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잃어버린 신발 한짝을 찾으셨나요?(현영애)
[수필]
추석날, 연길기차역입니다. 내 고향 천개산 양지바른 기슭에 낮고 작은 무덤으로 잠들어 계시는 부모님을 뵈러 나선 걸음입니다. 직장일, 집안일이 바쁘다는 핑게로, 출가지외인이라는 구실로 몇년 가도 한번 찾아뵐 생각조차 하지 않은 죄 많은 불효자식이였기에 이제 엄마와 만나면 당장 울컥― 하고 슬픔이 솟아나올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마을인 조양천역으로 떠나는 기차는 아직 발차시간이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같이 가기로 약속한 다섯째언니와 조카애를 기다리며 나는 역 대합실 걸상에 앉아있었습니다. 한가한 시간을 보내며 려행객들의 틈에 끼여 앉은 나는 이리저리 눈길을 돌리다가 시선을 발아래로 내리였습니다. 그러자 시야에는 재미있는 그림이 펼쳐지였습니다. 나의 눈에는 온통 가고 오는 신발들만 안겨들었던것입니다. 가죽구두, 운동화, 헝겊신… 그것도 오늘이 추석날이라 거의 모두가 부모님산소로 찾아가는 신발들이기에 코끝이 번쩍번쩍 광나는 구두나 디자인이 화려한 부츠 또는 뒤축이 송곳처럼 뾰족한 하이힐 등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고 대신 신발장에 오래동안 얹어두었다가 꺼내 신은 신발모양으로 류행이 한참 지난 신발들이 대부분이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벌써 산소에 다녀오는 걸음이라는듯이 흙먼지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신발들도 가끔 보였습니다. 무심하게 이 무수한 신발들의 흐름을 바라보던 나의 눈앞에는 문득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내 눈앞으로 가고 오는 사람들이 신은 신발이 모두 한짝으로 보였던것입니다. 착시현상? 아니면 얼마전 펼쳐보았던 책속의 이야기가 떠오른것인가요. 헤라녀신때문에 아나우로스강을 건너다 가죽신 한짝을 잃어버린 이아손을 맞아준것은《모노샌들로스가 내려와 이올코스의 왕이 된다네…》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를 에워싸는 아이들이였습니다. 그때로부터 이아손의 인생력정은 잃어버린 그 한짝 신발을 찾아가는 과정이였고 수많은 시련에 시달려가는 간난신고를 거쳐 나중에 그 신발을 찾아내였을 때 그의 머리우에는 아이들이 부른 노래에서처럼 이올코스왕국의 빛나는 왕관이 씌워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선불교의 시조인 달마대사도 무덤속에 짚신 한짝만 달랑 남긴채 홀연히 사라졌고 외짝 신발만 신은채로 그곳으로부터 수만리나 떨어진 인도인지 하는 나라의 저자거리에 다시 나타나 대각(大覺) 즉 큰 깨달음을 얻는 경지의 불도수련에 마저 정진하였다고 하였지요. 역시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유럽동화의 주인공 신데렐라와 우리 고전소설의 주인공 콩쥐도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유리구두와 꽃신 한짝을 다시 찾음으로써 각각 사랑하는 왕자와 원님을 만나게 되였으며 백년가약을 맺고 끝내 사랑행진의 해피엔딩인 웨딩마치를 울릴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화와 전설, 전래동화 그리고 고전소설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한짝뿐인 신발을 계기로 인생의 대역전을 맞이했고 결정적인 변화를 이루어내였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은 우리들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있은 이야기일것입니다. 나에게도 신발 한짝을 잃어버리고 찾아가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집 울바자 바로 옆으로 도랑물이 촐랑촐랑 흘러가고있었습니다. 어느날 나는 이 논도랑에서 올챙이 잡이를 하다가 고무신발 한짝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신발은 엄마가 얼마전에 대대마을 공소사에 가서 사준것입니다. 시골에서 돈푼이나마 모은다는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요. 엄마는 애지중지하는 암탉이 낳은 닭알이며 뜰안 터밭에 알뜰히 키운 남새들을 캐여 무거운 짐을 만들어 이고 십여리 길을 걸어 조양천진장거리에 가서 장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살림에는 아껴 쓰고 한푼 두푼 용돈으로 모아 식구들의 옷이며 신발들을 하나하나 어렵게 장만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집으로 한짝 신발만 달랑 들고 들어가면 야단맞을것이 불보듯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황한 나머지 점심 먹을념도 하지 못하고 치마저고리 온몸에 흙탕물을 칠해가면서 몇시간을 허비하였지만 신발은 도랑물을 따라 어디까지 흘러갔는지 아니면 어디 물굽이에 꽁꽁 숨어버렸는지 끝내 나타나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집에 돌아와서는 집식구들에게 이 일을 비밀에 붙였습니다. 엄마가 물으면 새 신발이라 아까워서 책상서랍에 넣어두고 신지 않는다고 얼버무렸습니다. 썩후에야 이 일을 알게 된 엄마는 혼내줄대신 그저 너그러운 웃음으로 넘겨주었습니다. 그제야 마냥 옥죄여있던 마음이 활― 풀렸습니다. 그때 잃어버린 고무신 한짝은 끝내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신발 한짝은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내 머리속에서 점점 희미해지다가 나중에는 감감 지워지고말았습니다. 그때 기어코 그 잃어버린 그 신발 한짝을 찾아내였다면 지금의 내 운명이 바꿔지지는 않았을가. 전설속의 백마 타고 오는 왕자가 아니더라도 그냥 요즘 영화나 TV드라마속에 나오는 주인공 비슷한 멋있는 남자가 나타나 그 잃어버린 신발을 찾아주어도 괜찮을거겠지요. 그랬다면 내 인생도 덤덤한 흑백TV가 아닌 요즘 최첨단기술이 만들어낸 디지털TV속에 펼쳐지는 화려한 드라마의 주인공아가씨처럼 울긋불긋하고 찬란하지 않았을가요. 우리는 처음에 우리 부모님들로부터 두짝이 가지런한 한컬레의 신발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다 나처럼 어쩌다가 신발 한짝을 잃어버려 외짝 신발만 갖고있는 형국이 되였지요. 고무신이든 헝겊신이든 부모님께서 한컬레 신발에 담아 우리에게 남겨주신것은 모두가 소중한것이였습니다. 이는 권력과 명예와 재부와 상관되는것이라기보다는 인생의 사랑, 행복 그리고 아름다운 령혼에 이어지는것으로 무한히 큰것이였습니다. 우리의 삶을 삶답게 만들고 이 세상을 세상답게 제도하는것은 부나 권세보다는 참사랑이며 참믿음이라는 말이지요. 우리 엄마도 나에게 고무신 한쌍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짝을 내가 잃어버렸던것입니다. 잃어버린 그 고무신 한짝을 찾는것은 분명히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그 일을 완수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저러한 리유로 삶에 너무 게을렀고 타성에 너무 빠져있었던것은 아니였을가요. 한쪽 발이 시려납니다. 아니 어쩌면 오래동안 그냥 한쪽 발이 시렸는데 모르고있은것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이 사십고개를 넘어서면 먼 산을 바라볼 때라는 어느 스님의 말이 생각납니다. 인제 자기 삶을 챙길 때라는것입니다. 살아간다는것은 어쩌면 모노샌들로스 이아손처럼, 외짝만 신은 달마대사처럼 그리고 신델레나나 콩쥐아씨처럼 잃어버린 나머지 한짝 신발을 찾아가는 머나먼 길이 아닐가요. 당신은 잃어버린 신발 한짝을 찾으셨나요? 그리고 나는 오늘 엄마의 무덤에 가서 잃어버린 그 한짝 신발을 찾을수 있을가요. 저기 역전 문어귀에 다섯째 언니와 그녀의 아들인 조카애의 씩씩한 모습이 사람들속에서 보여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