.
광복 때 나는 겨우 만 3 살에 불과한 어린애였으니 나의 머리속에 일제의 침략만행이 기억으로 남아있는것이 없다.그러나 한국에서 태여나 쪽배기차고 시베리야 찬 바람을 헤치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 만주땅에서 한 평생을 살아 온 선배들을 찾는 중에서 피어린 우리민족력사의 이모 저모를 알게되였다.그 중에서 일제가 만주땅에 와서까지 우리민족에 대한 식민화교육에 관련 된 몇가지 사실에 대하여 기술하려고 이 글을 쓰는바이다.
1. 만주 만주국 만주한국인
먼저 이 문장에 나타나는 만주,만주국,만주한국인 등에 대한 나의 견해를 아래에 간단히 피력한다.
만주: 중국 동북지방의 속칭으로서 청나라 태종이 后金의 국호를 清으로 개칭함과 동시에 동북지방을 만주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많은 사람들이 <만주사변>후 부터 동북지방을 만주로 부른다고 오해 하고있다.
만주국: 1931년9월18일(만주사변)이후 일본군부의 괴뢰로서 1932년3월 만주에 건국된 나라다.1934년3월에 국호를 <만주제국>으로 개칭하고 溥义가 황제로 되였고 국호를 <康德>으로 칭하였다.1945년8월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의 승리에 따라 만주국은 멸망되였다. (<참고자료> ① 참조)
만주한국인:1910년8월 일한합병으로 국권이 피탈되여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만주땅에 와서 생활하면서 만주국에 입적하지않았던 사람들이다.그들이 만주땅에 오게 된 것은:
①일제의 조선강점으로 망국노가 되기를 원치 않는 반일인사들이 계속 국권회복투쟁을 위하고 ;
②파산농민들이 생계를 위하여 만주땅에 오게되였고 ;
③1937년 이후 일제가 <만선척식회사>를 통하여 계획적으로 한국농민들을 만주에로 이주시켰고;
④1941년후에는 개척이주민,개척단 등의 이름을 걸고 한국농민들을 만주 각 지방에 강박적으로 이주시켜 온 것이다.
2.日帝의 殖民化 교육
일제는 1910년8월29일 <일한합방>으로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삼천만 배달민족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삼천리 금수강산을 자기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만주사변>으로부터 시작한 일제의 만주와 중국대륙에 대한 전면적인 침략이 강화되면서 부터 정치적 탄압과 경재적착취 및 식민교육을 포함한 일제의 식민통치는 날이 갈수록 혹심하여졌다.
일제는 합방이후 식민통치기구로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한국 민족과 한국의 문화를 말살하려고 날뛰였다.동시에 일제는 강박적으로 창씨개명 및 황국신민화(皇国臣民化)정책을 전개하면서 한국인을 강제적으로 일본인화 하려고 획책하였다.특히는 일본이 군국주의로 표방하면서 만주사변(1931년) ,중일전쟁(1937년),태평양전쟁(1941년)으로 확대하면서 창씨개명의 강요(1940년),민족언어인 한글의 통제등 소위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야만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다.
일제가 만주한국인에 대한 식민화교육은 그들의 만주에 대한 식민통치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조선총독부는 4차레에 걸쳐 <조선교육령>을 발포하여 철저한 식민지교육정책을 시행하였다.이 4차에 걸치는 <정책>은 어느 하나 빠짐없이 만주한국인에게도 관철되였다.더욱이 1941년 태평양전쟁 시기로 접어들면서 교육은 최악의 수난을 겪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1945년5월의 <전시교육령>의 공포에 따라 학생과 교육기관은 일제히 태평양전쟁수행에 동원되였다.
3.강박적인 창씨개명
창씨개명이란 1939년 11월 일제의 황민화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민사령개정법을 공포하고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설정하여 1940년 2월부터 동년 8월 10일까지에 ‘씨(氏)’를 결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관헌을 동원해서 협박과 강요로 강행, 창씨를 하지 않는 자의 자제에게는 각급 학교의 입학을 거부하고 창씨하지 않는 호주는 ‘비국민’ ‘후테이센징[不逞鮮人]’의 낙인을 찍어 사찰미행을 철저히 하고 노무징용의 우선대상으로 삼거나 식량 등의 배급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갖은 사회적 제재를 가하였다. 창씨개명은 글자 그대로 한국인에게 선조로부터 이어받은 전통적인 성명을 폐지하고 일본식의 성명을 고쳐쓰도록 강요한것이다.
이러한 창씨개명은 만주한국인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로 빠짐없이 시행되고 있었다.구체적인 실례를 찾아본다면:
① 금년에 81세인 지금 중국 요녕성 무순시에 살고 있는 홍순오(洪淳午)씨는 강덕 8년 8월 12일에 중국 길림성 집안현구재원촌공립기성국민우급학교를 졸업했는데 그가 받은 졸업증서에는 이름이 홍순오(洪淳午)가 아니라 창씨개명후에 고친 <平川雅也>라고 씌여있다. 이졸업장에서 보다시피 졸업장의 내용도 한글이 아니라 일본글로 씌여져있다.
(부록 ① 참조) <강덕 8년은 1941년>
② 저의 큰 형님은 본래 이름이 <李幸一>이였다.그러나 지금 나에게 보존되여 있는 큰 형님이 쓰던 <汉和大字典> 첫 폐지에 창씨개명후에 고친 <木下幸一>라는 도장이 박혀있다. 우리어머님의 소개에 따르면 이 도장은 저의 큰 형님이 도장파는 칼을 사서 자기가 직접 만든것이다.(부록 ② 참조)
③ 금년에 72세인 지금 심양에 살고 있는 문영걸씨의 소개에 의하면 그 반의 50여명 학생중에서 대부분이 일본성명으로 고쳤다고 한다.매일 아침 학생들의 출석부를 부를 때 일본식으로 이름을 고치지 않은 학생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한다.
④ 금년에 81세인 지금 중국 요녕성 무순시에 살고 있는 홍순오(洪淳午)씨는 그때 일을 회억하면서 당시 정부는 민족차별을 두고 일본인은 일등공민.만주한국인은 2등공민. 중국인은 3등공민으로 나누고 만주한국인의 배급통장에는 선계(鲜系)라는 도장을 찍고 만주한국인으로서 일본식으로 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배급통장등록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찾으려고 리력서를 써바치는데도 개명을 하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대학교를 가려면 반드시 일본식이름이여야 했다.
4.殖民教育의 이모저모
일본은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하여 내선일체를 부르짖었고 한국인은 일본천황의 신민(臣民)이라고 했다. 일제는 황국신민맹세문을 지어서 한국인이 외우도록 강박했다. 한국인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한국어문의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한국력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만주한국인에 대한 일제의 식민화교육은 학교이름,한국어사용금지,학생복장,교과서 등 여러면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이 모든것은 한국인민의 우수한 전통과 찬란한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한것이였다.
① 우리 큰 형님 李幸一이 1944년에 무순에서 공부하던 학교 이름은 <抚顺朝日在满国民学校>이였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만주한국인이 공부하는 학교이름에도 반드시 일본을 상징하는 <日>자를 부쳐야 했다.(부록③ 참조)
②우리 큰 형님 李幸一이 1944년에 무순에서 <抚顺朝日在满国民学校>의 초등과를 졸업할 때 찍은 사진에서 보다시피 교기와 태극기 대신 일본국기를 걸고 찍은 것을 뚜렷이 볼 수 있다. (부록③ 참조)
③만주한국인의 자식들이 학교에 다닐 때 학생들이 입은 옷은 선생을 포함하여 완전히 일본식옷차림이였다. (부록④참조)
④우리부모님이 1934년에 고향인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을 떠나 이 만주땅으로 올 때 가지고 온 본적을 본다면 확실히 우리집의 본적인데 그 내용은 도리어 일본글로 씌여져있다. (부록⑤참조)
⑤중국 요녕성 무순시에 살고잇는 윤재한 (금년에 80세) 씨는 60여년전에 국민학교에서 공부할 때 배우던 옛 지리교과서를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있다. <고등소학지리서 부도(附图)〉라는 제목으로 되여 있는 지리교과서는 일본 오사까서적주식회사공장에서 발행한것이다.교과서 뒷면에는 <쇼와(昭和)15년(서기1940년)2월27일수정인쇄,쇼와 15년 3월1일발행 > 및 <쇼와 15년(서기1940년) 3월 28일 (일본)문부성 검사제(济)>라고 밝혀져있다.여러장으로 된 이 지리교과서부도 제2도에는 아게가주 지도가 그려져있는데 이 지도에 따르면 <만주국>과 조선반도전지역 ,대만지역과 보르네오섬,그리고 로씨야 일부 지역이 일본령토로 표시되여있다.제4도에는 <만주국>지도가 그려져있고 그 왼쪽켠에 보면 부도 세개가 나란히 배렬되여있다.그중 맨 웃쪽의 지도는 <만주국>이고 중간은 <간도>이며 맨 아래쪽의 지도가인데 이 <관동주> 가 바로 지금 대련의 려순지역이다.이로써 당시 일본은 조선반도와 만주를 제손아귀에 틀어쥐고 아울러 전반 동남아지역을 제패하려 했던 패권제국의 야심찬 욕망을 여실히 찾아 볼 수 있다. (부록⑥⑦참조)
5. 맺는 말
위에서 언급 된 사실들은 만주한국인에 대한 일제식민화교육의 이모저모를 여실히 보여주고있다.지금은 이미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로 일본이 투항하고 마침내 광복을 맞아 60여년이란 긴긴 세월이 지났다.그러나 지금까지도 일본 총리를 비릇한 고위급 관료들은 해마다 당시 전쟁범들의 위령패를 안치한 야스구니신사를 참배하고 있다.이것은 일본이 당시의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려는 음모가 숨어있으며 일본군국주의의 유령이 아직도 살아있음을 여실히 말해주고있다.반만년 유구한 력사를 갖고 있는 우리민족은 다시는 일본군국주의의 유린을 당할 수 없다.국권회복을 위하여 우리민족이 36여년간 얼마나 많은 애국애족반일투사들이 청춘과 보귀한 생명을 바쳤던가! 우리민족이 계속 번영 발전하려면 망국노의 설음을 영원히 잊지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일제가 우리민족에 저지른 온갖 침략만행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비판하여야 한다.
나의 부모님들은 한국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에서 태여나 젊은 시절에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고향을 떠나 살길을 찾아 만주에 와서 헐벗고 굶주리면서 살아가다가 광복을 맞아서도 귀향길이 막히여 중국에서 지난세기 80년대 초기에 선후로 타계하셨다. 지금 나는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을 갖고 있는 조선족의 일원이다.나는 중국에서 소학,중학,대학을 졸업하고 한평생을 맞겨진 사업에서 일심을 다하여 아낌없는 노력을 기여하였다. 나는 중국공민으로서 떳떳하게 살아왔다.나는 우리나라를 사랑하며 나의 민족을 사랑한다.나는 내가 조선족으로 하여 더없는 자오감을 가진다.고향을 사랑하지않는 사람이 나라를 사랑할 수 없는 것 처럼 애국애족은 갈라 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근래에 나는 우리민족의 젊은이들을 접촉해 봤다.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것은 이들의 민족애가 너무나도 차한것이였다.그들은 우리민족의 력사를 거의 모르고 있으며 또 알려고도 하지않는다. 이것이 구경 누구의 책임인가는 한마디로 말할 수 없으나 나는 여하튼 이 <만주한국인에 대한 일제 식민화교육의 이모저모 >를 통하여 우리민족의 젊은이들에게 다소나마 민족애를 야기시키고 싶다.
부록:
①강덕 8년 8월 12일 중국 길림성 집안현구재원촌공립기성국민우급학교 졸업장
②<木下幸一> 도장
③1944년<抚顺朝日在满国民学校> 초등과 제19회 졸업사진
④1944년<抚顺朝日在满国民学校> 초등과 木下幸一반의 졸업사진
⑤한국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안독동 525번지에 살던 李德文 가족의 본적
⑥<고등소학지리서 부도(附图)〉제2도 1940년 일본 문부성 비준
⑦<고등소학지리서 부도(附图)〉제4도 1940년 일본 문부성 비준
참고자료:
①이숭녕 등 <대국어사전> 1976년
②< 辞海> 第 981 页 上海辞书出版社 1985年版
③柳正秀 <일제의 한국침략과 통치> 和信文库 2000년.
④김양 <항일투쟁반세기> 료녕민족출판사 1995년
⑤서명훈 <강박적인 조선인 창씨개명> <흑룡강신문> 2006년4월22일
⑥柳正秀 <일제의 한국침략과 통치> 도서출판 화신문고 2000년8월
⑦하일식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도서출판 일빛 2003년1월
⑧윤재윤 <침략자의 야망이 깃든 옛 일본지도 공개> 료녕<조선문보>2004년 8월 17일
창씨개명은 일제가 조선에 대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의 일환이였다. 일본은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기 위하여 내선일체를 부르짖었고 조선인은 일본천황의 신민(臣民)이라고 했다. 일제는 황국신민맹세문을 지어서 조선인이 외우도록 강박했다. 조선인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고 조선어문의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조선력사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 모든것은 조선인민의 우수한 전통과 찬란한 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한것이였다.
이와 같은 협박정책밑에서 배급을 타먹고 직장을 얻고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하는수 없이 창씨개명을 하게 된것이다.
이행준: 무순시민족과학가협회 상무 부회장 겸 비서장, 국제고구려협회 회원. '요녕조선문보' 특약기자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