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둥지(연재30)

2007-04-15     김석

밤도 깊었는데 잠은 안 오고 그렇다고 특별히 할 일도 없는 까마귀는 애꿎은 담배만 태우다가 책상 위의 <까마귀 바이블>을 펼치니 999 페이지에 아래와 같은 문구가 눈에 띄웁니다.

 

- 못난 인간들이여, 자랑 많은 놈에게 자비를 베프시라.

 

후유~, 세월의 흐름을 사람들은 흐르는 강물에 비유해 유수(流水) 같다고 하지만, 까마귀의 눈에 비낀 지나온 세월은 해마다 피고 지는 사쿠라 꽃을 보는 것 같습니다.

 

쿄토에서 공부를 할 때, 나의 집 뒤에는 유서 깊은 사찰이 하나 있었는데,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진 사찰 경내에는 몇 백년이 될 듯싶은 사쿠라 고목이 여러 대 있었습니다.

 

해마다 추운 겨울이 가고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고목의 가지마다 연분홍색의 사쿠라 꽃이 만발합니다.

 

귀신에게 홀리기라도 한 듯 창가로 다가가면, 꽃의 아름다움은 까마귀의 두 눈을 황소눈보다 더 크게 만들었고, 진한 꽃 향기에 코가 자극을 받아 재채기를 네댓번 합니다. 

 

- 인생은 짧고 청춘은 영원하리.

 

어느 시인이 흥에 겨워 한 말인지 모르지만, 한’ 많은 노총각 까마귀는 사쿠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너무 괴로웠습니다 . 다시 태어나게 되면 사쿠라 나무가 되어 이 '한'을 풀고 싶습니다.

 

사쿠라 나무로 태어나 해마다 사쿠라 꽃을 활짝 피고 마음껏 향기를 풍기면, 어느 멍청한 까마귀 한 마리가 창가에 서서 재채기를 하겠지요.

 

- 엣취, 엣취, 나 죽는다.

 

사쿠라는 해마다 피고 지는 재미가 있지만, 짧은 인간의 일생은 한번 반짝이고 사라지는 개똥벌레와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고 개똥벌레가 부럽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까마귀의 부러움은 500살이 넘은 피부가 터덜터덜 해진 늙은 사쿠라 나무도 해마다 꽃을 만발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자들이야 더 부럽겠지요..^^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