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인생무진
-생명상태의 존재감에 부쳐-
1. 들머리
김훈의 첫 단편집 “강산무진” 속 ‘江山無盡’은 이름 자체로 預兆가 되었다. 無盡한 강산에 인생을 담고 보니 인생 역시 끝을 다할 수가 없어, 팽배하는 감상을 점철하다 드디어 지금, 여기를 쓰게 된다. 의도된 과장도 없고, 허무한 한탄도 없다. 낭만은 더욱더 없다. 江과 山이 만나는 경계면에서 생명이 꿈틀거렸다면, 혹자는 그림에, 혹자는 시에, 혹자는 자고나면 사라지는 꿈에, 혹자는 소설에 인생을 새겨둘 것이다. 김훈은 소설에 잘 삭은 감회를 적었다.
상기 언설은 원론적이어서 보다 자잘하게 작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강산무진‘ 생명상태는 어떠한 존재감으로 지금을 느끼고 있는지, 왜 그렇게 느껴야만 하는지를 범박한 논의로나마 따져보고자 한다.
2. 인연(因緣)과 연기(緣起), 그리고 실존
작품 ‘강산무진’ 속 인연은 퇴조된, 세속적 인과론으로만 녹아있지는 않았다. 분명하고 날카롭게 원시적 맥락을 되찾으면서 인연은 다시 因과 緣으로 분리되고 또한 끝없이 합치며, 緣이 지속적으로 起를 유도해간다. 혹은, 起의 끈질긴 아집과 상태가 緣을 끌어당기고 因으로 회기 하려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동심원으로 하여 일어난 큰 파문의 그 진원부터 살피는 것이 수순일 듯 싶다.
월요일마다 오후 내내 계속되는 중역회의 동안에 방귀를 참고 있으면 트림이 나왔는데, 트림 끄트머리에 구린내가 배어나왔다.
중저가 의류업체의 상무인 나-김창수-는 그때까지는 몰랐던 몸의 증세, 간암에서 야기되어 범상치 않은 그 방귀로부터 화한 트림의 끄트머리에서 구린내를 맡게 된다. 의사의 확신에 찬 말대로, 오진을 절대 하지 않는 PET(양전자방출단층촬영)가 간에서 암세포를 검출해내었다. 암세포는 이미 임파선으로 전이, 삼개월 혹은 사개월 후에는 입원을 해야 할 처지에 다름 아니다.
모든 사유와 모든 준비는 암세포로 말미암은 것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 몸속의 역설, “암은 외부에서 침입한 병균이 아니고 몸 안에서 스스로 태어나서 자라고 번식하는 생명체라니까, 내 몸속에는 내가 탑승할 수 없는 또 다른 시간의 대열이 흘러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암세포가 왕성한 번식을 지속할수록 ‘나’의 생명이 소진되는 역설이 거창한 생각의 정리 따위는 가볍게 물리고, 지금을 합리적으로 살게 한다. 말하자면, 죽음을 위한 정리가 남았을 뿐이다.
이혼하고 헤어진 아내를 아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인지를 생각하는 일은 쑥스럽고 우습다. 전처(前妻)라는 말이 있어서 그 말에 거덜난 인연의 흔적이 남아 있기도 하지만, 전처와 남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중략) 하기야 아내에서 타인으로 돌아가는 과정의 온갖 우여곡절을 인연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인연, 맺고 풀어지는 모든 행위에서 끈질긴 고리를 발견하고 확인하지 않을 수 없어 지금까지의 줄을 끝까지 잡아 세속화된 인과관계에서 대부분을 발견한다.
욕조에 기어 올라온 지렁이로 인해 그만 기절하여 “119구급대가 배를 누르고 팔다리를 주무르자 아내는 먹은 것을 토하고 똥을 싸면서 정신을 차렸”지만, 아내는 항상 그러하듯이 기도원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기도에 남다른 애착을 보이는가 하면, TV채널의 온갖 서글픈 얘기를 부여잡고 끝까지 사라지지 않을 울음만을 지속하다가, “내”가 이혼을 제안하자 너무나 순순히 동의하였고, 위자료의 일부에 남편 미불 나머지 부분을 계약서로 확인받은 후 결혼생활을 거뿐히 청산한다. 그녀는 얼마 후 전도사와 재혼하였다. TV속 인물과의 자기 동일시 울음이 그 후에도 지속되었는지는 모를 일이기는 하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까지 슬프고 피해의식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는지는 확실치는 않고, 그녀의 모든 적의와 자기연민은 찬송가와 기도에서 어설픈 해답을 찾는다. 안식처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내” 행위의 因은 암세포, “나”와 그녀의 因緣은 세속적 거래관계, 각자가 그렇게 다르면서도 질기게 지속적으로 살아가는 모습 자체는 緣起의 起만이 유표하게 작용된 결과로 표출될 뿐이었다.
동심원을 둘러싸고 한층 더 확장시키면 가족의 면면이다. 미국 MIT 유학으로 교수가 꿈인, 특별히 논리적인 아들은 “‘노자의 무(無)와 아르키메데스의 영(零) 사이의 거리에 대한 고찰’”이라는 논문이 부적격 판정을 받아 학위도 받지 못한 채 LA한인타운 어느 모퉁이에서 술가게 옆에 자그마한 세탁소를 차려놓고, 가끔 ‘나’에게 오는 편지에다 아쉬운 돈 얘기만 넌지시 흘린다.
딸은 파출부를 주선하는 것으로 효도를 대신하였고, 파출부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으로 아버지에 대한 안부를 대신하기는 하지만, 로펌회사의 잘나가는 남편을 둔데다가 그녀 역시 홍보회사의 중진으로서 대문짝만한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도 한다. 좋은 실적을 내는 유망한 사회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우발적이든 필연이든 ‘나’는 그러한 가족으로 이루어졌고, 이것과는 사뭇 다른 무엇을 느낄 경우에는 폭이 비약적으로 커진다. 인연과 연기가 ‘나’를 가족만 생각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암 판정을 받고 마지막 일곱 개비의 담배를 바라보며 50년 전 세월로 거슬러 올라가는 불가사이, 그 불가사이의 중심에는 원색적인 미국제 담뱃갑 붉은 색이 자리 잡고 있다.
길거리에는 미군들이 내버린 럭키스트라이크 담뱃갑이 바람에 날려 다녔다. 새빨간, 진홍색 동그라미의 가장자리에 검은 선을 그려 넣은 디자인이었다. 럭키스트라이크의 그 진홍색은 내 유년을 뒤흔든 충격이며 혼란이었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그렇게 찬란하고 영롱해서 인간을 세상 밖으로 밀쳐내버리는 색깔이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중략) 럭키스트라이크의 색깔과 함께 오십 년 전 내 유년의 거리에서 짧은 치마에 반소매 차림으로 미군 지프차를 타고 가던 여자들의 몸냄새도 떠올랐다. (중략) 내 어머니와 이모들이 ‘양갈보’라고 불렀던 그 여자들은 향기로웠다. (중략) 담배는 여섯 개비가 남아있었다.
6.25의 피해상과 근대화, 산업화는 형체를 다 잃어버린 논리를 버리고 차라리 지금 붙여진 담뱃불에서 원색적 붉은 빛 로고와 ‘양갈보’의 몸냄새에서 더욱 뚜렷하게 그 기억과 감회로 각인된다. 또한, 드디어 환기된 50년 전 추억이 더욱 아득한 추억을 불러들인다. ‘나’의 생이 담겨진 근대와 근대화 인생이 이제부터는 아주 작은 단위로 에누리 없이 수축되어 동심원의 디테일한 점으로 변화하면서 확장을 거듭한다. 그래서 작품 속 논의범주는 확실하게 큰 설정을 갖게 된다.
박물관 건물에 걸린 현수막이 ‘가야토기 특별전’에서 ‘조선후기 회화 특별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야에서 조선후기까지는 천오백 년이 넘을 듯싶었는데 현수막은 며칠새 바뀌어 있었다. (중략) 나는 한기를 피하여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박물관에 들어가보기는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의 경주박물관 이후 처음이었다. 그때가 조선후기에서 가야까지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러다나니 ‘나’의 암세포와 ‘나’의 행위, 나의 가족, 나의 ‘현재’ 전부가 결국 起의 범주로 작아지고, 그 잇닿은 緣을 찾아 역사의 시공간으로 거슬러 오른다. 차원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되겠다.
1500년 역사의 편린을 감히 느끼려는 자로서, 암세포를 지닌 ‘나’의 범상치 않는 태도 속에는, 당분간은 실존적 행위에서 많이 벗어난 영역으로서의 거슬러진 시공간을 끌어 당겨온 본연적 충동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역사를 유도하여 굵직한 사유를 상정해본 여유와 배짱이 암세포를 초라하게 만들어가야 하는 것 또한 처절한 용기와 생명원리라 아니 할 수가 없다. 혹은 몸짓과 핏속 맥박이 과거와 역사의 영역으로 ‘나’를 당겨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상투적 시간이 간혹 실수를 저지르는 순간, 과거의 덧없음이 진지한 역사시간으로 환원되는 불확실한 여운이 그다지 중요해보이지 않은 사건과 사건으로 비쳐지는 것, 여기에 작가의 고심과 진실이 얼마간이라도 우러나오고 있다.
“헤어진 아내의 몸의 흔적이 딸의 얼굴에 남아 있었는데, 그 인연의 흔적은 끈질기고도 낯설었”던 시간이 압도적이지만, 형이상학적 추상의 오감은 박물관 옆 호수 속 노란 연꽃을 섬세하게 관조하는 것까지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낯설어진 현실을 낯설어진 관념으로 고도화해볼 때, ‘나’는 다르게 살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박물관 앞마당 연못 속의 수련은 꽃잎을 오므리고 흐린 날의 어스름 속에서 호롱처럼 떠 있었다. 물 위에 드리운 나무 그림자가 바람에 흔들렸고 수련은 오므린 봉우리로 밤을 지낼 모양이었는데, 땅 위의 빛이 사위면 스스로 오므리는 그 봉우리들의 안쪽에서 밤이면 등불이 돋아나고 낯선 시간의 꽃들이 다시 피어나는 것 같았지만, 오므린 봉우리의 안쪽은 들여다보지 않았다.
실존-역사-추상의 고리는 결국 起-緣-因과 합치되어 가고 있다. 因의 무서운 질문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상기 묘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란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다. 불교의 연꽃, 禪의 연꽃으로 신성화되기까지 고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나 되겠다.
그러나 또한, ‘나’는 현실에서 말한다. 박물관 옆에 확실히 연꽃이 피었고, ‘나’는 그대로 그것을 보았으며, 박물관은 며칠사이 1500년을 압축, 절삭하여 전시의 단면으로 나타났으며 ‘나’는 담뱃불에서 원색적 붉을 색과 ‘양갈보’의 몸냄새를 떠올리면서 죽음을 준비하고나 있었다. 그리고 진실한 前妻와 아들, 딸도 같이 있었다.
3. 어미, 여인, 그리고 여자들
어미의 본연으로 작동된 행위는 진실하다. 본능이기 때문이다. 여인은 신성하다. 왜냐면 세상법칙의 근간을 올바르게 구성하면서도 이성을 초월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여자들은 얼마간 다르다. 보편성을 내재하면서 각자 특수화되기 때문이다. 삐뚤어짐도 당연히 있다. 이러한 점층적 구조를 작가는 말하고 싶어 했다.
화가가 이 세상의 강산을 그린 것인지, 제 어미의 태 속에서 잠들 때 그 태어나지 않은 꿈속의 강산을 그린 것인지, 먹을 찍어서 그림을 그린 것인지 종이 위에 숨결을 뿜어낸 것인지 알 수 없는 거기가, 내가 혼자서 가야 할 가없는 세상과 시간의 풍경인 것처럼 보였다.
무릇 어떠한 잉태나 위대한 행위로 실감되기는 하지만 “제 어미의 태속에서 잠들 때”를 얻지 못하였으면 江山無盡 또한 존재할 이유를 기저에서 박탈당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존재론적 인과에 대한 존경을 더 강요받는 처지라면 난감한 일이다. 그러하게 흘러가는 생명력의 기본 사항에 대한 ‘나’의 판단을 바탕으로 깔 때, 그 그림을 그린 자나, 그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자나 확실하게 평등하다. 그 태속을 긍정하기까지 수없는 세월을 보내고, 죽음의 변두리에서 다시 무엇인가 되새기던 순간에 생과 사의 경계선을 강요받는 당혹감은 오히려 한없이 편안한 상태의 ‘나’를 사실화한다. 죽음을 앞둔 자는 겸허한 마음으로 태초의 상태에 대한 성찰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고, 그럴 경우에야 생명의 고귀함이 한결 뚜렷하게 안겨온다. 생명의 창출과 상생의 원리, 모성은 그것으로 이미 지금까지 논해졌던 수많은 철학을 뛰어넘어 바람직한 위대성을 획득한다.
백골에도 감정 같은 것이 살아 있었다. 두개골은 노여움을 띤 듯한 표정으로 이가 숭숭 빠진 턱을 벌리고 있었고, 머리맡에 바스러진 머리카락이 먼지처럼 쌓여 있었다. 어머니는 생시에 어깨가 둥글었는데, 육탈된 어깨뼈는 완강한 직각이었다.
백골은 ‘나’의 어머니였다. 여인으로서의 모친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각으로 ‘내’가 도달할 수 있었던 곳이 따로 있었다. 수많은 어머니를 겹치고 겹쳐 원형질로 나타낸 단 하나의 어머니, 그것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어미와 어머니는 어느 정도 달랐다. 동물을 벗어나 문명을 획득한 인간에게 차례질만한 최고의 축복으로 어머니가 등장한다. 그 둥근 어깨가 완강한 직각으로 앙상하게 드러나기까지 육탈이라는 과정이 있었다. 육체가 사라졌을 때 미학이 결여된 모습을 보이던 해골에서 ‘나’는 직각을 발견한다. “중부전선 럭키고지 탈환전에서 전사했다는 통지가 왔을 뿐 아버지의 유해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제사를 모시지 않았다. 꼭 집 나간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구나... ... 라고 어머니는 말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의 “직각”은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로 둥글면서도 견고했다. 그러다나니 어머니의 감정을 여직 살아있게 되는 것이요, 그것은 죽을 수 없는, 죽일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여자들은 달랐다. 영롱하다 못해 현기증을 자아내는 모습들, 거기에는 겹칠 수 없는 각자로서의 여자가 살아서 생생하기만 했다.
쵸콜릿을 얻어먹으러 미군 지프차에 매달려 손을 내밀 때, 차에 타고 있던 그 여자들의 향기는 찌르는 듯했고 감싸는 듯했으며, 밀쳐내는 듯했고 끌어당기는 듯했다. 내 어머니와 이모들의 그 희뿌연 무채색의 삶에 비할진대, 그 여자들의 향기는 완연한 실체로서 날카롭고 선명했다.
자궁유방검진실 앞에는 독일에서 수입한 초정밀 레이저 검진설비가 가동되었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여자들이 소파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렸다. 동창생들인지 헬스클럽 회원들인지, 동갑내기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이 수다를 떨면서 까르르 웃어댔다.
딸이 소파에서 일어서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변기에 물을 내리는 소리가 그처럼 요란스런 것이었는지를 처음 알았다.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돌아가는 여고생들이 연못가에서 주전부리를 하면서 사진을 찍었다. 한 아이가 웃으면 다른 아이들이 따라서 웃었다. 웃음은 물결처럼 빠르게 퍼져나갔고 웃음이 한바탕 지나가면 또다른 웃음이 일어섰다.
여자들의 스펙트럼이다. 경쾌하고 발랄하기도 하고, 집요하기도 요염하기도 하다. 딸 역시 여자들 중 한 모습으로서 깊게 각인된 화장실 물소리를 내는 정도로 이해가 된다. 거기에는 숭고의 미라던가, 세속의 혐오라던가, 실리에 집착한 아집 같은 것이 엉키고 재 정렬되어 현실의 큰 덩어리를 구성한다. 여자의 모든 것을 떠올리는 냉철과 기대, 그것으로 ‘나’는 여자들을 이해하고 있었다. 밀치면서도 당기는 힘, 그 이상을 더 알지 못하면서 집단으로서의 여자들에 대한 고찰은 정확한 대답을 유보한다.
4. 생존 함수와 화폐 방정식, 그리고 전문직업의 미덕
생존의 함수는 심오하다 못해 번거롭기까지 하지만, 그야말로 가장 간단한 공식에 도달한다. 교환법칙과 거래를 인간 사이에 적용하며, 화폐로 가격을 측정한다. 모든 생존의 함수는 전부 화폐 방정식의 미지수로 치환되며, 미지수 역시 적절한 계량을 가능케 한 화폐로 환산된다. 에누리 없이 정확하고 기묘하다.
꽃빛깔 변화의 탐구에서 보여준 형이상학적 사고를 제외하고, ‘나’의 江山無盡圖의 관찰에서 보여준 지성을 제외하고, 거스를 수 없는 암세포의 확산을 제외하고 전부 돈으로 환원된다. 돈 액수로 말하고 적절한 시간과 공간에서의 건네짐과 건너옴으로 말을 한다.
굳이 이성적 사고와 본능의 움직임, 명상과 추억을 화폐로 나타내려는 무모한 시도를 하지 않는 전제 하에서, 화폐는 모든 것을 통일하여 명시할만하다.
아내와의 이혼합의와 위자료, 딸의 효도와 파출부 배정, ‘나’의 스러져가는 생명을 간호할 호스피트와 아들의 미국 초청 및 배분이 불가피한 유산, 회사 명퇴와 위로금·연말보너스, 어머니 무덤 처리와 화장비용...
말없는 화폐에는 전문적인 직업의 대가가 들어있다. 직업은 돈을 만들어내고, 돈은 언어를 만들어가며, 언어는 감정으로 치환가능하다. 작품은 그래서 화폐의 산출 경위를 소상히 밝힌다.
금년 겨울 전에 입원을 하게 되면 병식에서 적립금을 내기가 번거로울 것이다. 12월치까지 사 개월분 적립금 이백오십만원을 일시불로 미리 지급하고 12월 31일자로 해약했다. 사 개월치 이백오십만원을 일단 서류상으로 적립했다가 12월 31일자로 해약하면 이자를 제하더라도 지급총액이 오십만원쯤 더 많아진다고 창구 여직원이 계산기를 눌러가며 설명해주었는데, 복잡해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내년 1, 2, 3월치 적립금과 이자를 제하면 지급총액은 구천육백오십만원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샌디에이고의 기온이 급강하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일 주일쯤 도착이 지연되어도 계절시장 진입에 별 영향은 없을 것 같았다. 칠레 지사장이 전해오는 장기 일기예보는 낙관적이었다. 환율 사정도 하락세의 끄트머리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칠레의 수입회사에 팩스를 보내서 부산항의 항만파업 사태를 설명하고 운송지연 배상액수에 합의했다. 남미쪽이 추워지기 전에 화물을 도착시킬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마지막 컨테이너를 보내고 서울로 올라오자 사장은 내 노고를 치하하는 술자리를 벌였고 내년부터는 거래항구를 평택으로 바꾸는 방안을 검토해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여기에는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었는지, 그처럼 정확, 무미건조하고 철저하게 모든 것이 소상히 기록되었다. ‘내’가 적을 수 있고, 또 적어야만 하는 사항 중 이러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없을 지도 모른다. 이러한 데이터와 전문영역에 대한 애착을 보여줌으로써 ‘나’는 거의 전부를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남미나 칠레가 어느 모호한 지역의 모호한 이름으로 처리될 수 없는 긴박감과 위엄을 ‘나’는 ‘나’의 행위와 계산으로 말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 더 이야기 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세태 속에서 ‘나’는 자신과 친인척 혹은 타인과 말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을 찾았던 것이다. 간편하고 확실하며 몸서리치게 훌륭하다.
생의 함수를 분류하고, 추상적 영역은 암 선고를 받은 생의 끄트머리에서 비로소 어쩌다 기회가 생겨 생각해보며,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생을 정리하는 비정상적 시간에서도 화폐의 가치와 위력은 여전히 막강하였고, ‘나’의 직업도덕은 곧 화폐 자체를 양산하면서 훌륭하게 제반 사항을 처리 가능하도록 지속된다. 그래서 ‘나’는 얼추 소리 없이 처리되는 이것저것에 만족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감정이입을 거세당해 떳떳한 중년사나이, 그는 절제된 생활양상을 알고 있었다.
5. 강산무진과 인생무진, 그리고 마무리
江과 山이 無盡하다면, 인생 역시 無盡하다. 허무를 빙자한 자기호소는 사실 기만이라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는 생명력은 역사이전의 신화에서 생겨나 역사를 길들이며 지금까지 만개해왔고 호도된다. 야만과 문명의 차이도 분명치 않고, 聖과 俗도 부질없는 구분이길 쉽다는 자각 끝에 현자는 침묵했고, 정열적 사내는 몸속의 암세포를 세균배양실험처럼 관찰했다. DNA는 살고, 인간은 죽는다는 역설에서 ‘나’는 유감을 느끼지 못한다. 유감을 느끼려는 무지와 같은 헛것들과의 싸움은 전개되고 전개되며 세월을 메웠다. 그리고 박물관의 江山無盡圖가 걸려서 말을 한다.
화가 이인문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림의 제목처럼 팔 미터가 넘는 긴 가로 화폭을 따라서 강산은 끝이 없이 펼쳐져 있었다. 눈으로 본 강산과 꿈에 본 강산, 꿈에도 보지 못한 강산들이 포개지고 잇닿으면서 출렁거렸다. 산들이 잦아지는 골짜기마다 마을이 들어섰고, 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들이 펼쳐졌고, 들판 가장자리에서 다시 산맥이 일어섰다. 윤곽선을 풀어헤친 산맥은 연기처럼 엉키고 또 흩어지면서 허공 속을 흘러갔고, 기진해서 소멸해가는 산맥들이 하늘 속으로 빨려가는 잔영 너머에서 바다는 시작되고 있었다. 바다가 뿜어내는 안개가 먼 잔산(殘山)들의 밑동을 휘감았고, 그 안개 속에는 내가 모르는 시간의 입자들이 헤어나서 자라나고 번창했다.
마을이 들어선 곳에는 인간이 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사회가 있다. 사회가 있는 곳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세대와 세대를 잇는다. 그 광대한 강산이 스러지지 못할 때, 인간도 정녕 죽지를 못하는 딱한 신세로 된다. 그 산을 느껴줄, 그 강을 느껴줄 無盡한 이야기에 의해서라도 인간은 살아가고 있다.
정확한 판단을 끝까지 유보하는 ‘나’의 굳센 침묵은 너무나 많은 말을 하다나니 차라리 한마디도 하지 않는듯하다.
因緣起의 시작이 있되 끝을 모르는 내달림, 어미나 여인과 여자는 있되 혼자서 죽는 소멸, 생존도 있고 화폐도 있되 직업에서 고갈되지 못하는 잔영의 사고와 감정, 강산도 있고 인간도 있되 無盡한 그것을 뒤로 하고 떠나는 나그네와 나그네들, 그것들로 작품은 눈물도 웃음도 없다. 그리고 풀어야 할 문제를 두고 침묵도 해답도 없이 그냥 우두커니 서있는 자세다. 말하자면, 인생은 “의사가 말했듯이, 피로를 느끼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산책이었다.”
단, “-주여, 길 잃은 어린양을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불쌍한 김창수의 죄를 사하여주시고 그의 앞길을 인도하소서.”라는 한무리 신자들 속 前妻의 모습을 뒤로 하고 출국장을 나서던 중 “자동문이 닫힐 때 딸이, -아빠... ... 라면서 말을 잇지 못하면서 눈물을 닦았다”는 것이 관찰됨으로써 진실 중 일부분의 소중한 그 무엇들이 유전되고 발현되는 것에 위안은 얻을 수도 있을 만하긴 하다.
허무보다 강한 실존의 생존상태를 김훈式 ‘江山無盡’으로 오감하며, 특별한 존재감을 느껴본다.
존재감은 존재와 공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