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15세기 전의 고구려 후예들이 있는가?

2006-09-15     동북아신문 기자

중국에서 15세기 초의 조선인 후예들이 발견
중국정부를 놀래 운 박씨촌

   80년대 후반기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에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상소문이 올라왔다. 그 상소문의 주인은 중국 하북성 청룡현 박장자촌의 사람들이었다. 상소문의 내용인즉 “자기들의 진실한 민족의 성분(정체성)을 밝히고 시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자신들은 중국의 한족(주체민족)이나 만족이 아니라 옛 한국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어디서 얻었는지 박씨들의 족보책까지 내 들었는데 거기에 따르면 이들은 이미 중국에서 15-16대를 살아 왔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만 하여도 중국에서는 옛날 한국에서 이주하여온 한국인(현 조선족)의 역사를 130여 년으로  밖엔 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박씨촌 사람들의 족보에 따르면 그 보다 썩 전인 370여 년으로 거슬려 올라간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 한국말을 모른다. 중국식 옷을 입고 맵고 기름기 있는 중국 음식을 즐기며 다른 풍속 습관도 중국 본토 사람들과 똑 같다.
어찌된 일인가?


    56개의 다민족 국가로 형성된 중국정부로서는 이것이 소흘히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정부 국무원에서는 인구조사소조와 국가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연합으로 공동조사에 착수하였다.


 몇 차례의 조사를 거쳐 끝내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그들의 이민 역사는 이러했다.
1600년 초에 중국 동북쪽에서 후금이 신흥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그때 중국의 대권을 잡고있던 명나라를 크게 위협하였다.


후금은 (후에 청나라로 국호를 바꿈) 명나라와의 생사 대결에 앞서, 그때 명나라의 편에선 속국이나 다름없었던 조선을 먼저 쳐서 뒤에 후환을 없애려고 하였다. 그래서  일어난 한반도에 대한 침략전쟁이 1627년의 “정묘호란”이였고 2번째 일어난 침략 전쟁이 1636년의 “병자호란”이었다. 전쟁이 시작되자  무능한 황제인 인조는 피할 수 없어 500여명의 신하들을 이끌고 청군에 항복하였다. 그리고는 “청나라와 함께 명나라 징벌(정복)에 적극 지원 할 것”을 항복 문서에 써넣었다.

그리하여 그때 많은 한인들이 청나라에 끌려가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청나라의 팔기군 (八旗軍)에 편입되거나 노예로 전락되었다. 이 과정에 요행 몸값을 바치고 풀려난 조선인 숫자만도 63만 여 명이라고 한다.  중국 군에 편입된 많은 한인들은 그때 무차별한 전쟁에서 목숨을 잃고 피를 흘렸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이름을 날린 한인들도 있었다. 예 하면 한인 무관 이사충(李思忠)은 1644년 팔기군을 거느리고 동관, 양주를 함락시키고 양자강 이남의 10개 주를 평정하여 후에 지방의 최고 군사 장관인 섬서제독으로 임명되었다. 그 외에도 수도위수최고장관으로 있은 호군통령인 한걸은(韓杰殷), 부도통 궁전내무대신으로 있은 상명 (常明), 유명한 사고전서 2,891권을 편찬한 김간(金簡), 부총재 총관내무대신으로 있은 의주사람 세속(世續), 등 많은 한인들이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점차 역사 시대가 지나 면서 강력한 봉건 독재 통치와 민족 차별정책을 펴던 청조에 의하여 많은 한인들이 민족의 족적(族籍)을 감추고 아예 만족이나 한족으로 행세를 할 수밖엔 없었다.

 이로부터 점차 한민족들은 집단 동화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것이 중국역사에서 한민족의 두 번째 동화이다. (첫 번째 동화가 AD668년을 전후하여 옛 고구려와 발해국이 한조나 당조에 예속 되면서의 동화였다)

 한인들은 점차 자기의 언어 문자 및 풍속습관을 잃고 중국 땅에서 한족과 만족화로 되어갔다. 이와 같은 역사의 사실이 밝혀지자 중국 정부에서는 “민족성분(成分)을 회복하거나 고치는 처리 원칙”에 관한 “통지”문을 하달하고 박씨촌 주민들을 중국의 조선족이라고 족적을 고치었다.

그 외에도 족적을 고친 원 한국인 주민들로는 료년성 개현 박가구촌과 료년성 본계현 박보촌에 살고있던 옛 한국인 주민들이었다. 이들이 중국 땅에 정착한 역사는 이미 370여 년을 기록하고 있다.  

민족의 역사를 밝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오랜 역사가 흐른 후 민족의 일들을 보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동북아뉴스/                        (후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