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 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일본

- 왜구 : 약탈을 일삼는 일본 해적 - <남중 글>

2007-07-06     동북아신문 기자
 

 

 

사이고 다카모리

(1827-1877)

남중(시인 . 본지 논설위원)


 일본 규슈 남단 가고시마는 아름답다. 무성한 아열대 식물로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긴다. 가고시마 차밭의 녹색 이랑과 새하얀 파도가 밀려오는 태평양이 그려내는 한 폭의 풍경화를 보고 있노라면 가슴은 어느새 청자비색으로 젓는다.

 이 아름다운 가고시마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있다. 가고시마는 에도(江戶)의 막부정권을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을 이룬  사쓰마번(薩摩藩)의 근거지이며, 정한론(征韓論) 등 아시아 침략정책의 발상지였다는 점이다.


 정한론자(征韓論者)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집안은 하급무사계층이었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어린시절 사쓰마의 번주 나리오키는, 자신을 겨냥한 반체제 운동에 격노하여, 이 운동에 관여한 자들에 대해 할복 등의 처분을 내린다. 이른바 「오유라소동」이다. 사이고 집안과 인연이 깊던 아카야마에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할복하였다. 사이고는 아카야마의 ‘멋진 할복(?)’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듣고, 아카야마를 ‘흠모’했다고 한다.

 1851년 은퇴한 나리오키의 뒤를 이어 나리아키라가 사츠마번주가 되었다. 페리제독의 미국 함대로 인해 양이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한 1년 뒤인 1854년, 사이고는 그의 건의를 높이 평가한 나리아키라를 수행해 에도로 향한다. 당대 제일의 개명파 다이묘였던 나리아키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당대의 석학 후지타 토우코도 만나 국사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그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메이지 유신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여 도쿠카와 막부의 시대를 종결시키고  왕권중심 체제를 수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메이지 정권의 요직에 참여하다가 그의 정한론(征韓論)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였다. 사이고는 가고시마에 일종의 사립 군사학교를 세우고 사족의 자제를 모아 교육에 힘썼다. 그 당시 영주제 폐지 등 근대화 정책 시행으로 몰락일로에 있던 사족의 불만은 이 사립 군사학교 중심으로 불붙었다. 1877년 이 학교 학생들은 사이고를 우두머리로 거병, 구마모토진대(熊本鎭臺)를 포위하였으나,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고 사이고 등 지도자는 대부분 ‘할복’하였다. 이 반란을 제압한 메이지 유신 정부는 권력을 굳건하게 확립하였다.

 메이지 유신 세력인 신정부군과 막부 잔당 간의 보신(戊辰)전쟁 중의 한 비극적 장면은 일본 TV 사극의 단골 소재이다. 성 밖에서 한 줄기 검은 연기를 목격한 백호대(白虎隊) 소년무사 20명, 성이 적에게 함락된 것으로 오인하고 전원 ‘할복’하는 것이 절정이다. 열예닐곱의 꽃다운 나이들이었다. 단 한 명의 생존자가 전한 백호대의 최후는 일본 사무라이 정신의 표본으로 일본인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하지만 백호대 대원들의 위패도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설 수 없었다. 그들 역시 메이지 정부의 입장에선 일왕에 반기를 든 역적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이고 다카모리, 일본 각지에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그의 위패도 야스쿠니 신사에 들어설 수 없었다. 반란군 두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5년 야스쿠니 신사 한쪽에 '진레이샤(鎭靈社)' 란 작은 사당이 세워졌다. 이곳에 백호대원과 사이고의 위패를 설치한 것이다. 무명용사나 민간인 전쟁희생자도 포함돼 있다. 차마 웃지 못 할 일은 일본과는 하등 관계없는 외국 영령도 ‘모셨다’는 점이다. 걸프전에서 숨진 미군과 이라크인을 합사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에서 희생된 아시아인들의 위패도 유족들의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강제적 모심’을 당했다. 그리고 일본은 ‘적군도 가리지 않고, 세계 각지의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려야 한다.’며 강변하고 있다.


 여기에는 무서운 ‘왜구(倭寇) 논리’가 숨어 있다. 야스쿠니 본전에 설치한 도죠 히데끼 등 A급 전범들의 위패를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서 사이고 다카모리로 상징되는 일본제국주의 침략행위를 일체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사쓰마도자기는 임진왜란 때 강제 연행된 조선인 도공들이 생산한 것이다. 이것을 유럽에 팔아먹은 규슈지방이 일본에서 유럽의 근대문화를 받아들이는데 가장 앞서 나간 이유다. ‘왜구 논리’가 바로 일본 근대화의 바탕이었던 셈이다. 끝없이 다른 나라의 해안을 침략하고 재산과 인명을 약탈하여 큰 재미를 본 ‘왜구 문화’, 이것을 일본이 포기하기는 매우 힘들지도 모른다.


 일각에서는 ‘동북아시아 경제공동체’의 출범을 막연히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고이즈미 전 총리에 이어, 아베 신조 현 일본 총리를 비롯한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들의 근대화와 경제성장의 기조인 ‘천황중심주의’와‘일본중심주의’를  포기할 기미가 없다. 경계해야 할 점은 일본은 그들의 내부적인 모순이 돌출될 때마다, 그 모순의 에너지를 칼날로 삼아 한국과 중국 등 이웃나라들을 ‘할복’하여 많은 것을 약탈하며, 그들의 공격적 본능을 해소해왔다는 점이다. 그것은 분명한 범국가적 차원의 ‘왜구 문화’이다. 

  

 가고시마의 ‘가미가제 특공평화회관’의 간판에서 ‘평화’라는 위선적인 단어가 삭제될 날은 언제인지? 그래서 아름다운 가고시마에서 바라본 아시아 대륙이 더욱 아름다울 날은 언제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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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