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초기서원 교육 비교 (1)

<영남대학교 정낙찬․김홍화 >

2007-07-08     동북아신문 기자
                                            


Ⅰ. 서 론


서원은 한국에서는 조선조 중종대, 중국에서는 송대에 설치되기 시작하여 역대로 내려오면서 두 나라 교육에 있어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 나라 모두 서원교육을 받는 자의 수에 있어서나, 그 교육의 보급 지역면에 있어서 다른 어떤 교육기관도 비교가 될 수 없을 만큼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였다. 사설교육기관으로서 서원은 관학인 중앙의 성균관이나 국자감에 버금갈 정도의 역량을 갖추었다. 그러므로 한국과 중국의 교육사 연구에서 서원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서원은 한국과 중국의 교육사에서 특수한 역할뿐만 아니라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한 나라의 서원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문화 속에서 서원이 어떠한 역할과 자리 매김을 수행하고 있었는가를 검토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웃나라 서원 교육의 문화적인 특징과 과정도 체계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국과 한국의 경우는 서원교육에 대한 비교연구가 그다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지 않은 형편이다. 지금까지 고찰된 한국과 중국의 서원에 대한 비교연구로는 한국의 김상근(1966)의 연구와 중국의 진곡가, 등홍파(1994)의 연구가 있는데, 여기서는 두 나라 서원제도에 대해 간략하게 비교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따라서 서원에 관한 연구는 교육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조망될 필요가 있으며, 이와 더불어 한국과 중국 두 나라 서원 교육에 대한 비교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 질 필요성이 있다. 특히 한국과 중국의 서원교육을 놓고 볼 때, 후기에 설립된 대부분의 서원이 초기서원1) 의 내용과 형식을 대체로 답습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에 설립된 서원의 교육을 고찰해 보는 것은 중요한 교육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필요성에 따라 본 연구의 목적은 한국과 중국 초기서원 교육에 대한 비교를 통하여 두 나라의 초기서원 교육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구명하려는 데에 있다. 문헌연구로 진행될 본 연구는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초기서원의 교육목적, 교육내용, 교육방법과 교육평가에 대해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앞으로 한국과 중국의 초기서원 교육의 체계적인 이해를 촉진시키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예상된다.


Ⅱ. 교육목적


1. 한국서원


가. 법성현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문인 성리학은 종래의 훈고학적 유학이 입신양명식 출세위주의 세속적 경향을 강하게 보임에 반발하여 존심양성(存心養性)에 입각한 극기(克己)에 의해 자신을 수양하려는 의도에서 심성에 관한 문제를 주된 성찰의 과제로 삼는다(김창욱, 1996: 88). 굳이 현대의 교육용어로 말한다면 거경은 정의적 영역으로 덕성의 함양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궁리는 지적 영역으로 지식의 확충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현상윤, 1949: 63).

서원은 입신양명의 출세를 멀리하고 향촌에 은거하여 성리학의 탐구에 노력하던 성리학자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성리학의 본래의 성격으로 본다면 서원의 교육은 선현을 본받아 자신을 도덕적으로 완성시키고자 하는 ‘법성현’에 일차적인 목적을 두었다(최완기, 1975: 29). 다시 말하자면 서원의 교육목적은 성인(聖人)과 현인(賢人)을 양성하는데 있다(정낙찬, 2003: 110). 즉, 조선조 서원의 유생들이 도달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성인과 현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른바 법성현이 그것인데, 성현을 본받아 성현과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거경으로 존심양성하고 격물치지로 궁리하는 것이다.

서원교육의 목적을 구명하는 데는 조선시대 초기서원의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한 주세붕과 퇴계 이황(李滉)의 서원성립의 동기와 목적을 고찰하는 것이 그 빠른 길이 될 것이다(송양섭: 1993: 74).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설립하면서 한 다음의 말에 초기서원의 교육목적이 거경궁리하여 성현을 본받는 데 있고, ‘법성현’은 ‘존현’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잘 나타나 있다(『무릉잡고』 권7, 원집, 죽계지서).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인데, 사람에게 가르침이 없으면 삼강․구법(三綱․九法)의 윤리가 무너져 사람이라 할 수가 없다. 가르침은 반드시 ‘존현(尊賢)’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므로 사묘(祠廟)를 세워서 선현의 덕을 숭상하고 학사를 세워 학문을 돈독히 하는 일을 기근을 구제하는 일 보다도 더 시급한 일이다.2)


퇴계가 백운동서원의 사액(賜額)을 요청하는 글에서도 세속적인 명리를 따지지 않고, 성현을 따라 배워 성현이 되고자하는 초기서원의 교육목적이 잘 나타나 있다(『퇴계전서』 권9, 상심방백).


은거하여 뜻을 구하는 선비와 도학을 강명하고 학문을 익히는 무리가 흔히 세상에서 시끄럽게 다투는 것을 싫어한다. 많은 서적을 가지고 생각하기에 한적한 들과 고요한 물가로 도피하여 선현들의 도를 노래하고, 고요한 중에 천하의 의리를 두루 살펴서 그 덕을 쌓고 인을 익혀 이것으로써 낙을 삼는 지라. 그 때문에 서원에 나가기를 즐기니.3)


또한,「의여풍기군수논서원사(擬與豊基郡守論書院事)」(『퇴계전서』 권12, 의여풍기군수논서원사)에서는 “오호라 서원은 무엇 때문에 세운 것입니까? 선현을 존숭하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닙니까? 도학을 강명하기 위해 세운 것이 아닙니까?”4) 라 하여, 서원의 설립과 교육목적이 선현에 대한 존숭과 도를 강명함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법성현이라는 교육목적이 16세기 초기서원의 교육목적으로 설정된 것은 주자의 백록동서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한국의 거의 모든 서원에서는 주자의 백록동학규를 근거로 하여 독자적인 원규를 마련하였다. 특히 조선의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교육목적 뿐만 아니라 제도, 규모, 학령 및 기타 모든 면에서 백록동서원의 그것을 모방하고 있다(『명종실록』 권10. 5년 2월 병오).

한국의 초기서원교육은 주자의 백록동서원의 영향과 당시 성리학을 주류로 하는 사상계의 영향, 그리고 서원설립 주도자들의 성리학적 경향 등에 의하여 성리학의 일반적인 목적인 거경궁리로써 법성현하려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을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나. 과거준비

서원교육이 윤리적 도덕적인 면에서는 성현을 본받고자 하는데 목적을 두었으나, 현실적인 측면에서는 당시 교육기관의 일반적 목적인 ‘관인양성’도 무시할 수 없다(최완기, 1975: 30). 한국의 초기서원의 교육목적이 이처럼 윤리․도덕적인 면에서는 거경궁리로 법성현 하려는데 있음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현실적인 요구에 의하여 과거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교육도 무시할 수 없는 실정이다. 실제로 여러 서원의 원규에는 과거준비교육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퇴계의 이산원규(伊山院規)5)에는 제사자집(諸史子集)과 문장․과거지업(科擧之業)도 두루 힘써 널리 통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석강서원 원규에도 서원에 들어와 공부하는 선비라 하여도 과거를 위한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다(入院之士 雖不能不爲科擧之事)고 하였다. 이 점에서 과거교육 역시 서원교육의 목적으로 인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서원은 관학이 부진할 때 설립되었으며 조정의 후원을 받으며 관학의 기능을 보충하였다. 그러므로 관인양성으로서의 교육이 당연히 서원에서도 교육목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최완기, 1975: 31).

위의 두 가지 교육목적, 즉 법성현과 관인양성은 유교의 교육목적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유교가 유입된 이래 두 가지의 교육목적을 설정하게 되는데 그 첫째는 성인군자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상주의적 도덕파이고 다른 하나는 경학을 배워 과거에 응시하여 관인으로 등용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현실주의적 관료파(官僚派)가 그것이다(손인수, 1987: 269-272).

이러한 서원의 두 가지 교육목적, 즉 법성현과 관인양성교육은 얼핏보면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생각되기 쉬우나 사실 ‘수기치인(修己治人)’에서 볼 때 일치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초기의 서원들이 주로 사림파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된 것을 생각할 때 한국 초기서원의 교육목적은 일차적으로는 거경궁리로 법성현 하려는데 있었고, 관인양성으로서의 교육은 부차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2. 중국서원


가. 법성현

주자는 남송 효종(孝宗) 순희(淳熙) 7년(1180) 3월에 백록동서원을 부흥시키고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되는 「백록동서원학규(白鹿洞書院學規)」를 제정하였다. 그 내용으로는 다섯 가지가 있다(『朱文公文集』 권74, 白廘洞揭示).


오교의 조목: 부자는 친근함이 있고, 군신은 의리가 있고, 부부는 분별함이 있고, 어른과 아이는 차례가 있고, 붕우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배움의 차례: 넓게 배우고, 살펴서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분명하게 분별하고, 독실하게 행할 것이니라.

수신의 요구: 말은 충성하고 믿음이 있고, 행동은 독실하고, 분노를 징벌하고 욕심을 막으며, 착한 것에 옮겨가고 과실을 고칠 것이다.

처사의 요구: 그 의리를 밝게 하고 그 이익을 도모하지 아니하며 그 도를 밝히고 그 공을 꾀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접물의 요구: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아니한 바를 사람에게 억지로 하게 하지 말것이며 행하여 얻지 못함이 있으면 돌이켜서 자신에게 구할 것이니라.6)


이 학규는 실제로는 주자가 봉건사회 고등교육을 위해 제정한 대강이다. 여기에는 교육목적, 학문하는 순서와 방법, 수신, 일 처리와 남과의 교제의 요령이 포괄된다. 이 학규의 첫 요목에서는 교육의 목적을 오교지목이라 하여 부자유친,군신유의,부부유별,장유유서,붕우유신 등 오륜으로 설정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법성현이라는 주자학의 교육목적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오륜이 교육목적이 된 것은 성현을 본받아 도덕적 인간상을 구현하는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남송 이후의 서원은 일반적으로 모두 이 학규에 근거하였으며 다만 부동한 시기와 부동한 서원이 일부 대동소이한 조목을 보충했을 따름이다.

주자는 백록동게시(白廘洞揭示)에서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朱文公文集』 卷74, 白廘洞揭示).


내가 보건대 옛 성현들께서 사람들에게 학문을 하라고 가르치신 것에는 다만 한가지 뜻이 있었던 것이니, 사람들이 의리(義理)를 강명(講明)함으로써 각기 자기 수양을 도모하고 그런 후에 그 결과가 타인들에게까지 미쳐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갓 견문을 넓혀 사물을 많이 기억하는데 힘써서 詩文으로 명성을 낚고 이익과 관록을 얻으려고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의 학문을 함은 이와 반대이다. 성현이 사람을 가르치는 법은 모두 경전에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뜻 있는 선비는 마땅히 숙독(熟讀)․심사(深思)해서 명백히 구별해야 한다. 참으로 그 리(理)의 당연함을 알아서 자신의 몸을 책하고 마땅히 이를 따른다면, 규칙(規矩)․금방(禁防)을 어찌 남이 베풀어주기를 기다릴 것인가?7)


우리는 여기서 주자의 학규제정의 취지와 교육의 목적을 알 수 있다. 주자는 학규제정의 취지와 교육의 목적이 성현의 가르침을 받아 의리를 강명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원교육이 당시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였던 명성과 이익과 관록을 얻는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고 지적하였다. 성현의 뜻이 모두 경전에 갖추어져 있으며 백록동서원의 교육도 이런 성현의 뜻에 따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자는 이 백록동게시에서 서원교육이 성현을 따라 배워 성현이 되고자하는 법성현을 목적으로 한 의리지학(義理之學)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나. 과거준비

수대(隋代)에 시작된 과거제도가 송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본격적인 제도로 형성되었다. 따라서 공명을 바라거나 이익과 관록을 얻으려는 세인들의 마음은 이 과거응시에로 쏠렸던 것이다. 당시 서원은 과거를 반대하여 흥기(興起)했지만 과거준비로 하여 그 생명을 연속시킬 수 있었다. 그러므로 서원은 과거시험의 준비기관으로 성행되었고 과거 응시자에게도 절대 필요한 기관이었다. 그리고 송대 서원은 관학이 부진할 때 건립된 교육기관으로서 관학의 보충으로서의 관리양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서원의 이 두 가지 교육목적 외에도 자료를 살펴보면 손언민(孫彦民) 이전에 송대의 서원 창설 목적을 논술한 사람들로는 성랑서(盛朗西), 진도성(陳道生) 두 사람이 있었다. 성랑서는 『중국서원제도』 중에서 ‘서원은 3대 사업을 한다. 첫째는 장서(藏書)이고 둘째는 공사(供祀)이고 셋째는 강학(講學)이다.’ 라고 하였다. 진도성은 중국 『서원교육신론(書院敎育新論)』에서 ‘서원교육은 아래와 같은 목적이 있다. 갑(甲)은 학교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것이고, 을(乙)은 응시를 준비하는 것이고, 병(丙)은 정교(政敎)를 실시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孫彦民, 1963: 78).

상술한 두 가지 논조에 서원의 창설 목적이 다 내포되지 않았다면서 손언민은 서원의 창설 목적을 7가지로 나누어서 서술하였다. 장서(藏書), 교서(校書), 봉사(奉祀), 강학전도(講學傳道), 자제교육(子弟敎育), 과거준비(科擧準備), 수용방랑사자(收容流亡士子), 개인연구(個人硏究)가 있는데 그 중에서 장서, 봉사, 강학 이 세 가지가 제일 중요하다고 하였다. 강학은 전반 활동의 중심이고, 장서는 강학의 자료이고, 봉사는 선현을 존중(尊重)하는 의미이고, 강학은 주지(主旨)이다. 기타 자제교육, 과거준비, 수용방랑사자, 개인연구 등은 수가 많지 않고 시간이 길지 않으며 영향이 크지 않았다(孫彦民, 1963: 78-83).


3. 교육목적 비교

한국과 중국의 초기 서원 교육목적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과 중국 초기 서원 모두 주자의 백록동학규를 모범으로 하여 원규를 제정하였다. 백록동학규는 주자학의 교육목적인 법성현을 서원의 교육목적으로 설정하였다. 한국의 서원에서 최초의 서원원규인 이산원규는 백록동학규를 모범으로 제정하였는데 그 후 건립된 서원들은 모두 백록동학규와 이산원규를 모범으로 독자적인 원규를 제정하였다. 백록동서원이 건립된 후에 건립된 중국서원들도 모두 백록동학규를 모범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두 나라 초기서원의 교육목적은 모두 주자의 백록동학규에서 유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한국과 중국 초기서원의 교육목적은 모두 법성현을 일차적인 교육목적으로 하였으며 현실에 부응하기 위한 과거준비를 부차적인 목적으로 하였다. 두 나라 서원 모두가 도학 연마와 인격수양을 중시하였지만 관학교육기관이 쇠퇴하는 상황에서 관리양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서원은 사람의 도학연마장소와 동시에 세력결집소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지닌 정치적․사회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게 되었으며 중국의 서원은 점차적으로 관직진출을 위한 과거준비기관으로서 성격이 강해졌다.

한국과 중국 초기 서원 교육목적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한국 서원원규는 백록동학규를 모범으로 하였지만 그 운영과 실천방법에 있어서 독자적이었다. 퇴계의 이산원규는 주자가 가려 뽑은 맹자․중용 정신을 이어받았지만 그 운영과 실천방법에 있어서는 백록동학규와 다르게 독자적이었다.


Ⅲ. 교육내용


1. 한국서원


교육내용은 설정된 교육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어지는 학습경험으로서 구체적인 것이다. 따라서 교육내용은 설정된 목적을 충실히 반영시켜 선정되고 조직되어야 하므로 교육목적에 의해 규제된다.

조선시대의 첫 서원이 창립된 16세기 중엽은 성리학의 융성기로서 성리학이 주류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서원을 설립한 주도 세력도 성리학자들이었다. 성리학자들은 서원을 기지로 성리학을 탐구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깨달아 성현과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서원에서는 관학교육기관과 같이 나라에 필요한 관리를 양성하는데 주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성리학 본연의 우주론이나 인성론 탐구에 그 교육의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므로 그 교육내용도 과거급제를 위한 사장학보다는 선현을 존숭하고 도학을 강명하는 경학이 중심이 되었다.

서원에서는 법성현이라는 교육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성현의 뜻이 갖추어진 경학을 선비들에게 가르침으로써 학문을 위한 학문을 하게 하려하였다. 서원의 교과는 서원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소학과 가례를 입문으로 삼고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와 오경(예기, 춘추, 시경, 서경, 역경)을 근본으로 하였다(민병하, 1983: 240). 이는 먼저 사서오경을 통하여 윤리적 체계를 갖춘 다음 성리학서를 읽어 뜻을 넓히게 하고자 한 것이다.

조선시대 각 서원의 교과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조선시대 서원의 교과목

서원명 (書 院 名)

교   과   목 (敎 科 目)

서악서원 (西岳書院)

소학 사서 오경

(小學 四書 五經)

가례 제사집 사장

(家禮 諸史集 詞章)

석강서원 (石岡書院)

소학 사서 오경

제성리지서 사학 자집

(諸性理之書 史學 子集)

인현서원 (仁賢書院)

소학 사서 오경

가례 자․사집 사장

(家禮 子․史集 詞章)

지천서원 (知川書院)

소학 사서 오경

격몽요결 선현성리지서 사기 사장

(擊蒙要訣 先賢性理之書 史記 詞章)

이산서원 (伊山書院)

소학 사서 오경

가례 제사 자집 문장

(家禮 諸史 子集 文章)

덕양서원 (德陽書院)

소학 사서 오경

심경 근사록 정주지서

(心經 近思錄 程朱之書)

효암서원 (孝巖書院)

소학 사서 오경

심경 근사록 정주지서

* 출처: 최완기(1975). 조선조서원의 교학기능일고. 사학연구 25: 33.


위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각 서원의 교과목은 소학과 사서오경이 공통필수과목이었으며 주로 성리학에 관계된 책으로만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서오경을 통해서 윤리학적 체계를 갖춘 다음에 각 서원에 따라 가례, 심경, 근사록, 사기, 사장 그리고 정주지서(程朱之書)등의 성리학서를 읽어 뜻을 넓히게 하였다.

그리고 서악서원(西岳書院)이나 인현서원(仁賢書院), 지천서원(知川書院) 등 일부 서원에서는 사기(史記)와 사장(詞章)도 교과목으로 선정하고 있는데 과거응시를 목적으로 설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천서원 원규를 보면 독서의 순서를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등으로 정하고 있다. 

퇴계와 율곡의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퇴계는 소학, 근사록(近思錄), 효경(孝經), 대학, 주자대전, 심경을 교과목으로 삼았고(『퇴계집』 언행록, 권1, 독서) 율곡은 소학,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시경, 예경, 서경, 주역, 춘추, 사기 및 선현의 성리지서를 독서할 수 있은 책으로 내세웠다(『율곡집』 권15, 잡저 2, 학교모범 독서).

서원의 교과과정은 대개의 이들 두 사람의 견해를 반영하여 편성된 듯 하다. 그리고 경사자집은 윤리와 관련하여 읽도록 하였으며, 과거에 필요한 사장(詞章)과 과거문(科擧文)도 읽도록 하였으나 그것은 이차적 학습활동이었다.

16세기 초기서원에서 교육내용을 가장 잘 보여준「원규(院規)」는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원규라고 할 수 있다. 이산원규(伊山院規)를 참고하면 당시 서원에서 추구했던 학문이 성리학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산원규』는 다음과 같다(정순목, 1979: 76).


유생들이 독서하는 데는 사서오경으로 본원을 삼고, 소학․가례를 문호로 삼아서, 나라의 선비를 양성하는 방법을 쫓고, 성현의 친절한 교훈을 지켜 만가지 착한 것이 본래 내게 갖춘 것임을 알고 옛 도리가 오늘날에도 실천될 수 있음을 믿는다. 모두 다 힘써 몸으로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하며, 체(體)를 밝히고 용(用)을 적합하게 하는 학문을 할 것이며, 제사자집, 문장, 과거의 업(業)도 또한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옆으로 널리 통하도록 힘쓸 것이나, 마땅히 내외(內外)․본말(本末)․경중(輕重)․완급(緩急)의 차례를 알아서 항상 스스로 격려하여 타락하지 않도록 하고 그 나머지 간사하고 요망하며 음탕한 글을 모두 원내(院內)에 들이어 눈에 가까이 하여 도를 어지럽히고 뜻을 미혹하게 하지 못한다.8)


여기서 우리는 서원에서 사서오경을 필수과목으로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소학과 가례를 문호로 삼아서 나라의 선비를 양성하는 방법에 따라 성현의 친절한 가르침을 지킨다. 그런 후에 제사자집이나 문장․과거를 위한 공부도 널리  통하도록 해야 하지만, 마땅히 내외본말이 함께 갖추어 지도록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원의 교육내용은 사서오경, 소학, 가례와 같은 성리지서가 그 중심이 되나, 과거를 준비하기 위하여 제사자집이나 문장공부도 널리 통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서원에서 실행된 원생들의 행동규범인 동시에 그들의 학문내용을 요약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뒤에 서원교육과정의 기본이 되는 지침이 되었다.

전술할 서원의 교육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6세기 초기서원의 교육내용은 거의가 성리학을 위주로 하여 구성되어 있으며 원생들은 그것을 근거로 하여 법성현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현실적인 과거공부도 무시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준비를 위한 사장(詞章)도 부분적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작문과 습자(習字)도 중요한 교육내용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단(異端)의 학설과 같은 잡문(雜文)은 짓지 못하게 하였으며, 습자는 해서(楷書)를 원칙으로 하였다.

(2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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