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토리(첫번째 글 8~10)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이 깊어질수록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이 땅의 억눌리고 빼앗긴 자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하곤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부모님과 마찰까지 빚어가면서까지 나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세일이가 내게 충격적인 말을 했다. ‘경석아, 너는 위선자다. 말로는 사랑, 사랑하면서 실제로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 세일이가 내게 던진 폭탄과도 같은 말이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비수와도 같은 말을 듣고서는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만약에 나를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친구가 내게 이런 비판을 했다면 별 웃기는 놈도 다 있군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세일이는 중학교 때부터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한 친구이고 내 부모나 내 형제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있는 친구였다. 게다가 나는 당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세일이를 힘껏 도와 왔던 처지였다. 말하자면 그런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세일이가 ‘위선자’라는 극단적인 단어까지 동원하면서 나를 비판한 것이다.
세일이의 뼈아픈 문제제기가 있은 뒤 며칠 동안 나는 나의 어떤 모습이 세일이에게 위선자처럼 비춰졌을까하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점점 내게 실제로 위선적인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겐 일종의 선민의식이 있었다. 선민의식이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를 믿게 선택되었다는 자의식’인데,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탓에 나도 모르게 이런 선민의식이 내게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술과 담배를 입에도 대지 않았었다. 나의 학창시절에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거의 모든 신입생들이 술 마시는 법을 배웠다. 신입생들은 선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무조건 사발로 막걸리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나는 술을 먹지 않겠다는 내 결심을 지키기 위해 신입생 환영회 자리까지 도망쳐 나왔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내 마음 깊은 곳에 ‘술 먹고 담배 피고 당구치고 연애나 하는’ 친구들을 깔보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다. 말로는 친구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친구들을 경멸하고 나만 깨끗하고 도덕적이라는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다.
나는 나의 이러한 위선적인 태도가 어릴 때부터 몸에 밴 기독교 문화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또한 사회주의자의 민중에 대한 사랑과 비교해 보면 기독교인의 사랑은 너무도 보잘 것이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시 1967년은 박정희정권의 독재체제가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당시의 한국교회는 독재와 싸우는 민주화운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회주의 혁명가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고민 속에 있었던 내게는 이런 교회의 모습이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것으로 보여졌다. 그런데 나도 이런 기독교인들처럼 위선적으로 보인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다음부터 나는 가식적인 기독교 문화에 대해 온몸으로 저항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어느 날 비장한 결심을 하고 가게에서 박하 담배 한갑과 성냥을 샀다. 그리고 세종문화회관 앞 잔디밭에 누워 그 자리에서 무려 담배 17 개비를 한꺼번에 피워댔다.
담배 17대를 연속으로 피우고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잔디밭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제부터는 나도 남과 똑같은 죄인이고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選民)이 아님을 기뻐했다.
그런데 그때 시작한 담배를 미국에서 목사안수를 받는 날 아침까지도 끊지 못했다. 죄송한 말이지만 신학생시절에도 전도사시절에도 담배를 끊지 못했다. 그리고 목사안수를 받는 날 아침에 마지막 담배를 피우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목사안수가 쎄긴 쎈 모양이다.
담배피는 일에 나처럼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 꼭 맞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담배가 갖는 의미가 매우 컸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위선적인 기독교문화, 왜곡된 선민의식과 단절하기 위해서는 당시 나는 이러한 댓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 같다.
그 뒤로 나는 교회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당시 내가 나가던 새문안교회 대학부의 지도목사님은 홍성현 목사님이었고 나는 그때 대학생회 총무였는데 목사님을 찾아가 총무직을 반납했다.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교회를 다닐 수 있겠습니까’ 새문안교회 창립자의 증손자인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대해 교회 어른들은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깊이 빠져 있어서 어떤 권고도 나의 신념을 흔들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독서실에 파묻혀 독서에 몰두했다. 당시 사회주의 책은 모두 禁書여서 책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일어로 번역된 사회주의 원전을 우리말로 다시 번역해 손으로 베껴 쓴 필사본이 학생들 사이에 나돌았는데, 나도 그것을 구해서 열심히 읽었다. 자본론, 고리끼의 어머니, 정치론, 맑스주의 경제학, 모택동의 모순론, 신식민지론 등을 모두 필사본으로 읽었다.
일어로 사회주의 서적을 읽기 위해 일어공부도 하고, 필사본을 보관해두고 읽기 위해 노트에 베끼기도 했다. 복사기가 없는 시절이니 그 내용을 두고두고 읽으려면 다시 노트에 베껴야 했다. 그리고 1년 후에는 나는 완전한 사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 나는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소총수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혁명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는 이름없는 혁명 전사’를 당시 내가 꿈꾸었다면 지금 이 말을 믿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말은 사실이었다. 그처럼 나를 상대로 한 비밀과외의 학습효과는 성공적이었고 그 결과 나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사회주의자로서의 나의 꿈이 형편없이 무너지는 경험을 하였고 나의 신념과 의지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를 실감하게 되었다.
9. 대학 2학년 때 겪은 ‘통일혁명당 사건’
휴학하는 몇 개월 동안 사회주의 신념으로 무장을 한 나는 늦봄부터 실제로 조직화 사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나를 사실상 사회주의자로 의식화시켰던 박성준 선배가 ‘경석이 너는 민중의 삶을 너무 모르니 가난한 사람들을 직접 교육하고 함께 지내는 경험을 갖는 게 좋겠다’고 충고를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먼저 나는 우리 동네 근처의 거렁뱅이들을 사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당시 문화촌에 살았는데,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빈민가가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사는 내 또래들을 사귀어서 조직화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나는 그 동네를 어슬렁거리며 내 또래 거렁뱅이들에게 말을 걸어 보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나는 빈민촌에 사는 몇명의 내 또래들을 친한 사이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일단 친해진 뒤 나는 그 애들에게 아침운동을 함께 하자고 제안해 매일 아침 40분간 문화촌에서 세검정까지 달리기를 했다.
지금은 그 길이 모두 아스팔트길로 변했지만, 그때만 해도 그 길엔 자두밭이 많았다. 나는 빨간 자두가 탐스럽게 익어가는 길을 그들과 함께 뛰면서 내가 게릴라전의 전사를 기르고 있다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나도 그들과 함께 게릴라전의 소총수가 될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어느 날 박성준선배가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고, 나도 이 사건에 연루되면서 상황이 급전직하로 바뀌게 되었다.
내가 문화촌 빈민가 젊은이들과 사귀는 일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던 어느 날, 박성준씨의 부인인 한명숙씨가 급하게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왔다. 만나 보니 박성준선배와 한명숙씨가 매우 당황스런 모습으로 큰 가방을 들고 나와 있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연락 없이 나오지 않아서 지금 짐을 싸서 도망가는 중이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꼼짝 않고 숨어 있을 테니까 절대로 잡히지 않을 거다. 잡혀도 절대로 너희들이 비밀과외를 받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을 테니까 염려마라”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박성준 씨가 내게 한 말이었다.
사회주의 혁명가가 내 인생의 목표였지만 막상 간첩사건에 연루된다고 생각하니 보통 당황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박성준 선배에 대한 믿음이 워낙에 강했던 탓에 내가 그 사건에 연루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신문 1면 톱기사로 통일혁명당사건이 보도되었고, 거무튀튀한 흉칙한 얼굴들이 간첩, 수괴, 조직책 등의 무시무시한 단어들과 함께 신문을 메웠는데 그 속에 박성준선배의 사진도 신영복선생의 바로 밑 조직책으로 나와 있었다.
그 당시 박성준선배가 절대로 잡힐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신문보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두려움과 초조함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던 어느 날, 험악하게 생긴 건장한 남자들의 팔에 붙잡혀 나도 남산의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그 전에 박성준 선배와 함께 잡혀갔다가 먼저 석방이 된 한명숙씨가 우리에게 조사받을 준비를 하라고 일러 주었기 때문에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정보부원에게 붙들려 가는 경험은 대학2학년 학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리고 정보부 건물로 들어가면서 나는 친구들과 말을 맞춘 것 이상의 내용이 불거져 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정보부에 들어가 보니 이미 박성준 선배가 사실을 전부 불어버린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조사관이 묻는 말에 몇 번 오리발을 내었다가 조사관에게 신발로 몇 대 얻어맞고 나서는 주눅이 들어 그들이 묻는 대로 다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대학생이 불순한 선배의 꾐에 잘못 빠져서 나쁜 공부를 한 것처럼’ 참회하는 표정까지 짓곤 했다.
조사 중간에 나는 잠시 매트리스 위에 누워 또 다른 매트리스를 덮고 있을 수 있었다. 이렇게 잠깐이나마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순간이 왔을 때 나는 ‘제발 미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앞으로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자로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그 현실을 감당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와 친구들은 며칠 뒤에 별 탈 없이 풀려나왔다. 조사를 받고 나오자 여러 친구들이 찾아와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지만, 나는 조사 받을 당시의 비굴했던 내 자신이 창피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수사관들 앞에서 왜 좀 더 의연하지 못했을까.’
어떤 위로도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이 무너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그때 알았다. 그런데 그때 나를 위로해준 것은 다름 아닌 성경 말씀이었다.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데,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받게 되었다’는 로마서의 구절이 그것이다. 나는 그 전에는 이 구절이 인간을 나약하게 만든다고 생각해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수치스러운 경험을 하고 나자 이 구절이 얼마나 해방의 메시지인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말씀이 절망의 구렁텅이 빠진 나를 구출하기 위해 저 위에서 내려온 생명의 줄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밧줄에 의지해서 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빚진 자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이 빚을 갚을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2년 뒤에 나는 새문안교회에서 전태일의 추모데모를 주동하면서 이 빚을 갚았다.
10.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리라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은 후 나는 거의 1년간 무슨 일에 전념하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크게 방황했다. 과연 내가 사회주의자로 살아갈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고 그동안의 쌓아 온 신념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 그 당시 내게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조영래 선배(변호사, 사망)와 김근태 선배(열린우리당 국회의원)였다.
이 두 선배는 박성준 선배의 구속으로 ‘끈 떨어진 연’처럼 방황하던 나를 따뜻하게 챙겨 주었다. 조영래 선배는 박세일의 동숭학회 1년 선배였는데, 둘 다 독실한 불교 신자여서 서로 가깝게 지냈다. 나는 세일이의 소개로 조영래 선배를 알게 된 뒤 정기적으로 만나면서 운동가로서의 자세와 사회과학 공부에 관한 지도를 받았다.
또 김근태 선배는 경제복지회의 1년 선배였다. 김근태 선배도 육 개월 동안 2-3 주에 한 번 씩 나를 만나서 사회과학 공부도 지도해주고 내가 학생운동가로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이들 선배들이 바쁜 와중에도 나를 후배로 챙겼던 이유는 아마도 서울공대에 학생운동가가 나밖에 없었고 운동권 선배 없이 혼자 고민하는 내 모습이 두 선배들의 눈에 안스럽게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배들의 보살핌 덕에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은 후에도 나의 삶의 목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놓고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2학년 때 휴학계를 내면서 사실상 기계과 공부를 포기하고 고대 철학과에 전과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휴학이 끝나갈 무렵에는 그냥 기계과를 졸업하지만 공부는 적당히 해서 졸업장만 따고 나의 에너지는 사회과학 공부와 사회적 실천에 쏟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엔지니어의 길과 사회혁명의 길 사이에서 번민했다. 엔지니어의 삶은 당시에는 부와 안정이 보장되는 선망의 삶이었고 사회혁명가로 사는 것은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결국 대학교 3학년 여름 방학에 이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 사회과학 공부를 하기 위해 여전히 배낭에 책을 수십 권 집어넣고 절에 가서 책을 읽으며 지냈는데 어느 날 깊은 밤에 촛불을 켜놓고 골똘하게 고민을 하다가 큰 결심을 했다. 내 앞에 놓여진 선택의 길은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나라의 생산력 발전을 위해서 엔지니어나 과학자가 되어 기술혁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생산관계의 변화를 위해 자본주의 사회를 사회주의로 바꾸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산관계의 변화를 통해 생산력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맞지 않는 말들이지만 그때는 모든 사물을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날 밤 나는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우리나라 학생운동의 역사에서 공대생이 학생운동을 하는 것은 특별히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대학생이었던 60년대 말에는 공대생 중에서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순진한 공대생이 사회혁명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일은 망망대해에 돛단배를 띄우는 일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거의 순교자적 심정이 되어 이 결단을 내려야 했다.
요즈음 그때를 돌이켜 보면 그때 내가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 엔지니어의 삶을 사는 것을 선택했어도 충분히 좋았는데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엔지니어냐 사회혁명가냐 라는 선택을 마치 선망의 삶이냐, 고난의 삶이냐로 구분하고 내가 내 스스로에게 순교자적인 결단을 요구하고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어찌 되었건 3학년 여름에 나는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완전히 포기했다. 그리고 나는 서울공대와 새문안교회에서 본격적으로 후배들에 대한 의식화교육과 학생운동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