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강도 없는 북경이 중국의 수도로 되었을까?

2007-04-16     최민 기자

왜 강도 없는 북경이 중국의 수도로 되었을까?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앞두고 대형 올림픽촌은 물론 현대화 체육시설이 육속 일어서고 있다. 현재 6자회담과 같은 세계 주요나라들의 중요회의도 북경에서 열리곤 한다. 또한 최근에 한인과 조선족들이 육속 북경에 모여들면서 중국 최대의 코리아 촌을 형성해가고 있다. 중국의 수도 북경은 2008년 올림픽을 걸치고 나면 한층 더 지구촌에 세계 인구대국의 수도로서의 가치와 위용을 떨쳐갈 것이다.


그런데 세계 어느 나라를 보나 그 나라 수도는 아름다운 특색은 물론 거의 다가 강을 끼고 있다. 수도 서울은 한강을 끼고 있으면서도 시내를 가로지르는 작은 하천- 천개천 하나를 개조하여도 큰 반응을 얻고있다. 그런데 왜 중국은 강도 천연호수도 없는 북경을 수도로 정했을까?

역사를 거슬려 올라가면 북경지역은 원래 고대 춘추전국시대 연(燕) 나라의 땅이었다. AD 937년에 만리장성 외부에 살던 거란족이 흥기하여 요(遼)나라를 세우며 북경을 수도로 정하였고 연경(燕京)이라 불렀다. (오늘의 북경의 신학원을 연경신학원으로 부르는 이유도 여기서 전래 된 것) 그 후 여진족이 요나라를 무찌르고 금나라를 세우면서 수도 북경을 더욱 확장하고 이름은 '대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때만 하여도 북경은 중국의 분열 된 북방의 한 지역 부족들의 작은 나라의 수도에 불과했다.

그 후 중국의 전역을 정복, 통일한  칭키스칸의 손자 쿠빌라이가  1271년 원나라를 세우면서 중국의  최남단과 티벹까지 이르는 넓은 땅을 원나라에 통일 시켰다. 당시 쿠빌라이는  남경과 같은 강을 끼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중국 남부 도시들을 제치고 북방에 있는 북경을 통일 국가 수도로 정했다. 무엇 때문일까?

그 원인은 아래와 같이 기인된다.
쿠빌라이는 너른 중국 땅을 통치해도 어디까지나 몽고인이었다. 중국의 너른 땅을 정복한 후에도 자손 대대로 살아온 북쪽의 몽고 초원을 동경하고 수시로 조상의 땅을 순시할 수 있는 가까운 위치에 왕궁을 두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요나라와 금나라와 같이 원나라에 대한 군사적 위협은 모두 북방에 있었다. 이러한 대결에서 보면 북경지역은 중국역사에서 중화 문명과 비중화문명의 구분되는 교차점이기도 했다. 오랑캐를 물리치기위한 만리장성이 바로 북경의 북쪽에 있다.
그리고 당시 거대 한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한족의 근거지에서 떨어져야하는 전략적 목적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북경은 수도로서 강이 없고 물자원이 부족 된 것이 문제였다. 그리하여 북경은 여러 역사 세대를 걸치면서 저수지 수축, 수로 건설에 관심을 돌려왔다. 다행으로 북경의 서북쪽에 지하수원이 충족하였다. 원나라는 수로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원나라 때 건설된 수로는 매운 튼튼하여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당시 몽고인이 아닌, 한족들이 소유한 최고의 토목 기술과 상하수도건설, 축성 기술로 당시로서 세계최고 수준의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중국에 붉은 정권을 세운 거인 모택동도 친히 삽을 잡고 물을 가두는 저수지건설 노동에 참여하여 백성을 독려한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북경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의 수도를 걸쳐 1949년에는 중화인민 공화국의 수도로 되었다.


현재 13억의 수도 북경은 전국 600여 개 도시를 거느리는 세계 최대의 수도 , 중국의 당, 정 모든 국가 중추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 중심으로 우뚝 솟고있다. 북경은 중국의 개혁개방과 더불어 새롭게 정치, 경제, 외교, 문화의 중심으로  부상하면서 잠을 털고 일어서며 표효하는 사자마냥 그 위용을 만천하에 떨쳐가는 세계적 도시로 변모하여 가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