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발까마귀에 갈무리된 전통의 무게(3)
- 그 역사에 대한 추적 -
기원전 11세기 무렵 건국됐다는 西周시대의 유물 三足鼎(제사를 드릴 때 사용됐던 세발의 청동기 제기로 추정)에 세발까마귀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西漢시기 저술된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 “淮南子”에서 세발까마귀를 태양의 화신으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 학계에서는, 태양의 흑점을 보고 三足烏로 여겼다는 說이 유력하다.
漢代 이후 중국의 역사에서 세발까마귀에 대한 언급이 점차 사라진다. 중국 고대신화에서, 예(羿)가 동시에 하늘에 뜬 열 개 태양 중 아홉 개를 쏘아 떨어뜨린 드라마틱한 장면이 묘사된다. 그 떨어진 태양을 살펴보니 사실 세발까마귀였다. 태양이 곧 세발까마귀었던 것이다. “회남자”, 戰國시대의 저서 “산해경(山海经·大荒東經)”, “초사(楚辭)” 등 고대의 여러 책에서 산발적으로 세발까마귀와 羿의 이야기가 동시에 전해지지만 저서에 따라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중요한 것은, 羿의 이야기가 세발까마귀 이야기와 동시에 묶여 있으며, 羿의 영웅담 자체가 세발까마귀 이야기를 떠날 수 없다는 그것이다.
아홉 개의 태양은 후세에 중국인들이 추구한 九州로서, 하나의 태양에 의해 표방된, 中原에 의해 통일이 불가피한 영역으로 인식이 변모되어 간다. 그렇다고 해도, 고대 중국민족이 태양에 대한 숭배를 가장 높이 산적은 따로 없다. 羿가 전설적 영역에서나마 그 궁극적 목표와 지향성을 뚜렷하게 나타냈던 셈이다.
“淮南子”는 태양에 대한 숭배를 잘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로, 세발까마귀에 대한 혐오의 정서가 보다 깊은 셈이다. 中原의 입장에서 어떠한 이유였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문화적 상징으로서의 세발까마귀를 차츰 멀리하는 입장을 취하고, 이로 말미암아 三足烏가 사라져갔다.
이와는 현저히 다르게, 동북方에서는 세발까마귀를 존속시킨 족속들에 의해 고대국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고구려가 그것이다. 고구려 건국 이후 세발까마귀의 문양이 더욱 섬세하고 화려하게 제반 물품의 그 어느 곳에서나 나타난다. 고구려 벽화에서 태양과 달이 에누리없이 동시에 그려졌다. 태양속의 세발까마귀와 달 속의 두꺼비가 반드시 같이 자리를 한다. 이른바 日月사상이다.
때를 거슬러 올라가 광개토대왕 시절인 기원 408년,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태양을 상징한 붉은 원안에 세발까마귀가 자리 잡고 있다. 고구려 후기로 갈수록 세발까마귀는 더욱 빈번하게 나타난다. 장수왕 시절 조성된 고분 한 묘비명에서는 주몽을 “해와 달의 아들”이라고 높여 부르고 있다. 스스로를 하늘의 후예로 여겼던 고구려인들, 묘비명에서 천손이라는 자긍심이 깊이 우러나고 있다.
고려시대까지도 세발까마귀는 지속적으로 발견이 된다. 고려 제11대 왕 문종의 아들인 대각국사 의천의 가사에도 해 속의 세발까마귀와 달 속의 두꺼비가 나란히 수놓아져 있다.
그러나 조선조 광해군의 묘비에 태양을 의미하는 원이 새겨져 있기는 하지만 세발까마귀가 더 보이지가 않는다. 성리학적 사고가 만연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해석된다. 게다가 사대주의도 이러한 사고를 보다 강화시킨 꼴이 되겠다.
일본 최초의 천왕을 모신 쿠마노 신사에는 세발까마귀 문양으로 가득하다. 일본에서 세발까마귀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고구려 말에 해당되는 7세기 말이다. 일본의 천왕은 자신을 태양의 자손으로 여기고 있다. 신무천왕이 산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세발까마귀가 마을로 길을 인도했다고 전해진다.
일본 국기에도 태양이 그려져 있다. 일본에는 쿠마노 신사 외에도 세발까마귀를 모신 신사가 많이 있다. 또한, 일본 축구협회는 그 상징으로 1930년대부터 세발까마귀를 사용하여 왔다.
세발까마귀는 동북아에서 반만년동안 이렇게 면면히 내려오면서 때로는 화려하게 부활하고 때로는 침묵한다.
세발까마귀의 전통을 깊게 새겨 국가적 문화상징으로 전면 앞에 내세웠던 고구려를 뒤로 하고, 점차 상징의 쇠락을 보아온 고려를 지나 조선조에서의 완전 소멸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참으로 길고도 무상하였다.
역사 추적의 현장에서 세발까마귀를 다시 둘러보는 지금, 세발까마귀는 그 부활로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