玉龍雪山, 야크 등에 앉아서
유금호
시골 마을에도 서너 집 중 한 집은 중국관광을 다녀왔을 정도로 중국은 가까운 나라가 되었다. 베이징에 도착해서 천안문과 만리장성.... 그리고 상하이....그 다음 옌벤으로 해서 만주 쪽과 백두산, 혹은 씨안과 양쯔강, 계림...그러다가 더 나아가 둔황의 명사산(鳴沙山)과 월야천(月夜泉)....눈 쌓인 텐샨산맥.... 대개 그런 순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중국 방문 회수가 많아질수록 한족이외에도 55개 소수민족이 사는 중국 땅이 참 넓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그 중에도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시켜줄 수 있는 곳이 중국 남쪽 변방의 운남성(雲南省)이 아닐까 싶다.
오색 구름이 머물러 있는 곳이라는 의미의 채운남현(彩雲南現)에서 유래한 지명, 운남 (雲南). 4,000만 인구 중, 3분의 1이상이 25개 소수민족. 산 하나를 넘으면 다른 종족, 다음 산을 하나 넘으면 전혀 다른 복색과 습관을 가진 또 다른 종족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남만(南蠻) 토벌에 얽힌 맹획의 칠종칠금(七從七襟) 고사가 유래한 땅이 운남이다.
사람 머리를 잘라 제사를 지내야 건널 수 있다는 강 앞에서 밀가루로 사람 머리 형상의 만두를 빚어 제사를 지낸 뒤에야 공명 역시 강을 건널 수 있었다는 곳. 그 후 만두가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는 전설의 땅은 위도 상으로 적도에 가깝지만 좁고 깊은 협곡들에 고도가 높아, 4계절이 공존하고, 험한 지세 때문에 현재도 정확한 인구 조사 역시 불가능하다고 한다.
사실 직접 밟아 본 전체 땅의 94%가 산지였다.
히말라야 산맥 끝자락에 있는 옥룡설산(玉龍雪山)은 만년설과 운무에 가려 있는데도, 산 아래, 들판 유채 밭은 끝없는 초록색으로 덮였고, 계곡 아래에는 매화가 만개해 있어 나그네는 잠시 계절에 대한 혼란이 온다.
백색을 숭상하는 바이(白)족 자치구 다리(大理)에 도착했을 때는 상당히 추웠다. 현관에 나그네를 위해 숯불을 피워놓았고, 쓰고, 맵고, 단, 석 잔의 차를 연달아 마셔야하는 그곳 특유의 삼도차(三道茶)를 끓여 마시고 있는데, 한국식 4계절의 상식을 비웃듯 창 밖 벚나무들은 이미 꽃을 떨구고, 앙징스러운 버찌들을 달고 있었다.
그곳 소수민족 중 제일 많은 수효의 이(彛)족은 거대한 바위의 숲, 석림(石林)을 중심으로 해서, 종족의 인구 62%인 420여 만 명이 그 운남성 안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검정색을 기본으로, 원색 겉옷에 은방울 장식 달린 모자를 쓴 이족의 젊은 여인들은 석림의 잔디밭 곳곳에서 무도회를 벌리고, 깔깔대며 방문객들을 자기들 춤판에 끌어들일 만큼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바이(白)족, 나시(納西)족, 한니(哈尼)족, 티베트족, 만주족, 후이(回)족, 몽고족, 수이(水)족......, 2만 여명밖에 안되지만 운남과 사천의 변경지대에 살고 있는 모서우족은 1대1의 결혼생활 같은 건 염두에도 없이 모계사회 전통 속에 현재도 여자가 제 마음에 드는 남성을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선택하는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다.
운남성 내에만 11여만 명이 살고 있는 장(藏)족으로도 불리는 티베트족 역시 알려진 대로 1처 다부제의 가족제도. 주로 북부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그들은 가꿀 수 있는 척박한 농지마저 너무 적어 아들이 셋이건, 넷이건 며느리를 한 사람씩만 얻기 때문에 시집을 가는 여자는 모든 형제의 아내 노릇을 해야 되는 것이다.
국내에서 운남행 직항 비행기 편이 없어 이틀에 한 번 꼴로 운항하는 아시아나 편으로 광쪼우(廣州)에 도착해서 중국 국내선을 갈아타고 운남 성도인 꾼밍(昆明)으로 향했다.
꾼밍의 하늘은 우리 어린 시절의 시골 하늘처럼 청명하고 높았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자 다들 이상하게 눈이 아프기 시작했다.
여행에서 눈이 아프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다시 하루를 지나면서 다른 일행 역시 비슷한 증세가 왔다가 회복된 것을 알고 나서야 그곳이 해발 2,000의 고지대인 것이 생각났다.
꾼밍에서 멀지 않은 돌의 숲, 석림(石林)까지의 좁은 협곡을 지나는 낭떠러지 산길에서는 몇 번이고 아찔한 현기로 눈을 감곤 했다.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들이 이 좁은 산길들로 연결되어 있다는 설명을 들으며 수십 길 낭떠러지 곁을 시속 40k로 빠져나가면서, 옛 제갈공명이나, 쿠빌라이 군대들의 진격이 어려웠을 것이라는 상상을 했다. 하도 험한 지형이어서 무협지의 허황한 과장법이 용서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돌무더기의 수풀이라는 석림(石林)에서는 눈부시게 화려한 그곳 이족들의 의상에 눈을 돌릴 사이도 없이 장대한 바위들의 울울한 장관에 숨이 막혔다. 바다 속 지각변동으로 융기, 수억 년 풍화작용 속에서 단단한 석질만 남아 돌의 숲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지질학적 설명을 들으면서도, 평평한 초원 위에 빌딩 같은 돌들이 이상한 모습으로 그렇게 솟아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협지나, 서유기 속의 지형 묘사들이 가능할 것 같은 생각이 실제 드는 거였다. 그 돌산 사이를 그곳 이(彛)족 여인들이 기념품을 팔면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초원 한 쪽에서는 그들의 전통 무도를 보여주기도 했다.
다시 꾼밍으로 돌아 왔다가 이튿날 작은 국내선 비행기로 대리석으로 유명한 다리(大理)공항으로 떠났던 새벽은 바람이 심했다. 그곳 날씨는 예고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험준한 협곡 위의 하늘에서 흔들려대던 두 시간 여의 기체에서 몇 번인가 이국의 산악지대에 뼈 가루가 흩어져 가는 환상이 왔다.
장자(莊子)가 죽음 앞에서 자기 시신을 산마루에 버려두라고 제자들에게 했다는 고사가 떠올라 오던 시간이었다. 일본에서 비행기 추락사고 때 일본인들은 몇 자씩 유서를 써서 남겼다던 보도까지 생각나서 나도 유서를 쓴다면 무슨 말을 쓸 수 있을지도 생각했다.
'별로 억울할 것도 없는 삶이었다.'
흰 눈을 상징한다는 흰색 바탕에 바람과, 달, 꽃을 상징하는 화려한 장식의 모자와 흰색 위에 빨강 색 조끼를 곁들여 입는 그곳 다리(大理)의 바이(白)족 여인들 복장은 눈에 뜨이게 아름다웠다.
눈 쌓인 4,000m의 창산(蒼山)을 서북쪽에 두고, 그들은 동남쪽으로 길이 41k의 호수를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는지 귀를 닮은 바다라는 뜻으로 에르아이해(耳海)라고 불렀다.
1월인데도 새파란 채소로 뒤덮인 들판에서 여인들이 나이에 관계없이 등 뒤에 광주리 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땔감 같은 것을 수집하는 것이 눈에 들어 왔다. 부지런하고 미소가 흔한 바이족 젊은 여인들은 흰색을 주조로 한 그들 복장에 어울려 운남의 소수민족 중 제일 미인으로 보였다. 그들 인구는 140여 만명.
재미있는 것은 바로 이웃한 리지앙(麗江)의 검은 옷을 입는 나시(納西)족과는 절대로 혼인을 않는다고 했다.
옛날 몽골의 쿠빌라이가 리지앙에서 진을 치고 기회를 엿보다가, 그곳 나시족 도움으로, 대리국(大理國)이 멸망했던 1253년의 원한을 아직도 씻어낼 수 없어서라고 한다. 그 때,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족은 12명, 모두 옌벤 출신이었다.
그들은 순수한 나그네로의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다고 서툰 이북식 사투리로 우리를 반겨 주었다.
맑고 청량한 공기와 창산의 위용, 거기 서북쪽 창산 기슭에 세워진 흰색의 세 개의 탑은 제일 높은 것이 70m, 작은 두 탑은 42m인데 세워진지 200년이 지났어도 시내 어디에서나 그 위용이 드러나 보였다. 당나라 시절 장안에서 기술자가 와서 세운 것이라 하는데 젊은이들 데이트 장소로, 봄이면 수 천 마리의 나비 떼가 모여드는 사랑의 전설들이 깃들여 있는 나비 연못(胡蝶泉)과 더불어 다리의 상징물 역할을 하고 있었다.
최종 목표지역인 만년설 덮인 옥룡설산(玉龍雪山).
검은 옷을 기본으로 흰 띄를 앞쪽으로 X로 묶은 나시족 여인들의 복장은 바이족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리지앙(麗江)을 중심으로 독특한 상형문자인 동바(東巴)문자를 지금껏 지키고 있는 자존심 강한 종족이었다.
항상 운무에 휘감겨 있는 설산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행운이 있다는 전설을 들은 쿠빌라이가 설산 아래 진을 치고 한 달을 기다리고 나서야, 어느 날 맑은 하늘 아래, 산의 위용을 제대로 모습을 볼 수 있어, 그 날 군사를 끌고 다리국을 점령하러 갔다는 설산이 우리에게는 1월의 청명한 하늘 아래 5,596m의 제 알몸을 처음부터 드러내 보여 주었다.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조선족 청년의 도움으로 그 만년설의 중반에 있는 원시림의 분지까지 올라 갈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설산은 나시족만이 아니라, 다른 소수 민족 사이에서도 성스러운 산으로 받아들여지는 모양이었다. 그 산 중턱에서 생각지도 않게 여러 종족의 소수 집단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 원시림의 분지에서 설산의 만년설을 올려다보며 나이 많은 나시족 샤먼들과 손을 잡고 통하지 않은 언어로 미래를 빌면서, 한 순간 언젠가 그곳을 지나쳐 간 듯한 기묘한 미망에 잠시 젖기까지 했었다.
적도와 제일 가까운 그 만년설 산자락을 내려오다가 4,000m 고지에서만 산다는 야크 떼를 몰고 오는 한 가족을 만났었다.
담배 한 대로 주인과 우의부터 다지고 나서, 주인 남자의 옷과 꿩 깃털 모자를 잠시 빌려, 설산을 배경으로 몇 장의 기념 촬영을 했다.
내가 탄 야크 고삐를 자기 아내가 잡고 곧장 떠날 듯한 자세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도 남편은 야크들에 신경을 쓰느라 우리를 처다 보지도 않았다. 한국산 담배 한 갑을 주인 손에 쥐어 주었더니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부부는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 나를 보내주었다.
설산의 만년설이 녹아 흰 돌이 깔린 계곡을 흘러내려 작은 강을 이루고 있었다.
이름하여 백수하(白水河).
젊은 남녀가 결혼을 약속하면 이 물에 와서 각각 몸을 씻는다고 했다. 살을 애이듯 차가운 물에 손을 씻으며, 억겁의 윤회, 내가 언젠가 다시 태어나 이곳에서 온 몸을 씻어보는 상상을 하다가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잠시 귓불을 붉혔다.
설산의 물은 리지앙 고성(古城)안까지 맑게 흘러 들어가 주민들의 식수로, 생활용수로 현재도 사용되고 있었다.
리지앙 고성 안의 골목골목을 헤매고 다니다가 작은 찻집 유리문 앞에서 태극기를 발견했던 기쁨이란...... 중국인과 10여 년 전, 결혼한 젊은 한국인 여주인은 화들짝 반가워했다.. 그들 사랑이야기는 훗날 내 소설의 한 부분이 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곳 동바박물관에는 동바의 독특한 문화제도의 하나로 아직 종족의 정신적 지도자인 동바(東巴)가 있어, 모든 제의(祭儀)를 지금도 주관한다고 한다. 나시족 모두에게 가장 존경받는다는 고령의 동바 지도자, 화학문(和學文)옹에게서 평소 생활신조로 간직하고 있는 '逐鹿者不顧兎' 여섯 글자를 그들의 독특한 상형문자로 직접 받을 수 있었던 것도 행복이었다.
나시족 동바의 수장인 80객의 화학문(和學文)옹이 나를 위해 써준 그들만의 독특한 동바문자로 쓰인 좌우명은 내 서재에 걸려 있으면서 때때로 나를 꿈꾸게 할 것이다.
그 그림글자를 보고 있노라면 먼 훗날에도 옥룡설산, 만년설이 녹아 흰 돌만 깔린 그 성스러운 백수하(白水河), 흘러내리는 계곡 한쪽에 입었던 옷을 훨훨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그 시린 물에 잠겨보는 꿈도, 4,000m이상의 고산에서만 산다는 야크의 등에 그 날 오후처럼 꿩 털 장식의 털모자를 쓰고 거드름을 피우며 정말로 설산을 향하는 꿈도 꾸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여정은 우리를 늘 꿈꾸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