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8명, 더이상 죽이지 마라"

2003-12-19     운영자
[오마이뉴스]2003-12-18

18일 오후 2시. 서울 종로타워 앞에서는 강제추방으로 죽어간 이주노동자 추모제와 항의집회가 열렸다. 이날은 4회 세계 이주노동자의 날. 그러나 한국 이주노동자는 자신들을 위한 기념일에도 축제를 벌일 수 없었다.
올해 단속에 쫓겨 죽음을 맞은 이주노동자는 모두 8명. 지난 11월 초 지하철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버린 다라카씨의 빈소에는 "다라카의 희생을 마지막으로"라는 플래카드가 걸렸지만 그 뒤로도 7명의 이주노동자들이 그의 뒤를 따른 것이다.
이 중에는 다라카씨나 비꾸씨, 안드레이씨처럼 단속추방에 위기를 느껴 자살한 노동자도 있지만, 병이나 추위 때문에 숨진 노동자도 있었다.
지난 9일 재중동포 김원섭씨는 체불임금을 받으러 나갔다가 서울 도심에서 얼어죽은 채 발견됐다. 김씨는 죽기 전까지 14차례에 걸쳐 경찰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불법체류자인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같은 날 방글라데시에서 온 자카리아씨는 강제단속으로 일자리를 잃고 심장병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병사했다.
8명의 노동자가 죽었지만 무대에 오른 영정은 7개. 나이지리아 노동자 메케씨의 죽음은 며칠 전 일이라 미처 영정도 마련되지 못했다. 무대 위 영정 중에서도 안드레이씨는 사진이 없어 이름을 쓰는 것으로 대신했다.

침낭과 이불로 한달째 겨울 노숙농성

이주노동자들은 두터운 점퍼에 귀마개, 모자, 장갑 등으로 중무장을 하고 집회에 나섰다. 검은 옷에 삼베 완장을 차고 추모의 뜻을 강조하는 노동자도 있었고, 붉은 색 노동조합 조끼와 머리띠를 묶어 투쟁의지를 강조하는 노동자도 있었다. 한 노동자는 바지에 "노동자는 하나다. 노동자 믿고 싸워라 투쟁"이라는 구호를 적어 놓기도 했다.
이들은 대부분 이주노동 관련단체나 종교시설에서 한달 넘게 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민주노총 평등노조 이주지부의 경우 명동성당 들머리를 농성장으로 삼았다. 성당 안에 들어가지 못한 채 한겨울 날씨에 침낭과 이불만으로 추위를 견딘 날이 이날로 벌써 34일이다.
실내에서 농성을 한다고 편한 것은 아니다. 추위는 덜하지만 수십명의 각국 이주노동자들이 같이 생활하다보니 밥 한끼 제 때 먹기도 쉽지 않다. 혼자서는 바깥출입도 할 수 없고, 언제 잡혀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잠도 편하게 잘 수 없다.
이미 여러 차례 집회와 농성에 참여했던 이주노동자들은 익숙한 한국어로 "노동비자 쟁취하자" "단속추방 박살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전 민중이 똘똘 뭉쳐 노무현 정권 박살내자"와 같은 다소 어려운 구호나 "파업가" "철의 노동자"와 같은 한국 민중가요도 쉽게 소화해냈다.

"얼마나 더 죽어야 인간사냥 멈추겠냐"

이날 무대에 선 사말 평등노조 이주지부장은 "이미 죽은 노동자는 물론이고, 살아남은 이주 노동자들도 하루하루를 고통으로 보낸다, 한국정부는 이주노동자가 얼마나 더 죽어야 인간사냥을 멈추겠냐"고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사말 지부장은 또한 "이주노동자들은 불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노동부에 임금체불이나 산업재해도 신고하지 못한다, 신고해도 합법이냐는 질문만 돌아온다, 월세 보증금 300만원, 500만원도 못받는 경우가 많다"고 노동자들의 상황을 설명했다.
재중동포들은 특히 "같은 민족인데도 버림을 받았다"며 한국에 대한 배신감을 드러냈다. 몇몇 동포들은 안중근 의사, 김구 선생 등의 그림이 그려진 피켓을 들고 독립유공자의 후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피켓 옆에는 직접 얼굴에 콧수염을 그리거나 검고 둥근 뿔테 안경에 검은 두루마기를 입어 안중근 의사나 김구 선생의 모습을 재현하기도 했다.
정부가 이주노동자 대책에 해법으로 제시한 고용허가제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재중동포 김정자(57)씨는 한국에 온지 3년째여서 등록만 하면 1년동안 합법노동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도 이를 거부하고 투쟁에 나섰다. 등록한다고 해도 1년 더 일하고 한국을 떠나야 하는데다가 사장에게 불만이 있어도 자리를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김씨는 "사기를 당해 임금을 못받거나 병에 걸려 치료하느라 한국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수두룩하다"고 전했다.

"기만과 차별의 한국사회 회개해야"… 이주노동자 노숙 지속

이주노동자들은 이날 집회를 마치며 무대 위 영정에 국화를 바쳤다.
헌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하얀 옷을 입은 이맘(이슬람 성직자)이 죽은 자를 위한 코란을 외웠고, 마석 샬롬의 집 이정호 신부는 "기만과 차별의 이 한국사회가 회개하며, 이주노동자를 살리고 따뜻하게 끌어안는 성탄절과 세밑이 되기를 기도한다"며 조사를 낭독했다. 이들 노동자들은 오후 3시 30분경 추모제를 마친 뒤 종로 탑골공원까지 행진한 뒤 자진해산했다.
이들은 앞으로도 단속추방에 맞서 농성을 이어갈 계획이다. 현재 이주노동자들은 서울 뿐 아니라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마석 샬롬의 집 등 수도권과 경남외국인노동자의 집, 대구외국인노동자의 집 등 각 지역에서 무기한 농성이 계속하고 있다.
한편, 전국민중연대는 18일 성명서를 내 "민족과 국경의 틀 속에 갇혀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단속과 추방을 강행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중연대는 이 성명서에서 "국내체류 4년 이상된 미등록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만으로 "인간사냥"하듯이 잡아서 본국으로 추방해버리는 것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자국 노동자를 탄압하는 것도 모자라 이주노동자까지 죽음의 행렬로 몰아세우는 정부와 사회는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