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의 헌책장수
<신길우의 수필 21>
중국 연길(延吉)에는 길거리 시장이 있다. 이들은 요일(曜日)이나 시간에 따라 보도(步道)에 난전으로 열린다. 그러므로 그 시간에 그곳에 가면 구경할 수가 있다. 다른 시간대에는 그냥 평범한 보도일 뿐이다.
나는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연길에서 사는 동안 이 길거리 시장을 자주 찾았다. 여러 가지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길거리 책전(冊廛)들은 매우 매력적이었다. 손수레 위나 길바닥에 종이상자를 뜯어 펴고서 이리저리 늘어놓은 헌책들을 구경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쏠쏠한 맛이 있었다.
헌책들은 그 이름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난다. 중국어로 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한문으로 된 것도 있고 한글로 된 책도 있다. 등표지만 보이도록 빼곡하게 몇 줄로 배열한 책들은 한참을 걸려야 다 훑어볼 수가 있다. 반은 이쪽으로 나머지 반은 저쪽으로 배열해 놓아서 언제나 한 바퀴를 돌곤 한다. 가끔 책을 집어 먼지를 털고 목차를 살피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우리 나라의 고서적상(古書籍商)에서와는 또 다른 맛을 느낀다.
책의 크기나 모양도 다양하다. 프린터 B4 용지만한 크기의 것이 있는가 하면, 국판이나 문고판에 수첩 크기도 있다. 드물게는 가로 세로가 5×10㎝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책을 보게도 된다. 표지 모양도 남다르다. 제목도 붓글씨체로 큼지막하게 단 것도 있고, 아주 작은 글자로 인쇄된 것도 있다. 옛 납활자로 찍은 것이 있는가 하면, 최신의 컴퓨터 글자체에, 드물게는 떨어지고 바랬지만 금박으로 된 것도 있다. 색도(色度)로 인쇄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이 흑백이다. 가끔은 수염이 기다란 신선(神仙)이나 아리따운 몸매의 여인도(女人圖)를 넣거나 사진을 곁들인 책도 있다. 물이 들거나 젖어서 종이가 부풀고 빳빳해진 것까지도 진열하고 있다.
월간이나 계간 같은 것은 두세 달 전의 것도 나오지만, 몇 년 전이나 10~30여년 전에 출판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어떤 것은 해방 이전의 것도 있어 고서다운 맛을 느끼게 한다. 간혹 저자가 서명해서 기증한 책도 발견되는데, 이럴 때면 남의 일 같지가 않아서 기분이 씁쓸해지기도 한다.
그런 속에서, 어쩌다 구하고 싶은 책이나 희귀본을 만나게 되면 다른 책도 몇 권을 얹어서 사기도 한다. 어떤 책은 사고 싶었지만 너무 많이 달래서 미루었다가 영영 다시 보지 못하게 된 것도 있다. 그럴 때면 그 책이 나와 인연이 없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아쉬움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곤 하였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헌책 장수의 태도이다. 책전(冊廛) 주인은 무얼 찾느냐고 묻지도 않는다. 얼마 동안을 이것저것 살펴보아도 아무 상관을 하지 않는다. 소설 같은 것은 도서실에서처럼 한참을 읽기만 해도 내버려둔다. 한참을 뒤적이다가 한 권도 사지 않고 돌아서도 아무 말을 않는다. 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얼굴을 붉히는 기색도 전혀 없다. 속으로는 불쾌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그런 내색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구경하다가 사 주면 고맙고, 안 사 주어도 괜찮다는 표정이다. 마음대로 보도록 아예 멀직이 떨어져서 있다가 사겠다고 할 때에야 와서 값을 말한다.
그들은 받는 책값도 일정하지가 않다. 예상보다 비싸거나 몇 배의 값을 달라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반값이나 2~3할 정도만 받기도 한다. 헌책이고 간행 시기가 제각각이니 표시된 책값대로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은 그날의 상황과 기분에 따라 책값을 받는 것 같다. 몇 할 값으로 정해놓고 파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생각한 나름대로의 값에 맞으면 파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책을 많이 팔고 더 벌려는 기색도 없다. 팔리면 팔고 안 팔리면 도로 가져가면 그만이라는 생각인 것 같다. 그러므로 팔리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지도 않는다. 심심해서 책을 내놓을 뿐이고, 그 일이 좋아서 그러고 있는 것 같다. 한 마디로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한 장사가 아니라, 스스로의 자기만족을 위해 책을 벌여놓고 있는 것만 같다.
책은 어떻게 구해오느냐니까 “버려지는 책들은 매일 있지요” 한다. 한참을 보아도 별로 팔리지 않는 것 같다니까 “담뱃값이면 됐지요” 하고 대답한다. 책의 내용이 어려워 살 사람이 없을 것 같다니까 “그래도 읽을 사람은 있지요” 한다. 초등학교 1학년 학습서로부터 경서에 이르기까지 소용되지 않는 책은 없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뿐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그러한 태도와 방식 때문에 나는 그들의 길거리 헌책 난전에 자주 가곤 하였다.
헌책방은 어느 도시에나 있다. 서울 같이 아주 큰 도시에도 있고, 몇 만명 정도의 작은 도시에도 대개는 있다. 비록 낡고 헐고 때묻은 것일망정 이런 헌책들을 파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비싼 새책을 살 수가 없어서도 그렇지만, 새책만 다루는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옛 책들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헌책방은 나름대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연길의 길거리 헌책전은 그런 것 말고도 또 다른 의미를 느끼게 한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무언(無言)의 말을 웅변(雄辯)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책이 있으니 책을 내놓는다. 누구나 보고 읽어라. 책들을 구경하고 책장을 넘겨보는 모습만으로도 그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그러다가 필요하면 사고, 필요가 없으면 그냥 가라. 값은 잘 주면 좋고, 좀 적게 내어도 괜찮다. 낡은 책이 쓰레기가 안 되게 하는 것만도 고맙고, 버려질 책이 필요한 사람에게 쓰이는 것을 감사할 뿐이다. 책 속의 진리란 책이 헐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낡아서 버려질 책이라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이다. 이런 일이나마 맡아서 하는 삶이 그저 즐겁고 기쁠 뿐이다.
연길의 길거리 헌책전 주인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그 길거리 책전이 떠오를 때면, 그때 한 헌책장수가 들려준 말이 생각나곤 한다.
“그래도, 선생 같이 책을 알아보고 사가는 사람이 있어 세상은 기대할 만하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