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다는 것에 꽃을 드려라
<이승국 수필 3>
멀리 서산자락에 빨간 노을이 물들었다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 그 아쉬움이란 마치 다 먹을 수 없는 아이스크림이 손에서 녹아내리는 것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다. 그런 아쉬움이 늘 우리 모두의 시야에서 재생되고 반복되는 것은 바로 잃었다가 다시 얻는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라고 보아진다. 내 가까이에서 내 몸에서 떨어져나가거나 잃어져 버린다는 것은 모두가 아쉬움을 자아내는 일이다. 하기에 그렇게 잃어져가는 것에 눈물을 보이며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나한테 주어진 것을 잃어갈 때 나 스스로도 모르게 나한테 또다시 주어지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무엇인가 꼭 얻어진다는 희망, 그런 욕심의 심연 속에 빠져 저도 모르게 일루의 희망이라도 가져보는 것이리라. 그것이 훌륭하든 유용하든지를 물론하고 잃어서 없어진 그 자리에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면 된다. 그러나 대신할 수 없는 것도 수없이 많다. 그래서 눈물도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눈물보다 더 신성한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다는 것에 꽃을 드리는 것이다.
어느 해 청명에 아버지 산소에 갔다가 어머니는 아버지 묘소 둘레에 코스모스꽃씨를 뿌리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고운 꽃은 요염해서 아버지를 괴롭힐 거다. 코스모스가 그래도 마음편하잰니.》
같은 값에 다홍치마라는데 요염하면 어떻다고 꽃까지도 다 가려가며 마음쓰는가싶어 어머니의 기색을 살폈더니 아주 정색해있는지라 나는 문득 뭔가를 알 것만 같았다.
《어머니, 혹시 질투하시는 겁니까!?》
《웃기잰니? 귀신하구 질투하게. 가을 늦게까지 피는 코스모스가 추석에 찾아오면 보기 좋다구 그러잰니.》
정말 그랬다. 그해 가을 추석에 다시 아버지산소로 찾아가니 아니나 다를 가 묘주위에 울긋불긋 코스모스가 반기고있는것 이 아닌가? 몇 송이 피어있지는 않았어도 어머니는 물론 우리 온 집 식구들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아버지가 누워계시는 자리에 꽃밭을 마련해드렸으니 알게 모르게 효도를 한 셈이였다.
《봐라 보기 좋잰니?》
어머니의 감실감실 타버린 얼굴에 이슬 같은 미소가 찰랑?!...
나는 어머니의 그 웃음을 보며 갑자기 가슴이 찡하니 저려 을 금할 없었다. 일생의 동반자를 잃어 낙하시던 그 모습에 비낀 미소에서 나는 어머니가 왜 그렇게 코스모스꽃씨를 뿌렸는지 알게 되였다. 그것은 죽어간 남편에 대한 충성도 아니요, 미안함도 아니었. 그것은 바로 꽃 은 자신의 마음을 고스란히 고인이 잠든 자리에 곱게 펴! 드린 것이였다. 다시는 찾아올 수 없는 일생의 동반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사람이 잠든 자리가 바로 어머니가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는 가장 편한 자리가 아니겠는가? 그러한 자리는 아름다워야 하고 그러한 자리는 즐거워야 하는 것이다. 세상 끝까지 다 가지 못한 그 사랑이야기를, 밤새도록 다 하지 못한 인생이야기를, 그리고 가지런히 누워 별이라도 헤아릴 것만 같던 나날들을 이렇게 꽃밭을 만들어 더듬어보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축복이라는 말을 곧잘 쓰곤 한다. 자기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에 대한 축복은 가장 신성하고 깨끗한것 이며 값진 것이리라. 그래서 내 곁을 떠나가면 미워지기에 앞서 축복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뜨거운 마음에 받들린 축복의 뒤에는 항상 위대한 사랑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을 대변해주는 것이 바로 아름다운 꽃이다. 그래서 꽃은 사랑의 상징물이며 아름다움의 화신이고 그래서 꽃은 항상 가장 사랑스런 사람한테 드리는 것이고 그 꽃으로 마음을 펼쳐드리는 것이다.
잃은데 대한 보상으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이 바로 꽃을 드리는 것이다. 순간의 위안으로도 될 수 있고 영원한 보상으로도 될 수 있는 것, 그러한 마음가짐이 있어 동경도 그맘큼 아름다워지는 것이리라. 잃어져버린 그림자, 잃어져간 발자국, 보이지 않는 그 모습 뒤에 서서 눈물이 아닌 꽃을 뿌려드리는 그 이미가 얼마나 신성하고 소중한지 누구도 다는 모를 것이다. 선혈을 휘뿌려 이 강산을 찾아준 선인들의 혼을 위로해 해마다 피는 진달래를 그 누구도 낯설어하지 않을 우리 민족과 나란히 파란만장한 풍운세월을 함께 겪어온 진달래, 그 진달래가 바로 선인들의 잃어져 가버린 길에 펴드리는 꽃이 아닌가 생각 든다. 그래서 진달래를 보면 마음이 항상 포근해지는 것이 아닐까. 연변의 산과 들에 피어나는 진달래가 성화(圣花)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도 바로 그렇듯 깊은 뜻이 슴배어 있기 때문이리라. 작은 가슴에 지닌 소박한 뜻을 꽃으로 펴드린 어머니의 그 모습이 어찌 내 어머니 한사람의 모습뿐이랴. 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리념을 보았고 가장 소박한 마음가짐을 보았다. 잃어버린다는 것에 꽃을 드릴 수 있는 사람으로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 마음속에 그러한 꽃을 피우기 힘들어서이기 때문이리라.
여기까지 쓰고 나니 소월씨의 시 구절이 언뜻 뇌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영변에 약산진달래꽃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 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