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이야기 (1)
2003-12-08 운영자
다른 사람에게는 직접 읽어 느껴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빈민층을 묘사했거나 시회비평적인 것이 아니라 주인공 개인의 굶주림 자체를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맨 끝에 가서 주인공이 선원으로 취직될 때까지 이렇다하게 스토리 전개도 없는 이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도 몹시 배고파지는 특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주인공이 정육점에 가서 개를 주려한다고 말하고 뼈다귀를 얻은 다음 그 뼈다귀에 약간 붙어있는 살점을 날로 뜯어먹는 장면에 이르러 나는 환장하는 줄 알았다. 곧 쓸데없는 오기를 내던지고 문전박대 할 것 같지 않은 동포에게 전화를 걸어 밥을 얻어먹으러 가고 말았다.
우리나라 작품 중에 극한적인 배고픔이 묘사된 것으로 강경애, 천승세의 소설들이 얼른 기억나지만 가난했던 시절 우리 문학이나 영화는 자연히 배고픈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우리가 절대빈곤을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 최근이니 ‘밥’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우리에게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말 표현에 ‘먹다’와 ‘밥’이 그리도 많은 것 아닐까?
잊어먹고, 까먹고, 마음먹고, 겁먹고, 써먹고, 부려먹고, 미역국 먹고, 꿀밤 한대 먹고, 축구하다 한 골 먹고, 별난 놈은 여자를 잘도 따먹고, 귀신 씨나락 까먹고... 한 방 먹어라 하고 때리면, 맞는 놈은 떡이 되고, 비지땀을 흘리며 일하고는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다. 오죽 배가 고프면 실밥, 톱밥, 대팻밥이 모두 밥으로 보이겠는가?
요즈음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은 굶는 것을 예사로 아는데 그것은 일상에 굶는 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생활이 가난하면 굶는 것이 배고픔이라는 육체적 고통보다 설움이라는 마음의 고통을 더 크게 주는 법이다. 그래서 나의 세대가 학생 때는 학교를 지각하는 한이 있어도 어른들이 꼭 밥을 먹여 보내려 했었다. 지금 북한 어린이들이 굶어죽는다는 소식은 모두 낭설이라고 언성을 높이는 사람들이 있으니 할 말 없지만 그 사정이 어떠할지는 전쟁 후 우리나라가 세계 최극빈자의 나라였던 나의 어렸을 적을 생각해보면 짐작이 간다. 60년대에 와서도 굶어죽는 사람들이 있었고 한번은 일가족 어린 아이들이 굶어 죽었다는 신문보도가 나자 그것을 가슴아파 한 함석헌(咸錫憲) 선생이 아이들을 생각하며 며칠 단식을 한 적도 있었다. 동물들마저 새끼부터 먼저 먹이는 것이 본능임을 생각하면 아이가 굶어 죽는 상황은 얼마나 처참한 고통이었을까? 그것에 비추어 의붓자식을 학대하려고, 혹은 버릇 가르친다고 어린아이를 굶기는 극악무도한 것들은 엄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가난했던 시절 얘기를 그다지 실감하며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부유하지는 않았어도 부친이 항상 직장에 나가셨기에 식구가 굶어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아마 처음 굶어본 것이 함순의 소설을 읽을 때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굶음은 어찌 보면 일종의 사치의 표현이다. 먹을 것을 살 돈이 있는데 굶는 것은 밥에 대한 무시이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상황에서 안 먹는 것도 겸허한 자세가 아니다. 투쟁을 하려면 부지런히 먹고 기운 내서 할 것이지 왜 단식투쟁을 하는 것인지 평소에 밥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나같은 보통사람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단식투쟁하는 것 꼴보기 싫다고 ‘항의 단식’하는 것 역시 안 좋아보인다. 그러나 정말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린 중국 동포들의 단식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 분들이 단식 후 어떻게 건강회복이라도 좀 했는지... 그런가하면 한 끼에 30만원짜리를 처먹는 인간은 결식 아동이 있는 나라에서 거르지 않고 밥 먹는 것도 당당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몸 중심에 있는 "밥통"이란 것이 얼마나 참을성 없는 물건인가? 하루 세 번씩 우리를 닦달하고. 하루 이틀만 돌보지 않으면 체면, 위신, 자존심을 모두 위태롭게 만든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밥통만큼 청렴강직한 것도 없다. "포도청"이라는 별명의 "입구"에서는 그래도 맛을 따지고 어쩌고 하지만 "본부"에서는 그런 것을 가리는 법이 없다. 일단 밥통은 채워지면 이물질이 들어온 것이 아닌 한 느긋해지고 일정한 양 이상은 거절한다. 우리 몸은 그만하면 만족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일단 배가 채워지고 난 후에 무엇을 바라는 것은 다 탐욕이다. 그래서 성인들은 밥 먹을 때 기도하라 했고 식탐을 죄악으로 여기라 했다.
그런데 식탐뿐 아니라 다른 탐욕까지도 모두 밥통의 잘못으로 돌리는 수가 많다. 몇 억을 가질 목적으로 살인행위가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빈부의 차를 줄여야 한다”는 말은 별 설득력이 없다. 탐욕이 있는 한 빈부의 차를 줄여보아야 마찬가지다. 부자를 부러워하는 것도 부자라고 우월감을 갖는 것만큼 탐욕이다.
배가 고플 때 환장하는 것처럼 탐욕스러운 인간은 배는 불러도 그 어딘가가 고파 환장하는 사람들이다.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는 "밥통"이 아닌, 우리 몸에 있는 또 하나의 "통" 속에 삼시 세때 먹는 밥처럼 또 다른 "밥"을 매끼 적절한 양으로 꾸준히 부어 넣지 않으면 안된다. "정신의 양식"을.
* 필자 조성진은 1947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독문학, 연극학, 음악학, 오페라 연출을 공부하였으며 1980년 부터 다수의 오페라를 연출하였다. 예술의전당, 세종문화회관에서 예술감독으로 재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