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기에 대한 생각
종소리문학사, 04급 조문학부 주매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삼복철 정오의 무더위에 시원한 그늘을 던져주는 마을앞 도랑가에서 칠십고희의 외할머니가 여름해살에 까맣게 그을린 쪼글쪼글한 얼굴로 정성스레 흐려진 안질을 끔벅거리며 열심히 미꾸라지를 다듬고계신다. 성수기라 고기가 그물이 모자라서 담지 못할 정도로 고기채발에 낚여들어온 미꾸라지들이다. 저녁식사는 푸짐한 추어탕으로 후후 불어가며 땀에 흠뻑 젖어서 더위를 시원히 날려버릴것이다. 인생은 한마디로 자연으로 돌아갔을때 가장 행복한것일갉
지난여름방학 외할머니댁에 머물면서 체험한 인상 깊은 추억의 한단락이다. 외할머니께선 미처 다 먹지 못한 미꾸라지들을 시내물에 깨끗이 씻어 그물을 덮어 말린다. 땡볕도 마다않고 쉬파리들을 쫓아내며 지키고계신다. 《이것들이 비린내가 싹 날아가야 파리들이 모여 들지 않는단다.깨끗이 말려서 너희 아버지 주고 또 영화네도 주어야지.》 할머니의 얼굴에 비친 주름살이 확 펴질것처럼 환한 미소를 보면서 그리고 할머니의 인생이 담겨있는 달콤한 옛말을 들으며 시골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이것두 한철이란다. 이 계절이 지나가면 추어도 더는 잘 잡히지 않는거야.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싸늘해지면 그땐 지금처럼 추어가 잡히지 않을거야.》
내가 강태공이 아닌 이상 낚시군의 마음을 알수가 있으랴. 외할머니의 말씀은 아무렇지도 않은것 같지만 외국 계신 엄마생각에 쓸쓸해진 내 마음은 쓸쓸해왔다. 엄마도 나처럼 외할머니 생각을 하고계실까? 문득 외할머니 머리에 내려앉은 하얀 서리가 유난히 나의 시선을 자극해왔다. 엄마머리엔 서리가 있었던가 기억을 되살려본다. 아니 나의 기억속에는 없었다.
나는 어릴적 가을날아침 일찍 잠에서 깨여 넓은 들 한복판을 쌀가루를 뿌린듯 하얗게 물들인 서리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어린 동심에 알수 없는 서글픔을 느끼던 기억이 아련하다. 무엇이 부족한것도 아니고 무엇이 더 넘쳐나는것도 아닌 푸른 들이 누른색으로 옷갈이를 하고 그위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 앉았을뿐인데 왠지 모르게 서글프던 기억이 선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하얀 서리가 내린 들이 동화속 공주가 살고있는 마법의 성처럼 예쁘다는 생각이 더 컸던것 같다. 하지만 그때 나의 기억을 산산이 부서지게 하는 충격적인 사실들이 나의 파란 동심에 하얀 서리로 내려앉는다.
넓은 들에 초록빛 풀들이 원색을 잃어가고 누르스름한 떡잎위에 하얀서리를 머금고있는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알게 모르게 서글픈 인상이 남았던것만은 사실이다. 무상에 대한 동경일까? 희망일까? 농사짓는 농부에게도 일명 무상기(无霜期)가 존재한다. 작디작은 씨앗에서 껍질을 뚫고 싹을 키우고 숨막히는 흙을 비집고 나와서 잎을 늘이고 가지를 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황금빛 가을이 되여 열매가 영글어가기까지 서리가 내려서는 안되는 무상기가 있어야 하는것이다. 만약 서리가 앞당겨 내리면 감산이 되여 알찬 열매가 맺어지지 않는것이다. 농부에게는 무상기가 축복이고 다산이고 행복이고 희망인것이다.
나는 점점 늘어나는 우리 조선족학생들의 실학률과 저학력으로 도시에서 웨이터나 복무원으로 일하면서 돈을 버는 족족 소비하고 미래에 대한 동경과 희망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서글플 때가 참 많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성장에 유족한 거름과 토양이 되여주려고 외국에 가서 외화를 벌어들이지만 그 피땀이 슴배인 돈들이 철없고 무지막지한 자식들에 의해 다수는 류행에 유흥에 물쓰듯이 흘러들어가는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례의바른 민족에 교육을 최선으로 꼽던 문명의 민족이 이렇게 점점 간단한 례의와 상식도 옳바로 갖추지 못한 사회의 상처와 아픔으로 다가온다. 함께 단란히 앉아 일상을 이야기하고 저녁을 즐길수 없고 부모 없는 단란하지 못한 가족으로서의 개념이 희미해져가고 아이들의 마음속에 찬란한 동년의 추억이 사라져가고있고 우리 말을 지켜가고 배워가야 할 아이들이 한족학교에 몰려들고있다. 문화는 새싹들로부터 지켜가야 할것이다. 요즘은 민족대이동의 시기이지만 우리의 새싹들이 작은 한점의 풀씨가 되여 곳곳에 예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가고 한해한해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가. 설령 서리가 내렸다 해도 봄이면 해풀로 초록빛을 드러낼것이 아닌가.
하늘이 정해준 무상기는 자연의 섭리라 거절할수가 없지만 우리가 한포기의 새싹이 되여 문화지킴이로 된다면 정녕 인간이 창조한 무상기의 공간이 되여갈것이다. 하늘이 내려줄 천복인 무상기를 더는 기다릴수 없었다. 우리 마음속 깊은곳에 숨어있는 무상기를 상상한다. 우리 문화와 언어와 례의와 아름다운 의복문화를 지켜가고 한가락 흥겨운 민요가 우리 심금을 울릴 때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무상기의 서리 없는 세계가 펼쳐질것이다.
따뜻한 봄기운이 짙어진다. 이상기후로 때아니게 봄눈이 두툼히 쌓여있지만 예쁜 새싹들에게는 황사와 모진 가뭄을 이겨내고 쫘악 기지개를 펴고 일어날 좋은 수분이 거름이 되여줄것 같아서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진다. 나의 마음속의 무상기의 동경이 이 글을 읽고 계실 모든이의 마음속에 전해졌으면 더없이 큰 행복이 될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