檀君神話를 말한다(2)

-곰과 호랑이, 그리고 상승의지-

2006-10-11     전유재
     북핵이 함경북도에서 터졌다 거의 판명되는 동시에 전반 조선반도 백성의 마음속에서도 강렬하게 터졌다.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동족사이에서도 한쪽이 다른 한쪽을 볼모로 잡으려는 난국이다. 큰 우려가 아닐 수 없다. 시조단군의 영전에서 그 자손들이 무엇을 더 아뢸 수가 있는지 잘 알 수가 없어 심히 난처하다.


신화적 인물 앞에서 굳이 성스러움을 조장하고, 조심스럽게 그 예를 다 하는 것이야말로 유치하고 우매하기 짝이 없다고 대노하거나 냉소하는 인물들에게는 진지한 재성찰이 필요하다. 실존이었든, 실존이 아니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그러한 사람이 그러한 곳에서 그러하게 살았다 정도로 반드시 확인하겠다면 사실 허무하다.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 따로 있다. 기록의 맥락 속에서 역동하는 내면적 사고의식과, 그 사고의식을 접하면서 지금을 살아있는 者가 그것과의 대화야말로 진정 취해야 할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주통일의 염원을 먼저 들먹이기 전에 통일의 뜻을 정당하게 이룩하고 弘益人間 정신으로 널리 백성을 두루 헤아린 조상의 지혜부터 살피는 것이 오히려 마땅할 것이다. 결국 그러자면 우리가 신화로 치부해버린 선조의 “역사적 사건”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대개 그곳에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안이 미리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로 옮겨 적는다.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 살고 있었는데,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이때 환웅이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개를 주면서 말하였다. “너희가 이것을 먹되,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의 형상을 얻으리라.” 곰과 호랑이는 그것을 받아먹으면서 삼칠일(三七日)1)동안 금기했는데, (금기를 지킨)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호랑이는 금기를 지키지 못하여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2)


동굴이 먼저 있다. 닫힌 하나의 세계인 동굴은 사실 하나의 우주를 구현한다. 완전히 닫혀 그 무엇이든 드나듬이 없는, 철저하게 막힌 공간은 아니고 그 어떤 사건이 벌어지기 위해 감싸여진 배경으로 적절하게 작용되는 특수한 공간이다. 말하자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변화를 유도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동굴이 필요한 것이 되겠다. 그 동굴은 고요하여 많은 것을 차단도 하고 막아주기도 하지만, 곰과 호랑이가 드나드는 장소요, 신령한 쑥과 마늘이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존재적 요소로서 동굴이 하나고, 거기에 인간이 되고자 하는 염원을 지닌 주체로서의 곰과 호랑이가 다른 한 요인으로 선택되어진다. 한 차원에서 다른 높은 차원으로의 비약을 가진 상승의지, 그 상승의지는 곰에게도, 호랑이에게도 있었다. 단순하고도 진실한 논리, 모든 者가 발전을 원하는 모습이 곰과 호랑이의 욕망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인간족속의 내면이 그대로 들여다보이는 의미체계를 제대로 담아냈다.


신령한 대응물도 마저 있다. 신령한 쑥과 마늘이 그것이다. 절제와 극기를 위해 활용되고, 통과의례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며 천상의 성스러움과 신비함, 강력한 힘을 그대로 상징한다. 높은 차원의 것이 낮은 차원의 것을 이끌어 올리는 과정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게 됨이 쑥과 마늘의 효과에서 확실하게 보여진다. 쑥과 마늘은 일반적인 지상의 것이 아니요, 桓雄의 손을 통해 건네진 하늘의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또한 지상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늘이 기운이 서린 신령한 것이요, 곰과 호랑이를 인간으로 화할 매개물이다.


존재적 요소(1)로서 동굴, 존재적 요소(2)로서 곰과 호랑이, 존재적 요소(3)으로서 쑥과 마늘이 있다. 쑥과 마늘의 진정한 기능에 대한 자세한 고찰보다는, 그러한 신령물이 곰과 호랑이의 인간화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있어야 할 모든 부분으로서 존재요소 (1), (2), (3)을 모두 언급한 것이 된다.


요소 (1), (2), (3)은 중요한 결합관계로서 내면적 의미를 드러낸다. 필요한 배경으로서의 동굴, 그 동굴에서 생을 영위하고 상승을 도모하는 곰과 호랑이, 그 상승을 실현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쑥과 마늘, 이들의 결합관계는 곰과 호랑이의 태도 지속성을 단 하나의 변수로 확연하게 그 결과를 달리한다. 끝까지 빛을 피해 약속한 날을 지킨 곰은 熊女로 태어나고, 그 반대 경우인 호랑이는 결국 원래 그대로 남겨진다.


분명 또 중요한 부분이 아직 더 있다.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이 모자란 것은 절대 아니었다. 먹고 먹히는 살벌한 생존발전 경쟁을 곰과 호랑이는 오히려 하지 않았다. 현대사회의 제로섬게임과는 너무 달라, 오히려 낯설고 어이없는 단순소박의 평화로운 모습 그 자체를 그대로 그려낸다. 세상을 보고 대하는 이치로 상정된 소박한 논리가 이쯤에서 끝없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원래 그것을 외곡 없이 나타낸 단순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호랑이의 유감이라면, 자신의 의지에 순응하여 그대로 물러간데 있다. 모든 조건이 갖춰져 있을 경우, 의지가 결과에 크게 작용하는 꼴이 되겠다.


교훈을 주는 훌륭한 이야기쯤으로 가볍게 처리하는 경솔함에서는 벗어나야겠다. 그런 이야기는 많고도 많아 오히려 그렇지 않는 세상을 그렇게 보아라고 강박한다는 역반심리를 야기할 소지가 다분하여, 존재론적으로 그러하다고 더 깊게 따져보는 성의를 마저 보여야 할 것이다. 존재의 구성을 3으로 파악한 그 지혜는 실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북핵에서 보여진 일부의 유감을 냉정하게 바라보며, 단군신화를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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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대부분 21일로 번역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으로 보아진다. 100일은 모두 찬, 완전한 날의 의미가 강하고, 三七日은 그 단위가 되는 수와 절차의 뜻이 강하다. 즉 완전한 날의 채움을 그 차례와 수순에 맞게 행하기 위해 세부적으로 다시 해석해준다는 쪽으로 보아야 바람직 할 것이다. 즉 100일=三七日의 의미가 된다. 민간 신앙에서 3과 7은 삼간다는 뜻도 있고, 불교에서 7이란 하나의 단위기간이라는 뜻을 가진다. 구체적인 三七日의 상징성에 대한 논의는 여기서 생략한다.

2) “삼국유사”, ‘기이편’ 고조선 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