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선언(서문)
김석
나에게는 고상한 취미가 하나 있다. 나의 고상한 취미란 무엇일까? 바로 인간의 팬티를 훔쳐보는 거다. 나는 인간의 팬티가 보고 싶다. 나는 왜 팬티가 보고 싶을까. 인간은 팬티를 입고 있으니깐. 그럼에도 우연히 ‘노빵’ 아가씨들을 만나면 저도 모르게 외면하게 되는 건 웬 일일까.
지난 해(2005년) 3월에 나는 나의 고상한 취미를 몸에 지니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공부에 바빠, 생계에 시달려 취미 생활을 할 겨를이 없었다. 흉년에 흉년이 겹치니 나의 고상한 취미는 녹이 쓴 농군의 낫처럼 무디어져 버렸다. 이대로 나두면 금년 농사도 망할 것 같다는 위구감이 앞선다.
한 학기가 지나고 두 학기가 지났다. 개학하면 나의 한국 생활도 만 일년을 기록한다. 불혹에 가까울수록 하루 하루가 소중해진다. 장가를 가던지, 시집을 가던지, 결과가 필요한 나는 ‘七十而從心所欲’의 나의 부모님께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다. 일년 동안 나는 뭘 하고 있은 거지.
재미나는 팬티 구경도 제대로 못하고..^^
오늘은 나의 생일, 한국으로 건너와 처음 쇠는 생일이다. 주위의 축복을 받고 싶은 마음은 하늘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내일은 그믐날이다. 귀성할 놈은 귀성하고, 귀국할 놈은 귀국하니, 축하해줄 친구도 없고 외로움을 달래줄 여인도 없다. 그러고 보니 소주가 제일 좋은 친구로다.
오늘 저녁 소주와 씨름을 해본다?
E-mart에 가서 노르웨이 산 연어 한 덩이를 사왔다. 할인 50%, 사시미를 만들고 나머지다. 살 때는 꽤 먹음직해 보였는데, 도마에 놓고 쪼개니 겨우 스물 조각이 나왔다. 소주 한잔에 한 조각이면 대충 소주 두 병이다. 와사비 간장에 한 점 찍어먹어 보니 세상 별미다.
여러 분, 오늘은 2006년 1월 27일, 까마귀님의 생일 축하해주세요..^^
소주 한잔 고독한 위를 달래니, 인생살이란 별 거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살아도 사는 거고 저렇게 살아도 사는 거다. 손님 없이 혼자 세는 외로운 생일이지만, 그래도 격식은 갖춰야겠다 싶어, 어젯밤에 먹다 남은 왕만두에 촛대 하나를 꽂았다. 등불을 끄니 밥상 위의 하늘거리는 빨간 촛불이 귀엽다.
- 촛불은 누구를 위해 타고 있을까. 나는 누구를 위해 생일을 쇠고 있을까.
촛불은 서서히 촛대를 먹어 들어간다. 나는 자아를 잊고 하늘 거리는 촛불을 지켜본다. 마치 한 인간의 인생을 지켜보듯 진지하게. 조금 뒤 나는 한계를 느꼈다.
나는 두 눈을 감고 조용히 기원한다.
- 중국 사람들의 팬티를 훔쳐봤다. 일본 사람들의 팬티를 훔쳐봤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어떤 팬티를 입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새해에는 열심히 한국 사람들의 팬티를 훔쳐보리라. 내가 한국으로 건너온 목적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일 년 동안 왜 아무것도 못 보았을까? 내가 자세를 너무 높인 것이 아닐까? 새해에는 자세를 한층 더 낮추어야겠다. 자본주의 나라여서 팬티를 공짜로 보여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자면 돈도 많이 벌어야겠다.
까마귀 파이팅..^^
2006년 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