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토리 (21~22)

<서경석 목사의 장편실화>

2007-04-09     서경석 목사

21. 김진홍 목사와 함께 한 시절

75년 석방된 뒤 나는 4월부터 그해 말까지 KSCF 간사가 되어 일했다. 그동안에는 배후에서 학생들을 지도했었는데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봉급을 받으면서 대학생 조직운동을 한 셈이다. 그 당시 KSCF운동은 대학에서 불법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학운동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운동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나는 새문안대학생회라는 막강한 조직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진보적인 기독학생운동을 총괄적으로 지도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12월에 결혼을 한 후에는 KSCF를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고자 했다.

나는 다음 해에 같이 KSCF 활동을 한 백남운과 함께 광나루 장로회신학교에 시험을 쳐서 같이 합격했다. 그러나 한 주일 후에 나는 합격취소통지를 받았다. 형집행정지 중이기 때문에 입학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목사의 길을 가겠다는데 세상의 법에 의해 제약을 당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웠다.  이제부터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김진홍 목사가 나를 보자고 하더니 활빈교회가 남양만으로 이전을 하는데 활빈교회의 총무가 되어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김진홍 목사를 알게 된 것은 여러 해가 되었다. 해군 소위로 임관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새문안교회 후배인 원정연이가 청계천 둑방에서 빈민교회를 하고 있는 김진홍 전도사를 알게 되어 나에게 좋은 분이 있다고 소개했다. 그래서 진해에서 서울에 올라오게 되면 번번이 청계천 둑방으로 찾아가서 김진홍 전도사와 사귐을 가졌고 얼마 되지 않는 소위 봉급이지만 그 봉급을 활빈교회에 다 털어주고 내려오곤 했다.
그리고 김진홍 전도사를 당시 박형규목사, 조승혁목사, 권호경전도사, 김동완전도사, 이해학전도사, 손학규 선배 등이 활동하던 수도권선교회에 김진홍 전도사를 소개해주는 일도 했다. 그런데 권호경 전도사와 김진홍 전도사는 서로 오리엔테이션이 달라서 결국은 김진홍 전도사는 독자의 길을 가고 말았다. 당시 수도권선교회는 알렌스키의 조직방법론에 기초한 주민조직론에 집착했다면 김진홍전도사는 주민조직의 중심에 교회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보면 예장과 기장의 차이이기도 했는데 김진홍 전도사가 수도권선교회에 의해 비판을 받을 때에도 나는 김전도사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분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긴급조치 1호위반으로 김진홍 전도사가 구속될 때에도 김진홍 전도사를 다른 전도사들과 연결되도록 중간역할을 했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김진홍 목사님께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내게 했는데 처음에는 내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 김 목사에 대한 평가가 양쪽으로 상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 편에서는 김목사가 도시빈민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무척 감동적이라고 평가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민중운동적인 차원에서 볼 때 원칙에서 벗어나 있고 오히려 권위주의적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
실제로 제정구씨만 해도 처음에는 김 목사와 함께 일을 하다가 뒤에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빈민운동을 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열심히 도우면 모든 일이 잘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활빈 교회 총무를 맡아 남양만에 내려갔다.
그리고 그 곳에 정착해서 살 생각으로 땅도 3천평 정도를 샀고 최소한 몇 년은 농민운동을 하겠다고 작정했다. 당시 내 처는 임신한 상태에서 대학원에 다니며 직장생활을 하던 때여서 부모님이 계시는 문화촌에 남고 나는 남양만 활빈교회에서 그 곳의 실무자들과 공동체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나는 6개월 만에 그곳을 나오게 되었다. 김 목사의 교회운영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농민운동이 제대로 되려면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문제를 고민하도록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활빈교회의 농촌사업은 농민들이 주체적으로 자기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김진홍 목사가 일종의 활빈왕국의 왕이 되는 방식으로 사업을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김진홍 목사의 ‘비민주성’과 ‘권위주의’에 저항하게 되었고 결국 그곳에서 더 이상 일할 의욕을 잃고 그곳을 떠나게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황인성 등 그 당시 김목사님과 함께 일했던 실무자들도 대부분 두서너 해 만에 다 떠나고 말았다. 그 이유도 내가 느꼈던 문제의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리고 김 목사 자신도 그 후에 굉장히 곤경을 겪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소를 도입했는데, 그 소를 분양하는 과정에서 농민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엄청난 수모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뒤 김 목사는 그런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서 두레마을이라는 훨씬 더 큰 공동체를 발전시켰다.


나는 활빈교회에서 김목사에게 실망하고 헤어진 뒤에 한동안 김목사를 만나지 않고 지내다가 미국유학에서 돌아와 경실련운동을 새로 시작하면서 김목사를 다시 찾아가 그분을 경실련 지도위원으로 모셨다. 그리고 적어도 한 해에 몇 번씩은 만나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 돕는 좋은 관계를 회복했다.
이렇게 좋은 관계를 회복한 이유는 김진홍목사님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내가 젊은 시절에 오로지 농민운동적인 차원에서 좁은 눈으로 김목사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분의 문제점만 크게 보였지만, 내가 나이가 들고 나니 김목사님처럼 오로지 한길을 걸으며 농촌공동체를 만들고 그 꿈을 이뤄가는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분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진홍목사님과 일을 함께 할 기회는 만들어지지 않다가 3년전 나라살리기를 위해 <기독교사회책임>을 조직하는 일을 하면서 다시 김진홍목사님과 의기투합을 하게 되었다.


22. YH사건과 고막 터진 고은 선생  

남양만 활빈교회를 그만 두고 집에서 잠시 쉬고 있던 77년 초엽에 NCC 김관석 총무님께서 내가 NCC 청년담당 간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을 하셨다. NCC 에큐메니칼 운동에 청년운동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시 EYC(한국기독청년협의회) 간사가 되어 기독청년운동을 조직하고 활성화하는 일을 위해 2년간 일하게 되었다. 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청년회 전국연합회장이 된 친구 송진섭(전 안산시장), 그리기 기장의 황주석, 성해용과 함께 보수적인 각 교단 청년연합회를 진보적인 운동으로 전환시키는 운동을 했고 청년연합회의 연합체인 EYC를 강력한 민주화운동 기구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고대 출신의 조성우가 회장으로 있던 민주청년협의회(약칭 민청협)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민주화투쟁을 위한 청년운동 전체를 이끄는 역할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NCC 청년간사로 있으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특별히 나를 감동시킨 분은 김관석 총무님이었다. 그분은 NCC안에 있는 보수적인 목사님들을 잘 감싸고 설득하면서 NCC내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데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다. 당시 기독교사회운동의 야전군사령관은 박형규 목사님이었지만 기독교운동 전체의  지도자는 말할 것도 없이 김관석 목사님이었다. 나는 김 목사님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교회연합운동을 하는 자세와 방법을 배웠다. 당시의 NCC가 우리민족의 희망이었는데 기독교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도 김관석목사님의 리더십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목사님의 시대가 지나가면서 NCC도 영향력을 잃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79년 봄 어느 날, 나는 이창복 선생(前 국회의원)으로부터 자신의 뒤를 이어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약칭:사선)총무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이때의 내 나이가 만30세였고, 사회선교협의회의 실행위원들이 다 나보다 최소한 5-6년은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망설여졌으나 결국은 이를 수락하고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선은 기독교와 가톨릭의 사회선교단체의 협의체로, KSCF와 같은 학원선교단체, 산업선교 단체, 가톨릭농민회 같은 농민단체 등이 다 여기에 소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선 총무의 자리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는데 돌이켜보면 너무 어린 나이에 총무직을 맡은 것은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나의 나이가 어려서 운동 전체를 이끌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사선 총무로 부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다룬 사건이 YH사건이었다. 당시 YH노조위원장이 최순영씨(현 민노당 국회의원)였는데, 그의 남편이 나의 가까운 후배인 황주석(최근 작고)이었다. 황주석은 한신대를 다니다가 도중에 자퇴를 하고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최순영씨와 사귀게 되었다. YH사건이 터졌을 당시에는 두 사람이 비밀결혼을 했고 최순영씨는 임신을 하고 있었다.
YH사건은 60년대 호황을 누리던 국내 최대의 가발 수출업체인 YH무역이 70년대 들어 경기가 나빠지면서 경영난이 몰아닥치자 폐업을 선고하고 미국으로 가려다가 이를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농성사태로 번진 사건이다.

YH노조는 산업선교회에 호소를 하면 될 일도 안 된다고 생각해 독자적으로 폐업 반대운동을 했는데, 여의치 않자 농성을 시작하면서 산업선교에 도움을 청했다. 그래서 사선이 이 사건에 개입해 많은 성직자들의 격려방문을 조직하고 대외홍보를 하는 등으로 YH노조 운동을 적극 도왔다.
당시 나는 YH노조을 지원하기 위한 비밀지원팀을 조직했다. 그 멤버는 나, 신대균(사업가), 이원희(전 새벗교회 목사), 이상희(전 울산경실련대표), 황주석(작교) 등 5명이었다.
한번은 이 팀들이 밤늦게 우리 집에 모여 YH 노조운동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열심히 토론하였다. 정부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추리해 보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토론 끝에 경찰은 절단기로 농성장의 철문을 뜯어내고 농성장에 난입해서 주모자급 노동자들을 잡아 구속시키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강제로 퇴직금을 주어서 지방으로 내려 보낼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나서 경찰이 언제 농성장에 진입을 할 것인가를 추정해 보니 이제 곧 몇 시간 내로  진입할 것 같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나는 YH여공들을 농성장에서 경찰 모르게 빠져 나오게 해서 신민당사로 들어가게 하자고 제안했다. 그래야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했다. 그 당시는 제 아무리 노동자들이 농성을 해도 신문에 기사 한줄 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기 위해서는 신민당사에 난입하여 이 사건을 정치 문제화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들 내 의견에 동의해 우리는 노동자들을 안전하게 신민당사에 진입시키기 위해 노조원 2백명 가운데 60명은 농성장에 잔류하고 나머지는 3~4명씩 몰래 빠져나와 아침 9시에 신민당에 도착하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음날 아침 새벽, 통행금지가 해제된 직후 YH노조 농성장에 도착해보니 우리의 예상대로 그날 새벽에 경찰들이 난입해 철문을 절단기로 부수려다가 노동자들에게 발각되어 도망을 갔고, 그로 인해 노동자들은 언제 또 다시 들이닥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황주석이 최순영과 노조지도자들을 만나 우리의 계획을 설명하자 노조지도부도 이를 적극 찬성했고, 일부 노동자들만 남긴 채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현장을 빠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제 9시만 되면 신민당사로 뛰어 들어갈 예정이었다.

노동자들이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이원희, 이상희, 신대균에게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을 찾아가도록 했다. 그래서 함세웅신부, 이재정신부, 고은시인, 문동환박사, 이문영교수, 한완상교수에게 알렸는데 다른 분들은 사정이 있어 오지 못하고 문동환박사, 이문영교수, 고은시인 세분만이 아침 7시에 만나기로 한 기장 선교교육원으로 오셨다.
나는 그분 들에게 YH노조의 상황을 설명하고 노동자들이 무사히 신민당사에 들어갈 수 있도록 신민당측과 협의를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랬더니 그분들이 잠시 상의를 하신 뒤 상도동으로 가서 김영삼 총재에게 직접 부탁하여 YH노동자들이 당사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셨다.
나는 아침 9시에 신민당사로 갔다. 그랬더니 9시가 되자 사방에서 노동자들이 뛰어 나와 ‘와’하고 당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신이 난 우리는 이틀 동안 교계인사들의 격려방문과 물품 지원활동을 조직화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다시 지원팀원들이 우리 집에 모였는데, 경찰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나를 연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우리가 한 일이 그다지 법에 걸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다른 사람들을 뒷담을 넘어 도망치게 한 뒤 문동환, 고은, 이문영 세분에게 전화를 드렸더니 그 쪽도 경찰이 들이닥쳐 실갱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전화로 그분들께 “제가 전화로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오시라고”라고 말했다. 그분들이 연락하러 간 이원희, 이상희, 신대균 등 후배들의 이름을 불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당시 한국교회 사회선교협의회 총무였기 때문에 어차피 신분이 노출되어 있고 구속사태가 벌어지면 제일 먼저 구속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른 후배들은 어른들과 말만 잘 맞추면 얼마든지 보호해 줄 수 있었다.  
문동환, 이문영 두 분은 내말을 금방 알아차리셨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고은시인과는 전화통화를 못해 말을 맞추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세분 어른과 나는 각각 경찰서로 연행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전후사정을 모르는 고은시인은 자기를 찾아온 이상희를 보호하려고 계속 딴 말을 한 탓에 너무 많이 맞아서 결국엔 고막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고은시인은 그 뒤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고막 터진 귀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셔서 나는 두고두고 죄송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문영교수와 문동환박사도 우리들의 부탁을 받고 김 총재에게 부탁의 말을 하러 찾아간 것 뿐이었는데도 이일로 구속이 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으니 나의 마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인명진 목사는 내가 격려방문을 부탁해서 농성장에 딱 한번 간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되었으니 너무도 죄송한 일이었다.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중에 나는 YH노동자인 ‘김경숙’양의 죽음 사실을 듣게 되었다. 한 기자가 김경숙양 사망기사가 난 신문을 내게 보여주었다. 이 모든 것이 다 내 책임으로 생각하여 나는 죄스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분노와 통한으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결국 YH사건은 김영삼 총재의 제명과 부마사태, 10·26으로 이어졌고, 그해 12월12일 역사상 전례가 없는 10만원의 보석금을 내고 가석방되었다. 그리고 격려방문에 나섰던 인명진목사, 문동환박사, 이문영교수, 고은시인, 그리고 나는 YH인사로 여론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YH사건을 회상할 때마다 피가 끓는 분노를 지금도 느낀다. 꽃다운 젊은 여성노동자를 죽게 만든 이 사건은 박정권 말기의 폭압적인 상황이 빚어낸 사건이었다. 그리고 당시 나는 YH사건을 조직하는 일을 통해 역사현상의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셈이다.
나는 YH사건을 경험하면서 소중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열심히 치밀하게 생각을 하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고 최선의 방안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날 밤 지원팀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을 거듭해 이끌어냈던 신민당사 농성이 결국 여론의 폭발적 보도를 가져왔고 부마사태와 10·26을 거쳐 서울의 봄을 우리에게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매사를 깊게 생각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실제로 YH노동자들은 그 뒤 주동자들은 모두 구속되었고 나머지 노동자들은 퇴직금을 받고 강제로 고향으로 보내졌다. 모든 일이 우리가 예측한 대로 되고 말았다.

그런데 YH사건과 관련한 후일담이 있다. 내가 미국에 유학가서 뉴욕에서 YH사장이었던 장용호씨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 당시 우리는 YH사장은 노동자들을 내팽개치고 미국으로 도망친 악덕기업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뉴욕에서 만난 장용호씨는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 분은 당시 자신은 웬만큼 돈을 벌었으니 미국에 이민 가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먼저 이민을 온 뒤 그 회사를 친척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친척이 회사운영을 잘못하여 그런 문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자신은 악독한 기업주로 매도당하여 참 억울하다는 말을 했다.

실제로 그분은 뉴욕 한인사회에서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돕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도 선뜻 몇천 불을 주시며 도움을 주셨다. 그분을 만나고 나서 나는 느낀 점이 많았다. 우리가 특수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을 악마처럼 묘사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억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억울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이 내가 그분과 만나면서 깨달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