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박사가 되어 교수는 되어도 NCC총무는 하지 마시오

서경석 목사의 장편실화 <나의 스토리 23~25>

2007-04-16     서경석 목사

YH사건 이후는 불안한 ‘서울의 봄’ 시대였다. 3김 시대가 열리고 12·12 사태가 일어나서 언제 다시 군부가 집권을 하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계엄령 시대였다.
한편으로는 복직국면이 열렸다. 정치인도 복권되고 학생도 대부분 복학 되었다는 노동자만은 복직이 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감옥에서 나온 뒤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복직 캠페인을 전개했다.


80년 4월 15일 광화문에서 가두캠페인을 하다가 동일방직 해고노동자인 정명자씨와 함께 계엄법 위반으로 또 다시 잡혀 들어가고 말았다. 민주화시대가 열린 것처럼 모두 들떠 있던 시기에 노동자들의 복직캠페인을 벌였다고 덜컥 구속이 되니 참으로 허무했다.
그렇게 해서 3번째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사실은 이 옥고는 내게는 행운이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갖은 고문을 당하고 있을 때 나는 이 사건으로 감옥에서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속되기 전인 서울의 봄 시절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가는 대표적인 조직으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회의’가 결성되었다.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등 세분이 공동대표를 맡고 20여명의 집행위원이 있었는데, 그 중 청년대표로는 나와 심재권, 조성우 세 사람이 지명되었다.


그 때 민주화 운동진영의 최대 이슈는 김대중씨와 김영삼씨가 어떻게 하나로 합칠 것인가의 문제였고,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한 재야인사들은 대부분 김대중씨를 지지하고 있었다.
한완상교수, 문동환박사, 이문영교수도 김대중 씨와 긴밀하게 밀착되어 있었는데, 그 분들이 나에게 “앞으로 새로운 정치를 해야 하는데 젊은 사람들도 많이 참여해야 한다”면서 “김대중 씨와 함께 정치를 해보자”는 권유를 했다.


나도 정치를 하는 것이 괜찮겠다는 생각으로 정치활동을 모색하는 소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만 동일방직사건으로 구속되는 바람에 그곳에서 몸을 빼게 되었고 또 그 덕분에 뒤이어 발생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라는 대란(大亂)을 용케 피할 수 있었다.
광주사태가 터졌을 때 나는 서대문 구치소에 있었다. 5월 15일, 데모가 워낙 극심해서 구치소까지 최루탄 냄새로 고통을 겪던 날 문익환목사와 이문영교수, 그리고 예춘호 선생 이렇게 세분이 서울구치소로 특별면회를 오셨다. 그리고는 들뜬 목소리로 “조금만 기다려. 이제 민주화가 다 됐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말에 나도 한껏 고무되어 있었는데 며칠 뒤 담당간수가 눈물이 글썽거리며 “다 틀렸어. 광주에서 큰 일이 벌어졌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광주 사태 소식을 대충 들려주었다.


광주사태 소식을 듣고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 버렸다. 1966년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 그때까지 14년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민주화 운동에 전념해 왔다. 한 번도 운동을 쉰 적이 없었고 감옥에 들어갔다 나오면 또 다시 운동을 했고 그러다가 또 들어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광주사태’라는 충격적인 사건 앞에서 완전히 그로기 상태에 빠져 버렸다. 운동에 대한 깊은 좌절감이 나를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할 것 같은 무력한 상태로 빠뜨렸다.


앞으로도 계속 사회운동을 해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최소한 몇 년은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뭔가 내 삶의 전환이 있어야한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목사의 길을 가기로 감옥에서 결심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목회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었고 문익환 목사나 박형규 목사처럼 인권운동을 하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미국에서도 마틴루터 킹 목사나 제시잭슨 목사도 다 목사가 아닌가?



그해 7월 나는 석방되었다. 1심에서 계엄법 위반이었기 때문에 수경사 군사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재판장을 잘 만나서 징역형 1년을 언도받았다가 관할관 확인에서 형 집행이 면제되었다. 아내도 나를 보고 가장 행운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에 연루되는 것을 피해서 3개월간 감옥에 ‘보호받고’ 있다가 다시 나왔으니 말이다. 그것도 당시 내가 YH사건 재판 중에 보석으로 나온 상태여서 일반 법정에서는 절대로 석방될 수 없는데 군사재판이다 보니 형집행 면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계엄 하에 있었기 때문에 수경사에서 중령계급을 가진 재판관으로부터 재판을 받았는데, 나는 ‘모두가 복직되는 상황인데 노동자들만 복직이 안 되어 생존권에 위협을 받고 있으니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노동자들을 위한 캠페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는 요지의 최후진술을 했다. 그랬더니 재판장이 감동을 받고 재판이 끝난 뒤 내 말의 사실여부를 확인하였는데 사실인 것을 확인하고는 선고는 1년을 하되 바로 형 집행면제로 다음날 석방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92년경 경실련 사무총장시절에 TV 사랑방 좌담에서 기억나는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이 재판 이야기를 했는데 마침 수방사 (수경사의 후신)법무참모가 TV를 보고는 과거의 재판기록을 뒤져서 당시 재판관이 현재의 수방사의 김진선사령관임을 알아 낸 것이다. 그 바람에 나는 김진선장군과 십여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분과 우의를 다질 수 있었다. 이 분은 나중에 2군사령관 대장까지 진급해 육군참모차장을 지냈다. 나는 이분과의 친분 덕에 뒤에 공선협 활동을 하면서 이지문 중위사건으로 군과 대립하였을 때 마침 이분이 참모차장이어서 그분과 내가 군과 시민사회의 반목을 푸는 데 가교 역할을 했다.


돌이켜 보면 김장군은 재판을 하던 당시 용감하고 진지한 분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나의 최후진술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나를 석방시켜 주었다. 또 나도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임했기 때문에 재판관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 행운이 어디서 어떻게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최선을 다해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석방된 후에 나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당시 후배들은 광주사태 이후 반미운동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후배인 이상희 등 여럿이 찾아와서 나를 성토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나는 중앙정보부와 협상을 했다. 신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다. 그것을 허락해주면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직을 사임하겠다. 이번에도 예전처럼 신학공부를 못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허락할 것인가? 그런데 이번에는 중앙정보부가 허락을 했다. 그래서 나는 다음해에 <사선>총무직을 사임하고 광나루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후임 사선총무는 권호경 목사(前 NCC 총무)가 맡았다. 그때가 81년도였으니 내 나이가 만 32세일 때였다.

장신대 77기로 나는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특별히 77기부터 신학생의 숫자가 2배 이상 늘어 150명이 되었다. 그런데 신학교에 입학해서 나는 다시 운동권 조직인 현대신학연구회(약칭 현신)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 회원 수를 40명까지 늘렸다. <현신>은 그 때 이후 지금까지 장신대에 계속 존속하고 있고 지금은 나와 생각이 달라 그 모임에 나가지는 않지만 당시에는 한 학년 학생의 20~30%를 포괄하는 대규모 조직이었다.



그런데 나는 장신대에 입학할 때 장신대와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 두 곳에 입학신청을 했었다. 전에도 장신대에서 입학허가가 되었다가 다시 취소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입학이 허가될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두 학교에서 다 입학허가가 나왔다.


그런데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신청을 한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아내는 교회여성연합회에서 프로그램 간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함께 유학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국에서는 두 사람이 같이 공부하는 것이 불가능한 반면에 미국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 둘 다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원래 이대 사회학과 재학 중에 외국유학을 떠나려고 했다. 그런데 나를 만나면서 유학을 포기하고 옥바라지만 실컷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점을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까운 친구인 김용담 판사와 박세일교수, 그리고 평상시에 나를 지도해 주시던 김용복 박사(前 한일장신대 총장) 등이 심각하게 내가 유학을 떠날 것을 권유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정보부와 협상을 했다. 미국유학을 허락해 달라. 내가 장신대에서 계속 있으면 당신들 골치 아플 것 아니냐하고 설득했다. 그런데 나도 정부를 설득하기도 하고 친지를 동원하기도 했지만 전두환 정권도 박정희정권과는 달리 새로운 모색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82년 1월초에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로 유학의 길에 오를 수 있었다. 그때 외국으로 나갈 수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한완상 박사, 서경석, 그리고 이신범 등이 있었다.  


그리고 출국하면서 우여곡절도 겪었다. 짐을 들고 공항에 나갔는데 공항의 출국금지자 블랙리스트가 해제되지 않아 짐만 떠나고 몸은 나가지 못했다가 다음날에야 다시 출국할 수 있었다.

출국일자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가까운 후배인 김경남(현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 목사)이 나를 찾아왔다. 당시 내가 유학 가는 것을 후배들은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김경남도 마찬가지였다.


경남이가 내게 말했다.
“경석이형, 미국에 가서 반드시 박사가 되어서 돌아오시오. 그리고 연세대학교 교수가 되시오. 다만 NCC총무는 하지 마시오. 한국에 남아 있는 우리도 출세할 수 있어야 하지 않소. 형이 이것저것 다하면 우리는 무엇을 하란 말이요? ”
나는 경남이의 말을 들으며 무척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가 비록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지만, 절대로 박사학위를 따지 않겠다. 그리고 다시 귀국해서 사회운동으로 되돌아오겠다.”
결국 나는 이 약속을 지켰다. .


프린스톤 신학교에 교환교수로 왔었던 이만열 교수는 내게 기왕에 유학을 왔으니 반드시 박사를 따라고 강하게 설득했다. 하지만 나는 이날의 결심을 지키기 위해서 끝내 박사학위를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이 결정은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신학박사 학위를 땄더라면 아마도 십중팔구 귀국해서 신학교 교수가 되었을 것이다. 학위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편한 마음으로 사회운동으로 되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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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급진 신학교에서 되찾은 복음주의 신앙



나는 82년 1월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해 84년 6월에 신학교 3년 과정을 이수했고, 그 다음해 유니온신학교에 들어가 기독교윤리학 석사를 86년 취득했다. 그런데 이 5년의 기간 동안 나는 오히려 복음주의 신앙을 되찾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프린스턴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나는 민중신학의 관점에 서 있었다. 한국에서 내가 펼쳤던 기독교 운동도 다 민중신학 캠프에 속해 있으면서 행했던 일이었다.
그 시절 나는 ‘누가복음 4장 18절’의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눈먼 자에게 눈뜨게 하며’라는 구절을 읽을 때면 앞에 나오는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구절은 읽지 않고 뒤에 나오는 해방의 메시지만 즐겨 읽었다.
내가 그랬던 이유는 그 구절의 핵심은 뒤에 나오는 해방의 메시지이고 앞에 나오는 말은 군더더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때까지 내 경험 속에서 성령운동을 하는 목사님치고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운동을 하시는 분을 보지 못했고, 또 눌린 자를 자유케 하는 운동을 하는 분치고 성령을 강조하는 목사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화운동에 종사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 와서는 그 과정에서 겪은 신앙체험을 통해 이런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주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라는 말이 이 구절의 핵심이고 그 말없이는 뒷부분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는 70년대를 마감할 즈음에 가서는 다른 사람들이 무신론자라고 말하면 속으로 ‘저 사람은 아직 인생의 고난을 겪어보지 않아서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 정말 죽음 앞에서, 극한적인 고통 앞에서 깊은 좌절을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저런 얘기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에 있을 때는 나는 이러한 신앙 체험을 온전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신학적 분위기가 완전히 민중신학 적이었기 때문이다.
민중 주체론과 민중해방이 강조되고, 예수의 부활마저 민중의 부활로 이해되는 상황 속에서 나는 나의 복음주의적 신앙체험을 신학화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한번은 이런 경험도 있었다. 74년에 감옥에 갔다가 75년 2월에 석방된 뒤에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개최한 신학세미나에서 내가 발제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나는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감옥을 가고, 그것도 15년, 20년의 중형을 받았다가 10개월 만에 석방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라는 발제를 했다가 안병무 박사로부터 호되게 비판받은 적이 있다. 안 박사는 ‘어떤 특정한 사건을 너무 성령의 역사로 연결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며 나에게 신학적인 기초가 없다고 질책했다.


나는 안 박사의 비판에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민중신학 이론의 대가인 안 박사의 비판을 거역할 용기도, 지식도 없었다. 마음 속에 ‘이것은 아닌데..’하는 개운 찮은 마음만 있었을 뿐, 우리는 그분의 입장을 추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프린스턴신학교에 와서 본격적으로 신학수업을 받은 뒤부터 나는 나의 이러한 신앙체험을 신학화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했고, 나의 신학적 입장을 주체적으로 세워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그동안 비판해왔던 개혁신학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은 민중신학과 전통주의 신학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로 합일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칼빈으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개혁신학을 아주 보수적이고 내세적이고 사회문제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이기적인 신학이라고 비판했었다. 그런데 프린스턴에서 개혁신학을 제대로 공부하게 되면서 나는 개혁신학이야말로 풍요롭고 균형 잡혀 있으며, 소외된 사람과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보이는 그런 신학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뉴욕의 한 교포교회에서 이문영 교수님의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 그 내용도 나를 복음주의 신앙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 교수님은 YH사건의 공범으로 함께 징역살이를 한 분으로 평소에 내가 매우 존경해왔던 어른이시다. 그분은 내가 동일방직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있었던 1980년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군영창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때 영창의 분위기가 워낙에 살벌해서 ‘이제는 내가 죽는구나’하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죽는다고 생각한 순간, 이 교수님의 머리에 떠올랐던 생각은 평소에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였던 자유, 정의, 인권, 민주주의 등이 아니고 평소에는 전혀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던 질문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내가 죽으면 구원을 얻을 것인갗하는 질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교수님은 오랫동안 이 질문과 씨름하시고 나서 나중에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리고 나서 후에 법정에서 최후진술을 할 때 과거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모습으로 강력하게 현 정권을 비판할 수 있었다고 했다.


실제로 당시 이 교수님의 최후진술은 여러 구속자들 가운데서도 유신체제를 가장 혹독하게 공격한 것이어서 우리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나는 이 간증을 들으면서 이것은 이 교수님 개인만의 경험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이 공통으로 겪고 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시절 내게 민중신학은 나를 감격시키고 또한 내 자신을 기독교 민중운동에 전적으로 헌신하도록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 ‘살아 있는 신학’이었다. 그리하여 민중신학은 내 자신으로 하여금 전공을 포기하고 진보적 기독교운동에 전적으로 투신하도록 만든, 일종의 길 안내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고난당한 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메시지만 강조했을 뿐 그 고통의 현장에서의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소홀히 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나라 100년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서 순교한 목사님이 많으신데 그분들은 민중신학이나 자유주의신학은 단어조차 들어보지 못하신 분들이시다. 단지 죽음의 고통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강한 신앙심을 갖고 있는 분들일 뿐이다. 하지만 이분들은 순교를 통해 자신의 신앙을 지켰을 뿐 아니라 ‘일제의 압제에 저항하는’ 사회참여도 동시에 실천하셨다. 전통신학에서 말하는 복음적 신앙이란, 이처럼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도 버릴 수 있는 강한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이러한 신앙의 강한 힘과 고귀한 가치를 실천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져 보수교회들은 진보교회를 보고 ‘저것은 정치운동이다’라고 비난했고, 반대로 진보교회에서는 보수교회를 향해 ‘저것은 샤머니즘이다’라고 비난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두 가지 모두 2천년 전 예수의 삶 속에 모순 없이 하나로 용해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성령운동이나 사회운동이나 모두 예수님의 삶의 모습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분리해서 서로 갈등하고 반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점점 더 내가 지난날 얼마나 우물안 개구리였나를 깨닫게 되었고 또 민중신학의 한계를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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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학생의 견해는 'NARROW MINDED(협소한 생각)요



유니온신학교에는 베버리 해리슨(Beverly Harrison)이라는 급진신학적 입장을 갖고 있는 유명한 여신학자가 있다. 나는 그 교수의 여성신학 강의를 선택해서 들었었다.


그런데 그 때는 교포신문에 김근태 선배가 고문을 폭로한 이야기가 상세하게 났을 때 였다. 김 선배가 발가벗겨져서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박박 기면서 자기의 인격이 완전히 파괴되는 경험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고문을 너무 당해서 발 뒤꿈치에 딱지가 크게 붙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 기사를 읽으면서 나는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빠졌다. 김근태 선배는 내가 통혁당 사건이후에 방황하고 있을 때 내가 바로설 수 있도록 도와준 선배이기도 했지만 그분의 고문이야기는 내가 과거에 중앙정보부에 붙잡혀 가서 고문당하던 기억을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아나게 했다. 그래서 김근태 선배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 나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고난의 현장을 뒤에 두고 지금 미국에 공부하러 와 있는 것조차 너무도 죄스럽게 느껴졌다.  


그럴 즈음 해리슨교수의 여성신학 강좌에서 헤이우드라는 여신학자가 쓴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책의 요지는 ‘저 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명령하고 지시하는 그런 하느님은 가부장적인 하나님으로서 올바른 하나님 상이 아니고 오히려 진짜 하나님은 옆에서 친구처럼 나를 격려해주고 나에게 속삭이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그런 여성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이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나는 헤이워드의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헤이워드가 평상시에 잘 접할 수 없는 신선한 접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고마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헤이워드의 입장에 강하게 반발했다. “왜, 당신들의 자유주의적 서구신학에서는 우리가 절망의 한가운데 있을 때 저 위에서 우리의 절규를 들으시고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 없는가? 우리들 제삼세계의 고난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옆에서 속삭이는 친구 같은 하나님은 원치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하나님은 우리를 절망의 한가운데에서 울부짖을 때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바로왕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내신 그 하나님이다. 이런 하나님을 당신들이 가부장제적 하나님이라고 비판해도 좋다. 당신들 서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제3세계 민중의 고난을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내가 강의실에서 격한 목소리를 주장했던 발언내용이었다. 이러한 나의 주장은 그 강의실에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놓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유니온신학교에서 기억에 남는 또 하나의 강의는 제임스콘의 흑인신학 강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흑인신학자 제임스 콘의 강의는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러나 제임스 콘의 입장 자체에서 나는 전적인 지지를 보낼 수 없었다. 민중과 민중혁명의 절대화라는 부분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로서는 아무리 해도 폭력의 정당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콘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알렌 보색의 흑인해방 신학은 오히려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알렌 보색은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그리고 만약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폭력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는 용서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나는 보색의 책을 읽으면서 개혁신학, 복음주의 신학의 전통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회개혁을 위해 헌신할 수 있고,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강한 신앙적 투쟁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위해 복음주의 신학을 포기하고 민중을 절대화하는 경향으로 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나는 그 뒤 베버리해리슨 교수에게 여성신학에 관한 페이퍼를 제출 할 때 급진적인 시각이 아니라 복음적인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쓴 글을 제출했다. 그런데 나의 논문은 해리슨 교수에 의해 ‘narrow minded’(협소한 생각)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가장 진보적인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나는 서구 자유주의 신학의 끝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전통적인 개혁신학으로 되돌아오는 체험을 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유니온 신학교에 가서 진보의 방향으로 바뀌는데 나는 거꾸로 보수로 회귀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대학시절에 내가 사상적 혼돈 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훌륭한 신앙의 선배가 있어서 그분이 이러한 복음주의적 전통에 기초해서 사회정의를 위해서 투쟁하고 독재와 싸우는 모습을 내게 보여주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지난날 그렇게 까지 많은 방황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많은 아쉬움과 회한을 느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89년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광나루에 있는 장로회 신학대학의 신학생들 앞에서 미국에서 깨달은 대로 성령운동과 사회운동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요지의 강연을 했다. 그리고 내가 이런 강연을 하고 나면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학생들 중에서 서로 대립되는 경향을 가졌던 학생들이 하나로 합일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곤 했다.
실제로 보수적인 사람이 사회현실과 부딪치며 진보적으로 변하는 사례는 많다. 그러나 진보적인 사람이 사회운동에 투신하면서 거꾸로 복음주의로 되돌아오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이 때문에 나의 신앙간증은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것 같다. 특히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 예를 들어 성령의 힘을 강조하지 않는 운동권에 대해서도 거부감을 느끼고, 그렇다고 ‘믿습니다’를 외치며 내세주의에 빠지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나의 간증을 들으며 힘을 얻었다.


한번은 경실련 사무총장 시절에 양지에 있는 합동측 신학교에 가서 강연한 적이 있었다. 강연이 끝난 후에 한 신학생이 내게 다가와서 “목사님이 우리에게 신발을 신겨주었습니다. 여태까지는 골방에서 기도만 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신발을 신고 세상에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내 강연이 복음주의 보수신앙을 가진 학생으로 하여금 사회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길 안내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물론 민중신학 계열의 학생이 신앙과 사회참여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 경우도 많이 만났다.
그리고 그 후의 한국교회의 역사는 민중신학에 종언을 고하고 진보와 보수가 하나로 합일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갔다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