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에 손을 씻고 만주벌을 밟다

2006-10-23     동북아신문 기자
▲ 시인 조성래 네 번째 시집 <두만강 여울목>
ⓒ2005 신생
강변엔 조약돌 많고
물살은 은어떼처럼 반짝인다
이 자잘한 빛살의 율동
꽃잎 삼아 띄워보낼 노래는 무엇일까
아무리 닿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저쪽
사연들 철길 따라 풀섶에 묻혀 있다
한여름 오후의 눈부신 고요함을
강물에 풀어도 칠십 리는 넘을 듯
세월 떠밀며 우두커니 서 있는
강 저편의 묵묵한 암봉 두 개
주인이면서도 경계에 묶여
낯선 표정으로 이쪽 그리워한다
꼬마들 몰려와
물장구치며 놀만도 하건만
강가엔 인적 드물고

언제부턴가
바로 건너편 옥수수밭머리
모락모락 흰 연기 피어올라
우리들 빈 마음 하염없이 적신다

-52쪽, '두만강 여울목' 모두


꼬마 때부터 우리 나라 지도 그리기를 몹시 좋아하던 아이. 늘상 우리 나라 지도를 그리면서도 두만강과 압록강 상류의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국경선을 그리기가 가장 어려웠다는 아이. 엉뚱하게 그려진 그 지도 때문에 몇 번이나 다시 그리다가 마침내 두만강과 압록강 국경지대의 땅이름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는 아이.

그 아이는 틈이 날 때마다 그렇게 지도를 그리며 땅이름을 익히다가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 대한 묘한 그리움을 품게 된다. 그때부터 아이는 지도를 그리는 날마다 꿈을 꾼다. 백두산 너머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만주벌판과 그 벌판에서 말갈기 휘날리며 달리던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조국 해방을 위해 만주벌판을 누비며 일제를 무찌르던 독립군의 눈부신 모습을.

그 아이가 자라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그 시인의 이름은 조성래. 시인 조성래는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가슴 설레던 그 땅을 직접 피부로 느껴보기 위해 열흘 동안의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시인은 두만강 물에 손을 씻고, 만주벌판을 제 발로 밟으며 우리 동족의 옛 생활풍습을 보았고, 그 땅 곳곳에서 식민지 시대의 피내음을 맡는다.

"두만강, 압록강 일대와 그 너머 북방 지역은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식민지 시대 이후 이념의 장벽에 가로막혀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이상향이었다. 우리 민족의 신화들이 존재하는 성스러운 땅임에도 불구하고, 이념적으로 적대시할 수밖에 없는, 이율배반적인 비극의 세계였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시인 조성래(46)가 지난 1997년 세 번째 시집 <바퀴 위에서 잠자기>를 펴낸 뒤 8년만에 네 번째 시집 <두만강 여울목>(신생)을 펴냈다. '만주기행시집'이라는 덧글이 붙어 있는 이 시집은 지난 2003년 여름, 시인이 어릴 때부터 꿈꾸어온 두만강과 만주 일대를 여행하고 난 뒤 감당할 수 없는 벅찬 감격으로 쏟아낸 시편들이다.

하지만 최근 나온 시집은 아니다. 지난 1월 말에 나온 시집이다. 근데, 왜 이제 와서 그 시집을 다시 들추어내느냐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 시집이 나온 줄 모르고 있었다. 얼마 전 그가 편집위원으로 있는 시전문지 <신생>에 이선관 시인 특집을 꾸미기 위해 마산에 왔을 때 그 시집을 처음 받았다.

시인 조성래는 어릴 적 지도를 그릴 때부터 "그곳(두만강 압록강 일대)에 대한 그리움이 뿌리 깊은 한으로 내 가슴에 자리" 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이념의 장벽이 곳곳에서 자신의 갈 길을 막아도 전혀 이상스러울 게 없었다고 말한다. 왜? "오히려 그것은 내가 일생 동안 주고 풀어야 할 숙제와 같은 것"이므로.

가도 가도 끝없는 평원 지대
초록 옥수수밭으로 통일되어 있다
바람 한 점 없는 팔월의 대낮
지평선은 뭉게뭉게 흰 구름 피워올리고
어쩌다 눈에 띄는 원색의 붉은 집들
낮은 구릉 아래 앉은키 낮추고 있다
始原(시원)의 초록으로 한없이 펼쳐진
파스텔로 그린 저 부드러운 능선마다
어린 시절 자전거 타고 마음껏 달려 봤으면!
딸랑딸랑 불알 흔들며 굴렁쇠 굴리거나
잘 익은 둥근 달 따서 동무와 굴려봤으면!
그저 떼굴떼굴 구려 봤으면…….

-20쪽, '옥수수밭-단동에서 심양까지 2' 모두


시인 조성래는 누구인가?
만주기행에서 식민지 시대 피내음 맡는 시인

▲ 시인 조성래
ⓒ이종찬
"2003년 여름, 아무 여정도 없이 우리는 훌쩍 만주로 건너갔다. 그리고는 그냥 발길 닿는 대로, 느긋하게, 가능한 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여기저기 흘러다녔다. 곳곳에서 식민지 시대의 피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시인의 말' 몇 토막

시인 조성래는 1959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84년 무크 <지평>과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시국에 대하여> <카인별곡> <바퀴 위에서 잠자기>가 있다. 지금, 부산 학산여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시전문 계간지 <신생>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 이종찬 기자
"가도 가도 끝없는 평원지대"인 만주여행길. 시인은 단동에서 심양으로 가면서 초록빛 지평선으로 펼쳐진 드넓은 옥수수밭을 바라본다. 그때 문득 그 옥수수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데올로기가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키워낸 옥수수밭에는 이데올로기가 아예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시인은 지평선이 피워올리는 흰 구름과 "어쩌다 눈에 띄는 원색의 붉은 집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초록빛으로 통일 된 그 옥수수밭을 달리고 싶다. 행여 시인의 마음에도 이데올로기 한 자락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두려워 하면서, 이데올로기를 아예 모르는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맘껏 달리고 싶다.

남과 북의 사람들이 이념의 옷 훌훌 벗어던지고 초록빛으로 마구 출렁이고 있는 그 지평선을 따라 "딸랑딸랑 불알 흔들며" 왁자지껄 달리고 싶다. 그렇게 달리다가 "잘 익은 둥근 달 따서 동무와 굴려" 보고도 싶다. 여기서 "잘 익은 둥근 달"은 이데올로기로 인한 분단의 철조망을 걷어내고 하나가 된, 즉 남북통일이 되어 우리 민족이 꽃 피워낸 찬란한 문화에 다름 아니다.

연길에서 룡정 가는
작은 버스 안
탑승객 대부분 우리 동포다

처음 만나도 반가운
반가운 인사말로 인정 나누는
핏줄의 따스함

조금씩 자리 양보하며
사람 사는 세상 오순도순 만드는
제일 뒷좌석

왼쪽 사내와 오른쪽 아낙네
사이에 끼여 앉아
차가 좌우로 기울어질 때마다

엉덩이로 은밀히
대화 나눈다

-56쪽, '체온-룡정 1' 모두


시인 조성래는 윤동주 생가가 있는 룡정으로 가는 버스를 탄다. 그 버스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우리 동포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한다. 그때 시인은 "핏줄의 따스함"에 포옥 빠진다. 그리고 그 핏줄의 따스함을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기 위해 버스 뒷좌석에 앉아 "차가 좌우로 기울어질 때마다" 은근슬쩍 동포들의 엉덩이에 자신의 엉덩이를 갖다댄다.

그렇게 "온통 핏줄에 와 닿는/ 이 깊고도 은밀한/ 간절한 떨림"(환희)을 느끼며 윤동주 생가에 도착한 시인은 집 주변의 "싱그러운 미루나무 이파리마다/ 맑은 햇살 반짝반짝, 손바닥 뒤집는" 것을 바라본다. 지금은 윤동주 생가 그 어디에도 "고향에 돌아온 날/ 내 백골이 따라와 함께 누웠다고/ 절규한 어둠은 보이지 않"(윤동주 생가)는다.

▲ 두만강에서 손을 씻고 있는 조성래 시인
ⓒ2005 신생
"'룡정'이란 땅이름 만들어낸 용두레우물" 가에는 늙은 수양버들이 길게 늘어뜨려져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엔 로인들이/ 장기 두며 쉬고 있다"(용두레 우물). "일송정 올라보니/ 일송정 푸른 솔은 보이지 않고/ 중국식 정자와 애기소나무 한 그루"만이 외롭게 서 있다. 하지만 "발 아래 아득한 평강 칠십 리"는 시인 자신도 모르게 "고향처럼 정답기만"(일송정) 한 것을 또 어찌하랴.

모래밭 널찍한 두만강 건너
회령시 회색 건물들 희미하게 보인다
저 곳에 누가 사는지 물으나 마나
바라보는 눈시울 먼저 뜨거워 온다
왼쪽 들판 똑바로 질러간 신작로 저 편
'조선령'이라 써 붙힌 신비탈 낯설고
어둔 역사의 빗물 흔적만 낱낱이 살아나
내 가슴에 흑백으로 막무가내 찍힌다

-76쪽, -'망강대(望江臺)-삼합 4' 모두


룡정을 떠난 시인은 마침내 두만강 근처 국경마을에 도착한다. 국경마을에는 "기와집 초가집들이 이마 맞대고 있다". 시인은 "판자로 울타리한 꾸밈없는 살림살이"에서 "온 마을에 넘치는 깊고 맑은 평화"(국경 마을)를 느낀다. 하지만 "신작로 저 편"에 씌어진 '조선령'이라는 팻말이 가슴을 찢는다. 여기나 저기나 다 같은 조선 땅이 아니었던가.

그때, "리동렬 소설가 묵묵히/ 우리를 버들방천으로 안내한다". 시인이 버들방천에서 바라본 두만강은 "상류에 어디 광산이라도 있는지/ 조금은 탁하고 누런 물"이다. 근데 그 두만강에서 "마을 꼬마 너덧 명/ 천둥벌거숭이로 멱감고 논다". 하지만 그 꼬마들은 "습관인지 아닌지 강물 중간 지점을/ 결코 넘지 않는"(버들방천)다.

시인 조성래는 만주와 입록강, 두만강 주변의 국경지대 곳곳에서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을 절절이 느낀다. "외로운 길은/ 세상 끝에 닿고 싶어 한다"(길)라거나 "소가 간다/ 내면의 침묵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간다"(고행), "저 무덤가에/ 울고 싶네/ 잔디 없이 맨흙으로 만들어진 봉분"(작은 노래)에서 시인의 통일을 향한 강렬한 열망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두만강 여울목>은 분단으로 인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우리의 반쪽 땅, 그리고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만주벌판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 시인은 만주기행에서 우리의 옛 생활풍습과 잃어버린 역사를 차분히 더듬는다. 그리하여 남북통일은 물론 잃어버린 옛 고구려 땅까지 되찾기 위한 큰 꿈을 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