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정열, 그리고 넉넉한 사랑

2006-11-09     동북아신문 기자

   - 황송문 교수의 정년에 즈음하여

  연변대학 한국학연구소 소장  김 호 웅

 

시골 아저씨 같이 수수한 사람


  황송문 교수는 하나의 산이요 호수이다. 산처럼 높으나 생각이 깊고 호수처럼 고요하나 정열의 빛이 일렁이고 있다. 그는 거짓과 가식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소년의 순수함을 잃지 않고 있으면서도 정이 많고 심오한 시적 경지에서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러한 황송문 교수의 아름다운 인간성에 매료되기에는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연변대 조문학부장으로 있을 때인데, 부학부장으로 있었던 윤진 박사가 수필집 한 권을 들고 와서 한국 선문대 황송문 교수를 소개했다. 유명한 시인이고 학자인데 교수연구년 맞이해 가지고 연변대 조문학부에 와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

 

  한국에는 국어국문학과가 수십, 수백 개 소 되지만 중국에는 북경 민족대와 연변대에 두 개소 있을 뿐이라 우리 학부를 바라고 찾아오는 한국의 교수, 학생, 기자가 너무 많았다. 여름철 두어 달은 한국에서 찾아오는 귀빈들을 맞이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벌이다 보면 귀한 여름방학을 귀양보내기가 십상이다. 그래서 든든한 어른이 추천하거나 크게 신세를 진 교수가 아닌 경우에는 아예 명함도 내놓지 못하게 했다.

 

  헌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날마다 얼굴을 맞대고 일하는 윤진 박사가 추천을 하는지라 울며 겨자 먹기로 받기는 했지만 조문학부의 강의는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대학원 특강을 하도록 조처하고 연구실은 중조한일문화비교센터 연구실을 빌려 쓰게 했다. 윤진 박사가 그쪽의 부주임을 겸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송문 교수를 모시기는 하되 양쪽에서 반반씩 부담하자는 심산이었다.

  윤진 박사가 내놓고 간 황송문 교수의 수필집을 얼추 뒤번져보다가 그 중 한 편을 읽게 되었다. 아마도 「시인의 날」이라는 제목의 수필인 것 같다. 쭉 읽어보니 황송문 교수의 얼굴과 됨됨이가 한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대체로 시인, 작가들이 다 그러하듯이 황송문 교수도 젊은 시절에 아주 어렵게 지낸 것 같았다. 토끼꼬리만한 원고료에 매달려 겨우겨우 살아가는지라 사모님 앞에서도 주눅이 들어 지낸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시인의 날’이란 게 생겨 시인 친구들과 술 한 잔 거나하게 마시고 귀가했다. 헌데 재수 없게 문이 잠겨있지 않는가. 난생 처음으로 문을 쾅쾅 잡아 두드리며 “이놈의 마누라가 시인도 몰라. 오늘은 천지개벽 시인의 날이란 말이야!” 하고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이다. 산업화의 초창기요, 군부독재시절인지라 글쟁이들의 어려운 사정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황송문 교수의 수필을 읽고 나서 “허허, 또 술고래를 모시게 됐군!” 하고 개탄을 했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두어 달 지나 연변대를 찾아온 황송문 교수를 보니 어깨가 딱 바라진 중키의 중년이었다. 그런데 일부 한국의 교수들의 몸에 풍기는 오기와 독선은 보이지 않았다. 좀 쑥스러워하는 눈치인데 마치 초라하게 새끼 도야지 두어 마리를 안고 기름진 마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장터에 나선 시골 아저씨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연길에서는 돈 천여 원(한화 십여만 원에 해당함)이면 꽤나 번듯한 아파트를 쓰고 예쁘고 젊은 식모까지 둘 수 있었지만, 황송문 교수는 국제교류센터에서 외국에서 온 유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방 하나를 맡아 가지고 기숙사생활을 했다. 물론 하루 세 끼 유학생들과 함께 식당에서 쟁반을 들고 줄을 서서 밥을 타먹었다. 우리는 아파트를 하나 전세 맡아 지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권유했다. 그러자 황송문 교수는 “기숙사에서 지내는 게 편해요. 젊고 예쁜 식모를 두고 싱숭생숭해서 어떻게 밥을 먹지? 그렇다고 아파트 하나를 차지하고 혼자 살자면 아낙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밥을 하고 반찬을 만들어야 하겠으니 죽어도 그런 걸 못하지…” 손사래를 쳤다.

 

  평소 황송문 교수의 얼굴을 좀처럼 뵐 수 없었다. 밤낮 사면을 답답하게 막은 토끼장만한 간이연구실에 앉아 자료를 뒤지고 논문을 쓰는 것 같았다. 주말이면 현지 백두문인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연변의 산을 누비고 다녔고 다시 월요일이 되면 여전히 기숙사, 식당, 도서관, 연구실 사이를 오갔다.


 모범택시 기사님 같이 따뜻한 사람


  2003년 봄 나는 한국 배재대학교에 가서 1년간 강의를 하게 되었기에 황송문 교수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황송문 교수는 나 같은 시골선비를 선문대에 초청해 특강을 하게 하였고, 동아일보 문화센터에 초청해 특강을 하게 했다. 이상각 시인이 갔을 때도 그랬고, 김관웅 교수, 유연산 소설가가 갔을 때도 그랬다. 또한 이런저런 명분을 대고 인터뷰를 하고는 꼭꼭 10만 원씩 챙겨주곤 했다. 이름 없고 가난한 중국동포 학자와 문인들을 한국사회에 당당하게 내세워 주고 돈푼이나 벌게 하기 위해서였다.

 

  황송문 교수의 인터뷰를 받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로 되었다. 우선 황송문 교수는 허술한 카세트 녹음기를 내놓고 사전에 치밀하게 기획한 인터뷰 안(案)에 따라 꼼꼼히 질문을 하고 슬쩍슬쩍 퉁겨주기도 하는데 인터뷰를 받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대화에 깊숙이 빠져들어 거침없이 대답을 하게 된다. 인터뷰를 마치면 그 내용을 억양까지 살리면서 현장감 있게 정리해 다시 메일로 보내오는데 그 속도 또한 대단하다. 200매 분량의 내용을 하루 저녁에 정리해 보내오는데 거의 완벽에 가깝다. 밤새 녹음기를 틀어놓고 딕테이션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 성의와 집념에 누가 감히 태만을 부리랴. 조금 손보아 보내면 멋진 인터뷰가 된다.

 

  인터뷰를 하거나 특강에 초청할 때는 으레 승용차를 몸소 몰고 왔다. 7, 8년 잘 굴러다닌 검은 색 소나타였는데 뒷좌석에는『문학사계』며 여러 신문 잡지들이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그뿐이 아니다. 승용차 뒤쪽 트렁크에는 가방만 해도 두세 개 있는데 하나는 선문대에 강의를 나갈 때 쓸 교수안을 넣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아일보 문화센터와 같은 곳에 강의하러 갈 때 쓸 자료들을 넣은 것이며 또 하나는 비상용이란다. 황송문 교수님의 자가용은 그야말로 이동식 침실이요, 서재요, 연구실인 셈이다.  내가 뒷좌석에 앉을라치면 황송문 교수는 “앞에 앉아요. 앞에! 죄송하지만 뒷좌석은 고물시장이라서… ” 하고 바른 편으로 몸을 기울여 앞문을 열어준다.

 

  황송문 교수의 운전 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댁은 서울에 있고 선문대는 천안과 아산에 있는지라 하루 절반은 차에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 번은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데 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창살 같은 빗줄기를 가르며 내달리는 소나타, 핸들을 잡고 전방을 주시하는 황송문 교수의 형형한 눈빛, 얼마나 멋진지 몰랐다. 나를 서울 인사동 부근에 내려놓고 핸드폰을 꺼내들고 여기 저기 전화를 걸고 나서 다시 보얀 비안개를 헤가르며 강원도 쪽으로 가족여행을 떠나는 황송문 교수, 그야말로 야전사령관에 진배없었다.  

 

  "이젠 10년을 굴렸으니 고물차라 하겠지. 허지만 연변에서 온 귀한 손님을 모시고 다니기에는 전혀 불편이 없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호웅 선생?”

  황송문 교수는 껄껄 웃었다.

  참으로 황송문 교수님의 소나타Ⅱ 신세를 얼마나 많이 졌는지 모른다. 배재대학교 교환교수생활을 마치고 귀국할 때도 이 소나타Ⅱ에 짐을 싣고 대전에서 공항까지 장장 3시간을 달렸었다. 그 후 한국을 다녀올 때마다 바로 이 소나타Ⅱ로 영종도 공항을 나가군 했다.

 

  아침은 유명한 청진옥에서 해장국을 시원히 먹고 출발을 한다. 모범택시 운전수를 뺨 칠 정도로 운전을 잘 하는 황송문 교수가 핸들을 잡은 소나타Ⅱ에 몸을 싫으면 서울행차에서 얻은 노독이 다 풀리고 기분은 둥둥 뜬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황송문 교수는 늘 본의 아닌 모범택시기사 노릇을 하는 까닭에 술 한 잔 들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가 하도 민망해서 “이제 연변에 오시면 원수를 갚지요.” 하고 번마다 말하고 있으나 황송문 교수는 일이 바빠 연변을 오지 못한다. 그러니 일방적으로 신세만 질 수밖에.

  지난해에 갔을 때는 인문대학 학장이 되었다고 따님과 사위가 새 차 한 대 뽑아 드려서 황송문 교수는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번쩍번쩍하는 새 그렌저 승용차가 가난한 연변의 시골선비나 모시고 다니는 줄 안다면 따님과 사위가 얼마나 서운해할까?  

   

   문학의 불씨를 간직한 사람


  황송문 교수 사모님의 존안은 한 번도 뵈지 못했지만 어느 예술대를 나온 피아니스트인 것만은 알고 있고, 두 분 사이의 금슬이 좋다는 걸 연변의 원로시인 이상각 선생의 말씀을 들어 조금은 알고 있다. 사모님은 황송문 교수를 뵈러 연변에 딱 한 번 찾아왔었는데 나는 워낙 분주한 데다가 분복이 없어 뵈지 못했다.

 

  문제는 연변에서 외롭게 지내는 황송문 교수를 찾아왔는데 이 어른은 술판에 앉아 진지하게 문학을 담론하다보니 그만 부인이 오는 걸 감감하게 잊은 것이다.

  그 날 김관웅 교수(필자의 실형임)네 집에서 술판을 벌였는데 모두들 연변문학을 두고 열띤 토론을 벌였단다. 연변문단은 500여 명의 시인, 작가, 평론가들이 포진하고 있는데 개중에 서로 잘 났다고 뻐기는 친구가 많고 대체로 서열의식에 매여서 작품을 평가했다.

 

  그 날 술좌석에 앉은 친구들이 방관자청(傍觀者淸)이라고 밖에서 온 사람이 오히려 문제를 공정하게 볼 수 있는 법이니 황송문 교수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황송문 교수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만 사모님이 오는 날임을 까먹은 것이다.

 

  물론 여러 날 전에 역서에 정히 메모를 해두었고 그 날 아침부터 마중을 나갈 차비를 해 두었지만 일단 문학담론에 깊이 빠지다 보니 부인이 오는 시간을 깜빡 잊어먹은 것이다.

  한편 연길 공항에 내린 사모님은 아무리 휘둘러보아야 남편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어지간히 속이 달았다. 가물에 콩 나듯 비행기가 드문드문 이착륙하는 자그마한 공항은 어느새 썰렁해졌는데 여전히 남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다. 바삐 공중전화로 황송문 교수의 기숙사에 전화를 했지만 붕 붕 소리만 날뿐 여전히 받는 이가 없다.

 

  버스나 타고 왔으면 되돌아가고 싶었다. 사모님은 공항 대기의자에 앉아 반나절 기다리다가 혼자 트렁크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부부동반해서 온 선문대학교 교수들을 따라 백산호텔에 이르렀다. 사모님은 연변대학 기숙사로 전화를 걸었다. 한밤중 가까스로 통화가 되어 만나게 되었으나 두 분은 한 숨도 잠을 이루지 못한 모양이다.

 

  두 분은 밤새도록 그럴 수가 있느냐, 이해해라, 여차여차해서 그리 되었다. 이해 못한다, 이해해라, 이해 못한다, 하는 이런 얘기의 되풀이로 밤을 꼬박 새운 모양이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황송문 교수는 그 당시 대장이 나빠서 고생 깨나 했던 모양이다. 설사를 주룩주룩 하면서도 누가 냉면이나 개고기를 대접하고자 하면 내색을 하지 않은 채 기꺼이 먹고는 계속해서 설사를 하기가 일쑤였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누군가 황송문 교수를 두고 문학지상주의자라고 했지만, 사실 황송문 교수의 이런 문학에 대한 집념과 애착이 그의 문학과 학술의 풍성한 열매를 가능케 했으리라.

 

  황송문 교수는 귀국한지 반년도 되지 않아 연변체험을 시적으로 노래한『연변 백양나무』라는 시집과 『중국조선족 시문학의 변화양상연구』라는 저작을 보내왔다.

  연변에 대한 사랑이 진하게 묻어나는 시들도 좋았지만 조선족의 시문학을 깊이 있게 해석하고 그 문제점들도 꼼꼼하게 짚어준 저작은 더욱 좋았다. 황송문 교수는 조선족 시단의 서열의식을 깨고 작품의 문학성 여하에 따라 시인을 평가했고 현지 평론가들이 스쳐지나간 좋은 시들을 발굴해 일일이 평을 달았다. 특히 연변시단의 제왕으로 자부하는 원로시인들이 아니라 조선족문학의 중심지에서 천여 리 떨어진  북만(北滿) 지역에 묻혀 있던 이삼월 시인의 시들을 높이 평가했다.

  연변문학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해가 갈수록 깊어졌고 당신이 출간하고 있는 『문학사계』에 연변지역 시인, 작가들의 작품을 지속적으로 내주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시인들의 시들에 연변 조선족 작곡가들의 곡을 붙이도록 주선함으로써 모국과 연변지역 예술가들의 연대성을 꾀하기도 했다.

 

  이젠 연변의 문인과 예술인들에게 있어서 황송문 교수는 가장 미더운 평론가로 되었고, 『문학사계』지는 연변의 시인, 작가들의 주요한 활동무대가 되었다.

  모국의 한 성실한 지성인의 사랑과 집념이 서울과 연길 사이에 아름다운 악장과 같은 교류와 화합의 물꼬를 튼 것이다.


  황송문 교수가 정년을 맞는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산처럼, 호수처럼 고요하고 부드러우나 가슴 깊이에 활화산을 안고 있는 황송문 교수, 그에게 정년이라니 당치도 않다. 드바쁜 교수생활을 그만 두게 되었으니 이제 문학창작과 문화교류의 전초에서 더욱 맹활약을 할 것이다. 안성맞춤으로 새 승용차도 갖추었으니 그는 더욱 힘차게 달릴 것이다.

 

  이젠 정년퇴임을 하시게 되었으니 연변에도 오시어 후학들을 가르치며 즐겁게 지내기를 바란다. 여기에 황송문 교수의 원수를 갚을 친구들이 하도 많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