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고향
<여호길 수기>
한국행을 8년째 하니 한국이 더는 이국타향만이 아니다. 인천공항에서 리무진버스를 타고 공항로를 따라 서울시가지에 들어서노라면 눈 때가 묻고 손때가 묻고 신발 때가 묻은 거리와 골목과 상가와 가게와 간판들이 정답게 안겨오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서울의 거리와 골목을 뒤집어 내 흔적을 찾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이 땅에서 살아온 세월, 이 땅에서 받은 서러움, 이 땅에서 덧없이 흘러버린 내 인생이 아깝기만 하다.
코리안 드림은 수많은 조선족가정에 윤택과 함께 비극을 불러왔다. 정작 중국동포를 맞은 한국은 눈감아주고 묵인하면서도 ‘불법체류자’ ‘중국동포’라는 낙인을 찍어 얼굴에 붙이고 돌아서면 뒤통수에 붙이는 바람에 인권이 유린을 당하고 자유가 박탈당했다. 중국동포들은 검문검색이 두려워 그 편한 지하철도 못 타고 단속기간에는 아예 열흘이고 보름이고 쪽방에서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동포들은 돈 팔아 회사원 행색을 하고 전철을 타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다. 골목이나 시장입구 숙소에서 연행되어 ‘닭장차(철망을 씌운 수감차)’에 끌려가는 중국동포들을 보노라면 함께 통곡하고 싶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 고국을 찾은 동포에게 수갑을 채워서 쫓아낸다하더냐. 한 인간의 꿈과 한 가정의 미래가 담긴 코리안 드림이 ‘닭장차’에서 무산되는 것을 보고 “한국이 중국동포한테 어찌 이럴 수 있냐”고 한탄해 보기를 얼마였더냐.
2002년에 발표된 ‘불법체류방지종합대책’으로 ‘출국준비기간부여’가 실시되면서부터 불법체류외국인노동자사회는 일대 전환점을 맞는다. 많은 조선족들은 자유를 찾아 음지에서 양지로 나왔고 체불임금을 받기 위해 노동청과 법원을 전전 근근할 수 있게 되었으며 고국의 문화명승유적을 찾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뒤에 ‘출국유예기간 연장’ ‘체류자격변경허갗 ‘재입국허갗와 오늘의 ‘방문취업제’에 이르기까지 불법체류라는 멍에는 서서히 벗겨지고 인간과 동포의 존엄과 기본권익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참으로 꿈같은 8년이다. 자기의 인권과 자유 혈연을 찾아 나선 조선족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시가행진을 하는 모습, 초불집회를 하는 모습, 삭발을 하고 단식을 하는 모습이 어제 일이련 듯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그리고 그 사이를 동분서주하던 내모습도 20대에서 30대로 40대로 접어들었다. 서울거리에서 요즘처럼 내 모습이 활기차 보기는 처음이다. 가끔씩 나는 내 모습에서 옛날 할아버지의 씩씩하고 어엿한 모습을 찾아보고는 감격되어 저도 몰래 눈시울을 적셔본다. 그래 누가 뭐라고 해도 여기는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할아버지의 땅에서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을 이유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할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잘 참아왔다.”라고 위안해 줄 것이다. 나는 할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고국에서의 쓰라린 추억들을 접으련다. 그리고 결코 많지 않은 명랑한 기억을 살려 고국을 기억하고 사랑하리다. 할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고국도 하나이고 고국은 민족의 품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내 모습을 서울거리에 내 놓고 보니 인젠 누가 한국인이고 누가 중국동포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8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 나를 변하게 한 것이다. 말과 몸짓과 생각, 옷맵시와 생활리듬을 타는 것마저도 서울풍이다. 이젠 미각 후각 심지어 콧바람을 불어도 바람결이 태극이 되어 나간다. 요즘은 중국동포라고 밝히면 한국인들이 오히려 서운해 한다. 그러면서 중국에 가지 말고 여기서 살란다. 참으로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지난 8년 동안 내가 키워준 사장은 자그마치 수십 명이 된다. 그들에게 이윤을 창출시켜주었고 한국의 건축업에 기여를 했으며 나는 나름대로 사장들도 혀를 내 두르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이제 오래지 않으면 이 땅을 떠나야 한다. 그 동안 익숙했던 한국생활도 인젠 접을 때가 되었다. 정작 서울을 떠나려고 하니 섭섭함을 금할 수 없다. 서울에는 가는 곳마다 내 손길이 닿은 건축물과 그에 따른 추억이 있고 고달프던 내 인생이 담겨져 있다. 그 것들을 두고 그냥 떠나기에는 너무 아쉽다. 나의 땀과 지혜와 피눈물이 맺힌 서울,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청춘을 바친 서울, 고향과 가족을 애타게 그리게 한 서울, 너는 할아버지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두 번째 고향이었다.
2007년 6월12일 영등포에서
조글로/동북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