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장원급제하였다..."
<장편기행문> 남경, 매화꽃이 손짓하다
남경 시내로 들어서면서 나는 붉은 색이 눈에 띄워오자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 거리는 특별히 잘 정돈 되어 있지 않았지만, 그만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냇가에 두 줄로 붉은 초롱을 무지 많이 걸어 놓은 풍경이 눈에 띄워왔다. 내는 그리 넓지 않았고, 흐름도 잘 알리지 않았다.
냇가 건너편은 돌로 쌓은 성벽이다. 만리장성처럼 두텁고도 견고하게 쌓은 것 같다. 유명한 남경 석성(石城)이라 한다.
마승술 가이드의 목소리가 금방 울렸다.
“보시다시피 저것이 남경 석성입니다. 남경성의 규모는 33 .67km, 높이 14~21m나 되었으며 13개의 성문이 있는데,1366~1386년 약 20년 동안 건설된 거대한 성벽이지요. 남경성벽은 특히 중화문이 유명한데 벽돌에는 만든 지역과 사람, 관리자의 이름까지 쓰게 하여 벽돌에 이상이 있을 때에는 만든 사람과 관리자를 함께 처벌했다고 하니 튼튼하게 만들 수밖에 없죠…이 곳에 명나라를 세운 태조 주원장이 ‘성을 높이 쌓고 곡식을 많이 저장하라’는 책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쌓은 것입니다. 허허, 무지 높지요? 13개 문 만 닫으면 적들이 도저히 쳐들어 올 수가 없지요 .”
석성아래 흐르는 내는 진회하( 秦淮河)이다. 진회하는 다시 외진회하와 내진회하로 나뉘는데 외진회하는 성벽 밖을 에워싸고 흐르고 내진회하는 성내로 흐른다. 진회하 내외(內外)부근지역은 옛날 아주 번화하였다고 한다.
마 가이드의 흥분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
“보다시피 여긴 부자묘가 있거든요. 부자묘(夫子廟)는 주원장이 정권을 잡은 후 여기에다 공자(孔子)의 제를 지내는 사당(祠堂)을 짓고 제를 지냈으며, 해년마다 수재를 뽑는 과거시험을 치는 고시장(考試場)을 만들었거든요. 전국 각 지역에서 과거시험 보러 다 올라왔으니 이곳이 얼마나 번화했겠습니까? 허허, 선비들이 올라오면 몇 달, 지어 한 반년씩 묶는 이들이 숱했을 거구, 그러니 식당, 여관, 시장 등 별라별 것이 다 생겨나구, 그러니 기생집도 늘었구…여기 외진회하부근은 상업구역이 됐지요. 그리구 내진회하 연안에는 서생들이 글 읽고, 짓고, 배타고 물놀이 하고, 허허, 정말 강남의 어미지향(魚米之鄕)이 되기에 손색없는 고장이죠.”
승용차는 금방 부자묘지역으로 들어섰다.
부자(夫子)는 공부자의 간칭이다. 묘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옛날 그대로의 번화가가 조성되어 있는데, 건물들이 3~5층 쯤, 그리 높지 않았다. 고건축(古建築)의 음식점과 상점이 즐비한 번화가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특히 파란 벽돌기와, 낮은 울타리, 회랑(廻廊) 밑 꽃모양의 창 등 명·청대의 풍격 있는 건물이 진회하(秦淮河)에 그림자를 비추어 운치 있는 거리로 되기에 손색없었다.
기실 남경은 동오(東吳)의 손권이 이곳에 나라기반을 세워서부터 유명해 진 고장이다. 중국의 6대 고도 (古都) 중의 하나인데, 몇 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물은 산을 에워싸고 흐르고 종루(鐘樓)는 태고연하고... 예로부터 남경성은 "종루에 용이 꿈틀거리고 석성(石城)에 범이 웅크리고 있다"고 표현해 왔었다. 월나라를 정벌한 초패왕이 종산(種山)에다 금을 묻어 '왕의 기운'을 눌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하기에 종산을 금릉산(金陵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손권이 이 고장에 있을 때 제갈량이 와서 조조를 대처할 계책을 함께 도모하였는데, 이곳의 지형을 보고 " 말 먹이는 모양의 능(陵)이라 종산에는 용이 움츠리고 있고 석성에는 범이 웅크리고 있으니 진정한 제왕의 도읍지이다."고 감탄하며 손권에게 이곳에 도읍을 정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
그리하여 손권은 오늘의 남경에다 대업의 기반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석두산에 석두성을 건축하고 장강 서쪽을 감시하며 남쪽 진회하입구를 공제해 건업의 병풍으로 삼아왔었다 .
서진(西晉)초기 진나라 군대는 석두성을 공략하여 세 나라를 하나로 합하였다. 그런데 서진이 멸망되던 전해 사마용은 남방에서 황제로 자처하고 이곳에 동진(東 晋)을 건립하고 후에 건강(建康)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공원 317년부터 기원 589년, 이곳은 줄곧 동진과 남조, 송, 제, 량, 진(陳) 등 다섯 나라의 수도였다. 동오까지 합하면 6개 조대(朝代)인데 역사에서는 6조고도(六朝古都)라고 한다. 당시 중국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지였는데 322여 년의 황금기를 누렸었다. 량(梁)조에 이르러 건강성의 인구는 이미 100만 넘어서 중국의 제1 도시가 되었다 ….
“도착했습니다.”
조명권사장이 먼저 소리쳤다.
승용차는 흰 벽 고건물(古建物) 앞에 멎어섰다. 시정부 측에서 손님들에게 잡아놓은 호텔 ‘장원루(壯元樓)였다. 오성급 호텔이라고 한다 .
장원루라? 그러니 옛날, 장원급제한 수재들을 모시는 호텔이란 말이 된다. 십오륙 층 쯤 될까. 흰 벽에 고풍스런 기와이며 벽모서리 각을 세우고 높이 솟은 변죽들…강철판조각에 빨간 칠을 해서 크게 새긴 장원루(壯元樓)란 세 글자가 눈에 깊숙이 빨려 들어왔다.
아, 장원루! 나도 이제 ‘장원급제’한 것이다! 그 만큼 기분이 좋았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