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윤동주 묘소와 누이동생 부부를 만나다
신길우(본명 신경철) 박사는 상지대 교수와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근무하고 정년퇴임한 국어학자로 수십 편의 논문과 저서를 냈다. 대학시절부터 수필을 써온 수필가로 10여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출간하였고, 한국의 국정교과서인 <중학국어>와 연변대학 사범학원․인문학원의 <교재>에도 수필이 실렸다. 현재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남한강문학회와 조운수필 회장 등 여러 문학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 교수가 발표한 중국 동포문인과 유적 등에 대한 글을 청하여 게재하기로 하고, 1차로 윤동주 시인의 친 누이동생 부부와 관련된 글을 싣는다 . - 동북아신문 편집자 - |
- 이 글은 본회 이사이며 수필가인 신길우(申吉雨) 교수가 2003년 3월부터 연변대학 <수필창작> 초빙교수로 근무하면서, 마침 윤동주 묘소를 개수하러 와서 연길시에서 지내고 있던 친동생인 올해 80세인 윤혜원(尹惠媛)․오형범(吳瀅範) 부부와 여러 차례의 만남을 인연으로 하여 작성한 글로, 관련 사진과 함께 게재하는 것이다. 앞으로 중국 용정(龍井)의 윤동주 묘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물론, 윤동주와 유일한 생존 가족인 여동생 부부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 좋은 참고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월간 수필문학 편집자 주
그런데, 윤동주의 묘소에서 뜻밖에도 윤동주 시인의 친 누이동생 부부를 만났다. 정말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그들은 만난 적도 없고, 전화나 인터넷으로도 대화한 일도 없다. 사실 그들이 살아 계신다는 말도 5월까지는 듣지 못한 처지였다. 그런데 그들을 만난 것이다.
윤동주 묘소를 방문한 것은 용정의 일송정(一松亭)과 용정중학교의 윤동주자료관을 살펴본 뒤였다. 택시를 세내어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 합성리 동산(東山)의 교회묘지로 향했다. 길 주변의 봉분과 묘비들을 바라보며 묘소 부근의 언덕 위에서 차를 멈추었다. 틀림없이 이 근처라며 내리는 용정 출신 문인의 뒤를 따라가며 주위를 살펴보니 십여 년 전에 왔었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조금 내려가자 작은 나무 사이로 묘소가 보였다. 그런데 그곳에 남녀 노인이 있었다. 다가가 누구냐고 묻자 남자 어르신이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내가 윤동주 매부요. 이 사람이 누이동생이고.”
그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잊고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사진에서 보듯 미남형의 젊은이로 내 머리 속에 새겨져 있었기에, 그의 누이동생 부부가 이렇게 노인이라는 사실이 얼른 믿어지지가 않아서였다. 매부라는 노인은 건장한 체구지만 확실히 노인이었다. 옆에 서 있는 여동생도 자그마한 키에 몸매가 호리호리한 편이었지만 역시 나이 많은 노인이 틀림없었다.
나는 너무도 반갑고 놀라운 마음에 수인사도 제대로 나누지를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누이동생인 윤혜원(尹惠媛) 여사가 내 손을 꼭 잡아쥐는 것이었다. 마치 시집간 누님을 처음 찾아갔을 때 맞이하며 잡아쥐어 주던 그런 느낌이 들었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할머니의 모습 위에 젊은 날의 앳되고 예쁘장한 얼굴이 포개져 떠오른다.
참배를 하려고 묘비 앞에 서니, 묘지는 개수 작업 중이었다. 봉분의 잔디는 걷혀서 흙만 덮여 있고, 밑에 둥그렇게 둘렀던 화강암들도 모두 치워졌다. 봉분 주변은 여유 공간을 두었고, 묘역 주변은 대리석을 둘러치고자 사각형으로 골이 파여져 있었다. 봉분 앞에 ‘詩人尹東柱之墓’라 새긴 묘비가 옛 모습 그대로 서 있어서 새삼 반가운 느낌이 들었다.
묘비 앞에 놓인 기다란 공사용 판자를 상석으로 삼아 그 위에 과일과 과자 몇을 제수로 올려놓았다. 유족이 지켜보는 앞에서 독한 빼주(중국술)를 따라 올리는 내 손이 나도 모르게 떨렸다. 연길(延吉)의 두 문인도 연이어서 잔을 올렸다. 잔 올리고 절을 하는 우리의 모습을 매부인 오형범(吳瀅範) 선생이 사진을 찍고는 이렇게 말을 하였다.
“윤동주는 29살 젊은이로 죽었는데, 환갑을 지낸 분들이 절을 하는 것을 보니 오히려 민망하구려.”
나는 그도 윤동주를 20대의 젊은이로서만 기억하고 있음을 알아챘지만, 혼잣말처럼 응대를 하였다.
“나이가 문젠가요? 선인(先人)인데 당연한 것이지요.”
세월이 흘러도 인상은 그대로이고, 사람은 가도 감동은 가슴 속에서 뛰논다는 말이 실감되었다.
참배를 마치고 묘비를 중간에 두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윤혜원 여사의 독사진을 따로 촬영하는데, 하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묘비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모습이, 80세의 노인이 아니라 윤동주 생시의 20대 초반의 친 누이동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윤동주의 묘소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990년 7월 중순이었다. 연변대학에서 3일간 열린 한국어 국제학술대회를 마치고 백두산을 참관하고 돌아오는 차 중에서 나는 윤동주 묘소를 찾아갈 것을 제안하였다. 아무도 모른다는 상황 속에서도, 나는 묘소 사진과 함께 보도된 용정시 합성리의 뒷산 공동묘지에 있다는 신문기사 내용만 알 뿐이었지만, 꼭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일행 중 따라 내린 십여 명과 함께, 우리는 둥근 화강암 테를 두른 봉분에 묘비를 갖춘 묘마다 찾아가 살펴보았다. 산등성이를 거의 다 올라간 즈음에서 윤동주의 묘소를 찾았을 때의 기쁨은 참으로 컸었다. 곧 이어 좀 떨어져 있는 송몽규의 묘도 찾아냈었다. 그 바람에 너무 늦게 호텔로 돌아와서 저녁식사도 나와서 따로 해야 했지만, 그때 찍은 윤동주 묘소의 사진은 동행하지 않은 일행들까지도 요청해와서 수십 장을 나누어준 기억이 생생하다.
이번에는 연변대학 초빙교수로 와서 다시 찾은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친 여동생 부부를 묘소에서 만난 것이다. 이미 5월 10일에 나는 여동생 부부가 참여하고 미중한인우호협회와 연세대학교가 후원하고 연변인민출판사가 주도하고 있는 제4회 윤동주문학상을 심사해 준 바가 있다. 괴질 사스(sars) 때문에 작품 심사 때에 여동생 부부가 참석하지 못했는데, 7월의 시상식에서도 못 뵐까 조바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우리는 묘소 옆 작은 나무 아래에 깔아놓은 자리에 앉아서 과일과 약주를 들었다. 한참을 환담하다 보니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만난 사람들처럼 스스럼이 없어졌다. 나와 둘이 앉아서 사진을 찍는데 윤혜원 여사가 내 오른쪽 팔을 두 손으로 껴잡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팔짱 끼기를 좋아해요.”
그러자 사진을 찍던 오 선생이 웃으면서 한 마디 던진다.
“나랑은 한번도 팔짱을 끼지 않으면서….”
그의 농담 속에서 한평생을 재미있게 살아오는 노부부의 모습이 느껴졌다. 그들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재내던 사이였단다. 피난 내려와서 부산에서 살다가 지금은 호주 시드니에서 산다고 한다. 지금 80세로 동갑이라는데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력이 정정하였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출생하여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하였다. 묘는 1945년 3월 6일에 유족들이 이곳에 안장하고, 6월 14일에 ‘詩人尹東柱之墓’라 새긴 묘비를 세웠다. 1988년 6월에 미중한인우호협회 현봉학 회장이 연증(捐贈)하여 용정중학교에서 묘소를 수선(修繕)하였다. 또 퇴락한 것을 보고 여동생 부부가 직접 인부들을 지휘하며 다시 보완 수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설명하는 노부부의 얼굴에는, 자기 평생에 다시는 손볼 수가 없을 줄로 여기고 마지막 정성을 쏟는 진지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우리 부부가 이 나이에 윤동주의 묘를 보수할 수 있게 된 것은 다 하느님 덕택이고, 복을 받은 거지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유월 초의 뙤약볕 아래에서 땀방울이 송글거리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오 노인의 얼굴이 그처럼 평온하고 밝을 수가 없었다. 감사하며 사는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그대로 여실하게 보여주는 듯하였다.
6월 하순, 보슬비가 조금씩 내리는 어느 날 오형범․윤혜원 노부부는 나를 집으로 초대하였다. 그들은 개수 공사를 하는 동안 연길 시내의 한 아파트에 세들어 있었다. 내가 늦게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오 노인은 1층 현관 앞에 이미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 여사는 묘소에서 만났을 때처럼 내 손을 잡으며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오 선생은 내가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사진 석 장을 내놓으며 이런 말을 하였다.
“신 박사 일행이 절을 하는데, 비탈지고 여유가 없어서 대단히 미안했었지요. 그래서 새로 계절(階節)을 만들었어요.”
그리고는 자갈과 시멘트로 네모지게 두르고 판판하게 새로 만든 계절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참배하기게 좋게 되었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혼잣말처럼 우스갯소리를 하였다.
“보태드린 것 없이 저도 한 몫을 한 셈이군요.”
내 말에 오 선생은 활짝 웃으면서 응답을 하였다.
“그렇지요. 아주 크게 기여한 것이지요.”
절하는 자리인 계절은 원래 계획이 없었는데, 그때 결심을 하여 새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완성을 하고는 남편이 얼마나 흐뭇해했는지 모른다. 계절을 만들지 않고 공사를 마쳤더라면 아마 두고두고 마음 아파했을 것이라며 윤 여사가 보충 설명을 하였다. 노부부에게 있어서 계절 공사는 뒤늦게 생각한 것이지만 묘소를 찾는 사람들을 위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었다.
오 선생은 윤동주에 관한 책과 사진들을 보여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본 동지사대학에 윤동주시비를 건립하면서 민단과 조총련이 화합하게 된 것, 동지사대학 동포 동문들이 Korean Clup을 창립한 것과 그들의 뒷 이야기, 그리고 윤동주가 어려서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큰외숙인 김약연(金躍淵) 장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도 윤동주의 시에는 기독교 냄새가 거의 풍기지 않는 사실 등을 말해 주었다.
“윤동주가 어려서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도 종교적인 냄새를 별로 풍기지 않는 점, 그게 바로 윤동주의 시가 종교를 초월한 훌륭한 작품이 되게 한 주요 요인이지요.”
내 말에 오 선생은 그게 끄덕이며 긍정해 주었다. 오 선생은 어려서부터 윤동주를 잘 알고 있었기에 윤동주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오형범 선생은 정병욱 교수가 주도한 1948년의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자신이 천신만고 끝에 간직하여 월남해서 제공한 『윤동주전집』, 『윤동주의 자필 시고전집』 등이 원고가 어떻게 보존되고 출간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와 그에 얽힌 이야기도 말해주었다. 윤동주가 생전에 모은 문예 스크랩에 관한 이야기며, 유일하게 사귄 여인에 대한 것도 들려주었다. 그런 자료들이 당시에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보존되고 전해져서 나온 것인가를 생각하니 고달픔 속에서도 꽃은 피울 수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차린 건 없지만 점심이 준비됐어요.”
윤 여사의 말에 시계를 보니 12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어느새 두어 시간이 훌쩍 넘어간 것이다. 모시고 나가 대접하려던 내 생각이 소용없게 되어서보다도, 80세 노인이 손수 마련한 점심 대접을 받자니 오히려 송구스럽기만 하였다.
점심은 깔끔하고 맛이 있었다. 전이 먼저 나오고, 돼지고기와 쇠고기 수육이 채소와 함께 들어왔다. 오 선생이 포도주를 새로 따서 권하여 셋이서 반주를 하며 미역국에 밥을 맛있게 먹었다
점심이 끝나고도 오 선생과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후쿠오카 감옥생활의 송몽규 진술, 윤동주 시신의 수습과 장례, 동생 윤광주와 시인 심연수 등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윤동주의 시비는 현재 국내외 4곳에 서 있다며 사진을 보여주었다.
“우리 상지대학에도 서시비(序詩碑)가 있는데요.”
내 말에 오 선생은 반기며 그 사진을 구해 달라고 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그 뒤에 상지대의 서시비 사진은 인터넷으로 여러 장을 받아서 뽑아드리고, 그 중 한 장은 전문가의 수정 작업을 거쳐 확대하여 용정중학교의 ‘윤동주자료관’에 게시하게도 되었다.
2시가 넘어서 걸어서 귀가를 하면서, 나와 윤동주 시인과의 인연이 꽤나 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0년에 앞장서서 윤동주 묘소를 찾은 거며, 이번에 윤동주 여동생 부부가 주도하는 윤동주문학상을 심사한 일, 현충일의 윤동주 묘소 방문과 친 누이동생 부부를 만나고, 용정중학에 상지대의 서시비 사진을 게시한 것, 제4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과 주요 수상자와의 계속된 연계, 윤동주 묘소의 개수 사진 제공 등, 남다른 인연이 깊게 연계되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80세의 오형범 선생이 내 수필집을 읽고서 윤동주의 묘소와 묘비 등 알려지지 않은 사실과 잘못된 내용들을 시정하는 글을 내게 청탁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연이 어찌 꼭 살아서 만나야만 이루어지는 일이겠는가? 삶과 죽음을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연결되는 것이 인연인가 보다.
7월 하순에 나는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용정(龍井)을 다시 찾았다. 용정중학 윤동주자료관에는 다른 시비 사진들과 함께 상지대학의 서시비가 게시되어 있었다. 윤동주 묘소는 개수가 완료되었고, 묘비도 본래의 것이 그대로 봉분 앞에 서 있었다. 왼쪽에 사각의 보수비를 새로 세웠는데, 조부모와 부모, 아우 광주의 생졸일자(生卒日字) 아래에, ‘누이 惠媛, 조카 仁石, 仁河, 卿 새김. 2003. 7. 15.’이라 새겨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오형범․윤혜원 노부부의 정성과 삶의 모습이 여러 곳에서 느껴졌다. 묘역을 새로 개수하면서도 주변의 다른 묘소들의 묘역에 조금도 침해되지 않도록 공사를 하고, 봉분도 남달리 크지 않게 균형을 맞추었다. 뒤쪽과 좌우의 묘들도 잔디를 입히고 손보아 준 것이 확실하였다. 내 묘소만 정성을 들인 것이 아니라, 이웃의 남의 묘들에까지도 배려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내 마음도 덩달아 푸근해졌다.
왼쪽으로 좀 떨어져 자리한 고종 사촌 송몽규(宋夢奎)의 묘소도 윤동주의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새로 개수해 놓았다. 다만 개수비가 없는 것만이 다를 뿐, 강덕(康德) 12년 을유 5월 20일에 세운 묘비와 1991년 7월에 용정중학동창회에서 수선했다고 새긴 상석도 그대로이다. 본래 명동 장재촌에 있던 것을 1990년 4월 5일에 이곳으로 이장하였던 것이다.
용정의 윤동주 묘역을 돌아보고 되돌아 나오는 길에 젊은 윤동주의 잘 생긴 얼굴이 차창에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잔잔히 웃고 있는 누이동생 노부부의 두 얼굴이 포개져 바뀌어 올랐다. 나는 그런 모습을 마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빙긋이 웃었다.
<2003. 9. 1. 월간 『수필문학』 제156호>
<2003. 11. 20. 신길우 수필집『언덕 위의 집』도서출판 박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