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누리1) 가을 축제
타오르는 단풍나무 에 노랗게, 빨갛게 가을이 물든다. 팔월 한가위가 푸른 여름을 추억하며 보름달로 둥실 뜬다. 풍요의 계절이다. 천고마비의 세월이다. 춤사위가 약동하고 하늘색이 짙어지니 내 또한 나서 자란 그 고향을 추억한다. 나의 누리다. 우리의 누리다. 만주 그 땅이다.
“두리두리 잼잼”2), 맑은 목소리와 엄마의 미소가 생각난다. 소시 적 말을 배울 때 내 정녕 엄마의 그 눈빛, 엄마의 그 손길을 그대로 배웠었다. 그리고 동구 밖에서부터 동이 터올 무렵, 해마다 가을의 축제가 찾아왔다. “두리두리 잼잼”, 내가 했던 이 말과 같은 또래 친구들의 말은 그렇게도 똑 같았다. 엄마의 등에 업혀, 어깨너머로 바라본 학교 운동장에서 동네의 축제는 어김없이 그렇게 찾아왔다. 한가위 가을 축제였다...
널뛰기와 그네, 남자축구와 여자축구, 100m 달리기, 물동이 이기, 씨름과 씨름을 구경하던 황소의 투레질..
시집갔던 옆집누나와 의젓한 앞집 형님, 근엄한 할아버지와 정 많은 할머니, 코흘리개 동생과 재잘재잘 뒷집 계집애, 색동저고리의 아름답고 아름답던 마을 누나들..
모닥불이 피어오르면 하루가 저녁을 향한다. 동그랗게 모닥불을 에워싸고 춤판이 흐르고 흐른다. 하늘로 치솟던 춤사위, 땅을 농락하던 춤사위, 호탕한 웃음과 구성진 노래소리, 남자와 여자, 어린애와 늙은이, 앞집과 뒷집, 그래서 어우러지는 우리 모두의 남녀노소..
엉키고 갈라지고, 솟다가 가라앉으며 춤판은 계속된다. 흘러간 노랫가락, 흘러간 추억, 못 다한 부름과 끝내 다시 올 메아리, 그러다가 마침내 할아버지의 막걸리 한잔에 달이 노랗게 뜬다. 할머니 흰 저고리에 이슬이 하얗게 내린다. 밤은 자정을 향하고 술판은 익을 대로 익어 가을의 향기가 물큰하다. 한가위 그 밤은 기어이 식을 줄을 모른다.
“동이는 거의 모두 토착민으로서,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기를 좋아한다.”3)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니 이를 무천이라 한다.”4)
옛 선조에 대한 중국史書의 기록이다. 동이라 일컬어지던 무리에 대한 중국인의 눈길이다. 그리고도 세월은 계속되고 계속되었으며 마침내 한 갈래가 만주에 터를 잡았다. 이름 하여 조선족이었다.
延邊에서, 黑龍江에서, 遼寧에서 한가위는 계속 되었다. 말달리던 만주벌, 거기에는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우리가 있었다. 해마다 축제는 되풀이되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간다. 봄이 고드름을 녹일 때, 우리는 또 다른 한해를 반갑게 맞이했다.
광복도 지나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도 지나고, 3년 재해도 지나고, 문화대혁명도 지나고, 개혁개방이 되어 문은 끝내 열렸다. 서울의 한 복판에서, 경기도의 한 끝에서, 부산의 해변에서 우리는 익숙한 억양과 만난다. 우리 조선족, 조선족 동포들이다.
연길 중심광장에서, 심양 서탑에서, 하얼빈 송화강변에서, 내몽고 사막에서, 북경 왕징에서, 상하이 홍구 체육관에서 해마다 보름달이 떴다. 가을의 초연함과 겸허를 딛고 달이 떠오른다. 춤사위와 장고 채로 한가위를 휘감는다. 어깨춤의 절주에 맞춰 막걸리 한잔 목을 축인다.
상고로 거슬러 가다나면, 옛 선조의 춤사위가 거기에 있었다. 동이의 무리요, 예맥의 무리다. 조선족의 선조요, 한민족의 선조다. 부르다 내가 죽을 그 질긴 이름이다. 큰 활을 어깨에 지고 드넓은 벌판에서 말을 달리던 민족, 동쪽에 자리 잡아 東夷族5) 으로 이름 된다.
그 누리, 한 누리에서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에도 있다. 선조들이 그랬고 우리가 그랬다. 흰옷의 너울춤과 막걸리의 전설이 있다. 풍요의 여신과 성스러운 하늘님이 있었다. 하늘의 신과 땅의 자궁은 인간을 잉태하고 인간을 살찌웠다. 우리조상은 즐거움을 그토록 못 잊어 기어이 가을을 흥건하게 달궜다.
붉은 단풍이요, 노란 단풍이다. 푸른 하늘이요, 푸른 동해바다였다. 올해도 한가위는 어김없이 온다.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렇게 온다. 가을이 익을 때, 우리 정녕 만나야만 할 것이다. 그날에 내 하늘을 우러러 둥근 달을 바라볼 터이다. 그대와 나, 동이족의 이름으로 한반도를 달궈야 할 운명이다. 동포의 이름으로 한 무리가 될 운명이다. 한반도 이 땅에 가을이 찾아오면, 한 누리 만주에도 가을이 찾아온다. 한반도 이 땅에 춤사위가 있으면 만주의 그 땅에도 춤사위가 있다. 그래서 한 누리 가을 축제가 된다.
나서 자란 고향, 마음의 고향에 정을 주며 오늘을 눅잦히니 뚫긴 하늘과 뚫린 가슴을 무엇으로 감히 채울소냐?
동이족이 있는 곳에 춤과 노래와 술이 있다. 그리고 한가위가 있다. 한가위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한 누리 족속의 것이다. 춤사위와 막걸리, 두둥실 대보름 달과 달빛, 한민족은 이것으로 눈물겹고 이것으로 웃음 짓는다.
올해 한가위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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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은, 한국철학에서 주요하게 2가지 의미를 나타낸다. 완전한 하나라서 “한”, 모든 것을 두루 합쳐 전부의 의미로서 “한”이다. “누리”는 세상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2) 두리두리는 집단을 의미한다. 모든 것, 우리, 무리의 의미이다. 잼잼은 개인, 자아, 스스로를 의미한다. 따라서 “두리두리 잼잼”은 우리 모두이면서도 개인인 나의 의미를 동시에 포괄한 뜻이 된다.
3) “後漢書” 85, ‘東夷列傳’ 제75, “東夷率皆土著 喜飮酒歌舞”
4) “三國志” ‘魏書’ 濊傳의 “常用十月節祭天 晝夜飮酒歌舞 名之爲舞天”
5)동이족은 동녘 東, 큰활 夷(大 + 弓)의 족속으로서, 풀이하자면 큰 활을 지니고 대지를 누비는 동녘의 족속이라는 의미이다. 일부에서 해석하는 오랑캐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