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하던 조선족아가씨의 인생역전기
십년 전 나의 키는 1미터 62, 체중은 46키로,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말 많이 들었던 나는 내노라고 자처하는 오만한 공주였다. 나에게는 세 살 아래 친구같이 예쁜 여동생이 있고 젊은 아빠 엄마가 계신다. 밝은 아파트에서 우리 네 식구는 근심걱정 모르고 행복하게 살았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회계사로 출근했다. 20세 넘어서부터 따르는 남학생이 많았고 청혼이 문턱에 불붙을 지경이라고 할까. 그러나 세상에 경치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 어데 있으랴. 대학생, 살림집에 회사도 좋지만 남자의 키가 작다. 아니면 인물체격 좋은 남자면 직업이 별로였다. 이런 저런 조건만 따지고 퇴짜를 놓으니 어느덧 스물다섯 성숙한 아가씨 줄에 서게 되었다.
1994년 이른 봄, 북경에 가서 출근하는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얘, 넓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자유롭게 날아보아라. 봉급도 두 배는 된단다.”
친구의 횡설수설에 나는 마음에 동했다. 더구나 돈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빠 엄마의 만류도 마다하고 가출을 했다.
40만 인구가 살고 있는 내 고향 작은 성시를 떠나 중국 수도 북경에 갔다. 북경에 도착한 3일 후, 외국의 어느 화백 개인전이 있었다. 나는 통역을 맡았다. 한 주일 간 출근했는데 내 고향에서의 두 달 봉급을 받았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난 북경에 뿌리 내릴 거야!” 하고 다짐하면서 잘나가는 회사를 찾아 안정된 생활을 할 것을 결심했다.
서울에서 북경주재 ‘고려식품회사’에 가서 면접을 받았다. 합격이었다. 나는 사무실에서 타자도 하고 사장님들의 시중을 들면서 번역을 하였다. 처음 접하는 사회생활은 젊은 내 가슴을 설레게 하였다. 가슴 뿌듯해 나기도 했다.
이때 내 생활에 한 남자가 뛰어 들었다. 서울에서 온 빵 기술자였는데 스물아홉에 키는 1미터 74, 흰 얼굴에 살짝 미소 지을 때 희고 가쯘한 이빨은 어딘가 여자처럼 귀엽게 보이는 남자였다. 퇴근시간에 사무실로 뛰어와 데이트 하자 한다. 몇 번 거절했더니 친구하고 내가 살고 있는 하숙집까지 가만히 따른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장대같이 퍼붓는 비를 만나 나는 된 감기에 걸려 출근을 할 수 없었다.
좋은 챤스를 만났다고 병문안 핑계로 꽃이며 과일을 사들고 뻔질나게 다녔다. 인연이 맺어지니 우리는 그냥 친구로 사귀자고 했다.
어느 날 그는 그렇듯 은근하고 근사한 피자집에 나를 초대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보는 피자가 세상 별 맛이었다. 오, 한국 사람들은 호화롭고 풍요롭게 사는가 보다. 예전에 나는 한국 남자한테 절대 시집 안 간다고 친구들한테 선언했었다. 한국 사회의 단점만 꼬집던 나였으니까. 그런데 쫄깃쫄깃한 피자의 별미에 한국남자한테 미련을 갖게 될 줄이야! 그 맛좋은 피자가 그만 사랑의 밧줄로 내 마음을 꽁꽁 묶어버렸던 것이다.
1995년 2월 구정 때 나의 부모님은 그이를 초대해서 친척, 친구들한테 약혼식이라고 공개하였다. 내 친구들은 10억이 넘는 중국에서도 이렇게 멋진 신랑감 찾기 힘들 것이라고 부러워했다. 나도 예전에 이런저런 내걸던 약혼조건을 가맣게 잊고 사랑에 푹 빠지었다.
몇 개월 후 나의 신랑은 결혼 수속하려고 입국했다. 갈라진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신랑은 매일 전화를 넣어와 사랑의 불을 뿜어댔었다. “집 장만하고 모든 가정 제품 다 갖추어 놓았으니 자기가 오면 된다구! 보고 싶어 죽을 것만 같아!”
1995년 10월,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김포공항에 내렸다.
공한의 넓은 청사 눈길 닿는 구석마다 깨끗하고 윤택했었다. 직원들의 옷차림도 정갈했고 얼굴마다 밝고 깔끔하고 친절하고 예의바르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어디를 보아도 우리 글 우리 민족의 말에서 오랜만에 찾아온 친정집 같은 편한 느낌을 받았다. 입국수속을 하던 공무원아가씨가 밝은 미소로 이렇게 반겨주었다. “아가씨, 목포총각 땡 잡았네요.”
전남 광주로 가는데 네 시간이 걸렸다. 황홀한 한국의 밤거리, 대낮같이 밝은 오색불빛 속에 연인들과 가족들이 행복한 얼굴로 거리를 누비며 밤 생활을 한가롭게 즐기고 있다.
우리는 광주에 사는 그이 형네 집에 잠간 들리었다. 서양식으로 지은 아담한 주택 앞에서 차가 멎었다. 검은 색 철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내 가슴은 부러움과 감탄으로 떨리었다. 내 신랑 형들은 다 부자였구나! 그런데 웬걸, 정면 출입문을 외면하고 다들 옆으로 삐어 들어가는 것이었다. 세집에 단칸방이었다. 너무 실망이었다.
다시 차타고 가서 내린 곳은 목포 청계천이었다. 개천처럼 생긴 골짜기에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였다. 신혼집으로 마련한 단칸방에 들어서니 밤 12시었다. 뭐, 가정 제품 다 갖춰놓고 기다려요? 전기 밥 가마 하나 달랑 있을 뿐이었다. 선진국에 왔다는 장밋빛 꿈과 미련을 갖고 왔던 내 마음의 담장은 와그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았었다.
엄마와 나의 두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만 줄줄 흘러내렸다. 실망과 후회의 눈물이라 할까. 부모님 슬하에서 곱게 커온 나, 오늘 예서부터 원치 않은 오미자 맛 인생이 시작되는구나!
그래도 죄송한 마음도 생기게 되었다. 머나먼 중국에서 색시지참금도 없이 결혼 기념품 외에는 마음 하나 몸 하나 달랑 왔는데 시어머님과 7남매의 도움으로 가정 제품 다 갖추고 결혼식도 치러주셨다.
그래도 아담한 세집에서 몇 개월 신혼생활은 꿈같이 흘러갔다. 몇 개월 후 나는 임신하였다. 신랑은 대학공부 했다지만 직업은 빵 만드는 아저씨, 고작 백만 원이다. 월세 방에서 살고 있는 상황인데 아기를 어떻게 키울까? 걱정과 기쁨이 엇갈리고 있는데 더 큰 문제가 생겼다.
나의 신랑은 4남3매 중 셋째 아들, 유독 혼자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달마다 11조를 바친 지도 어언 20년은 된단다. 수입의 10%를 20년 바친 그 돈!… 생각만 해도 화나고 아쉬웠다. 나는 11조 바치는 그 돈 때문에 빈정거릴 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시어머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술 먹고 담배 피우면 그 돈 만큼은 까진다고 생각해라.”
사실 옳은 말씀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마음에 와 닿는 신안은 하나도 없다.
큰 문제란 내 신랑이 다니는 교회에서 새집을 짓는데 기부금 300만원을 바치겠다고 한다. “적금에도 없는 돈 어떻게 내냐? 도둑질 하랴 강도질 하랴?” 나는 열이 나서 소리 질렀다.
신랑은 강경하게 나왔다. “돈은 빌려서 내고 갚으면 돼!”
너무 어처구니없다. 1996년 그 당시 삼백만원이면 내 고향에선 집 한 채 살 수 있었다.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생각 끝에 시어머님께 고자질했다.
대노한 시어머님은 시숙님들을 앞세우고 오셔서 다짜고짜 물건을 주어 싣고 전남 광주시로 이사했다. 저녁에야 어머님은 내 신랑에게 이렇게 전화로 호통을 쳤다. “오늘저녁 퇴근할 집은 광주이니 얼른 와!”
때는 2월 구정이었는데 신랑은 목포에서, 나는 새색시였건만 혼자 짝이 없이 시집에서 서러운 명절을 보냈던 것이다. 목포, 광주에서 서로 버티기를 했는데 고마운 하느님께서도 가정이 먼저 화목하기를 바란다고 하셨단다.
광주에서 시어머님이 마련해 주신 전세방으로 살았는데 급하게 이사했기 때문에 재래식 부엌이었다. 중국이 가난하다지만 이런 주방은 난생 처음이었다.
밤이면 쥐가 와서 살림을 한다. 무엇이든 갉아먹었다. 낮에도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눈만 팬들거렸다. 행주가 떵떵 얼어 손 시리고 발이 시렸다. 너무도 짜증이 나면 고생스럽다고 신랑에게 투정질도 많이 했다. 출입문과 부엌문은 얼마나 높은지 아장아장 걸음마 타는 귀여운 아들애는 몇 번이나 굴러 떨어져 이마에 혹을 만든다. 그 집에서 몇 년 살고 또 이사 했는데 남쪽에만 출입문과 창문이 있었던 집이다. 겨울에는 따스했다. 그런데 웬걸 여름에는 바람 한 점 들어올 수 없어 찜통 같은 무더위로 살 수가 없다.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을 천정으로 삼고 살점 뜯기는 고역을 당하기도 했다.
명절이 돌아오면 고향생각 간절하다. 구정 때 시댁에 가면 7남매에 집집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씩 대 가정 오구작작 모이니 힘 부치기도 했다. 그래도 즐거워 나기도 했다.
이튿날이면 모두 친정으로 시댁으로 떠나는데 유독 나만 친정으로 갈 수 없어 뒤치닥거리기만 한다. 너무 서럽다. 내가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맛있는 음식 먹을 때 부모생각, 출산을 앞두고 내가 가장 수요할 때의 엄마생각, 시집일 야속할 때 신랑과 다투고 몹시 미워질 때 심신이 너무 지칠 때 친정에 가서 하소연 하고 싶은데 현실은 외롭고 슬퍼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새삼스레 고향생각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는 신세계 아니면 롯데백화점에 간다. 예쁜 옷 너무 많고 사 입고 싶은 마음 불같지만 내 지갑에는 만 원짜리 몇 장만 있다. 가구점에 옷장 식탁 예쁜 그릇 갖고 싶은 건 많은 데 눈에는 풍년이지만 살수 없는 상황 서글퍼 돌아서야 했다.
아, 돈 없이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대한민국! 한가로워 보이던 저 사람들, 피와 땀으로 억척스레 일하는 국민이었구나! 나도 돈을 열심히 벌어보자. 그제 날 멋쟁이었던 나는 옷을 되는대로 걸치고 다녔다. 예쁜 옷 입은 들 칭찬과 부러운 눈빛을 던져주는 친구도 없는데 또 초라한들 흉보는 친구도 없지 않는가? 오로지 조금씩 불어나는 적금에 나는 골몰했다. 아동 옷 가게를 하는 서울누님이 10여년 아들애의 옷을 챙겨주신다. 참 고마우신 분이다. 경우가 밝으신 우리 시어머님도 힘들게 농사지으신 쌀을 해마다 대주신다. 시골에서 오실 때 마다 야채를 등에 지고 오셔서 이집 저집 아들마다 골고루 나누어 주신다. 맨주먹에 살림을 꾸려가는 중국 며느리가 보기 안타까워 더 많은 관심 보이신다. 어머님 참 고맙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컴퓨터 만드는 공장에 몇 년 출근하고 공공근로에 출근하고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컴퓨터 자격증을 따고 차 면허증을 따고 영어공부도 했다. 공부도 하고 부지런히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빵가게를 시작했다. 돌이 지난 둘째 딸애를 키우면서 3년 세월 온종일 신랑이 구워 낸 빵을 포장하고 팔아야 하고 배달도 해야 했다. 여름에는 삼복철 더위에 뜨거운 빵 가마 앞에서 일할 때는 얼굴마저 빵처럼 익어버린다. 추위를 잘 타는 나는 기나긴 겨울밤 12시까지 빵을 팔아야 하는데 추워서 오돌 오돌 떨면서 몸을 옹송거리니 그 예쁘던 체격도 다 망가져 버렸다. 구정과 추석 1년 두 번 휴식이다. 나의 직성에 맞지 않는 직업이라고 몸과 마음 지치면 신랑하고 많이 싸우기도 하고 앙탈도 썼다. 사실은 고마운 시어머님이 1년 반, 친정엄마가 1년 반 씩 가무일과 애들을 돌봐 주셨기에 내가 많이 편했던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2005년 5월, 이렇게 아글타글 모은 돈으로 딱 10년 만에 32평짜리 아파트를 마련하였다. 셋방살이 여섯 번 종지부를 찍었다.
밝고 넓은 내 집 궁전 같은 내 집,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거실의 넓은 공간 뒹굴어도 보았다. 공연히 이 칸 저 칸 문 열고 서성거린다. 가슴이 미여질듯 행복하다.
빵가게에서 일하면서 마음은 어서 빨리 궁궐 같은 내 집에 가고 싶었다. 부족한 것 있으면 분투하고 목표를 이루고 보니 온 세상을 다 차지한 것처럼 행복하였다.
친정엄마께서 나에게 충고하셨다. “ 니가 어린애 키우면서 맞벌이 한다고 신랑 앞에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부구간의 변함없는 사랑은 가족의 안녕과 행복의 받침돌이란다. 이제부터 가족을 위하여 화단을 가꾸듯이 물도 주고 거름도 주고 잡초도 부지런히 뽑아주면서 부부사랑을 가꾸어 가야 한단다.”
옳은 말씀이다. 사랑하는 내 신랑도 때 이르게 흰 머리카락 수두룩하다. 내가 많이 속 썩였는지 미안한 마음으로 사과하면서 앞으로 더 많은 사랑으로 보답하겠다. 나도 이젠 걸어온 10년 세월 어떻게 살았나, 뒤돌아볼 여유가 있었기에 이 글을 쓰고 싶었는가 보다. 여유가 있으니 차분하게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나는 며칠 전 빵가게에 사표를 냈다. 나대신 시누님이 일하신다. 이제 나는 내 고향에서 배운 재능을 펼쳐야 하겠다. 중국어 가르쳐 달라는 부탁들이 많다. 지금 학습지도를 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오미자 맛 인생길’, 걸어온 10년보다 가야할 길 아직 멀고멀다. 앞으로 더 열심히, 아니 이젠 새롭게 나만을 위함이 아닌 값진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광주, 전은하
조영희 대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