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우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서신 내용은 이러합니다 .
…저의 동네는 지금까지도 한국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습니다. 한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재입국이라는 바람, 한 번도 못가 본 사람들은 이 바람에 밀려 서로가 한국을 간다며 수속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지방도시인데다가 변두리이다 보니 딱히 할 일이 없는 것도 한국행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하나의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으로 재입국할 때까지 집에서 놀다가 때가 되면 한국으로 갈 것입니다. 저는 지금 아버님과 두 식구가 살고 있는데 밀항으로 한국에 가 계신 어머님이 너무도 걱정되고 마음에 걸립니다. 그런데 어머님이 귀국을 하여야 제가 재입국할 수 있습니다. 눈이 안 좋으신 아버님을 혼자 계시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머님이 중국으로 귀국을 하지 않으면 제가 한국으로 재입국한 뒤 어머님을 강제로 귀국길에 올릴까 합니다.…
저는 무남독녀로 자랐고, 부모님은 1989년부터 북경에서 김치장사를 하였습니다. 약 1년간 장사를 하다가 한국바람이 불어 장사를 접고 고향으로 돌아와 한국수속을 시작하였지만 아버님이 인민폐 2만원을 사기당한 후 정신을 차리고 농사일만 열심히 하여 1년에 인민폐로 3만원씩을 벌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바람에 미련을 버리지 못 한 아버님은 1997년에 인민폐 12만원을 들여 한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아버님이 입국한 그 해에 IMF가 터지었다는 데 있습니다. 취직이 어려웠음은 물론 일한 임금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빌린 돈에 이자만 눈덩이처럼 늘어나게 되었지요. 가족 모두가 이 빚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절박한 일념으로 어머님은 1999년에 목숨을 건 밀항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어머니는 단동으로 가서 도적 배를 탔습니다. 7일을 바다에 떠 있었다나요, 약속된 한국배가 오지 않아 애를 태우던 중 북한경비정을 보고 선장이 급히 뱃머리를 돌리는 일도 있었답니다. 80여명이 컨테이너와 같은 좁은 배 안에서 밖을 나갈 수도 없는데다 배 멀미가 겹쳐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음식은 이틀에 한 번씩 겨우 죽을 먹는 정도였기에 몸 상태는 실신직전이었습니다. 출항 8일 만에 어렵게 한국 배를 갈아타고 어렵게 한국 땅을 밟았지만 한국의 흙냄새도 맡기 전에 잡혀서 1개월간 부산경찰서에 조사받은 후 아쉬움만 가득 남긴 채 중국으로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중국으로 되돌아 온 어머님은 단동에서 14일간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되었고, 인민폐로 6.500원의 벌금을 내고 나서야 집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2개월 동안 몸을 추수 린 어머님은 저 몰래 2차로 밀항을 시도하였습니다.
어느 하루 어머님이 저한테 전화를 걸어왔었습니다. 일 때문에 잠시 단동으로 왔는데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단동이라는 말에 저는 신경이 곤두섰고, 초조하고 불안해 나기도 하였지만 연락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우려대로 어머님은 또 밀항을 시도하였는데 출항 2일 만에 태풍 때문에 회항하였습니다. 저는 어머님이 도둑 배를 탔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빚 꾼들이 저의 집으로 하나 둘 모여오기 시작했고, 빌린 돈에 이자까지 붙어 인민폐 14만원으로 늘어났습니다. 다급해진 어머님은 또다시 도둑 배를 타기로 결심하고 저에게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세 번째 밀항을 하였습니다. 일단목적지에 도착한 후 돈을 주기로 하였기에 부담은 없었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님은 세 번 도전하여 밀항에 성공하였습니다. 세 번의 시도로 바다에서 13일, 총 7개월간의 육(陸), 해(海)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2000년 6월 27일, 한국에 도착한 어머님은 아버지와 상봉을 하게 되었고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건설현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형틀목수일, 어머님은 방수 일을 하여 약 6년간의 땀과 노력으로 위안 20만원에 가까운 거금을 다 갚았습니다. 2004년 9월 9일, 저가 한국으로 입국해서 저의 가족은 6년 만에 이산(離散)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저도 요식업이며 생산직이며 닥치는 대로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빚을 다 갚고 난 아버지가 마음 놓아서인지 운이 다해서인지 알 수 없지만, 2005년 2월 11일 불법체류 합동단속에 걸릴 줄 어찌 알았겠습니까?
화성외국인 보호소에서 27일 간의 휴가를 보낸 뒤 같은 해 3월 7일 중국으로 ‘귀국’하였습니다.
2005년 동포 ‘자진귀국 프로그램’이 실시되자 저는 어머님에게 귀국할 것을 종용했지만 어머님은 거절했습니다. “정신 나갔니? 목숨을 내놓고 밀항해서 이제 겨우 빚을 갚았는데 확실하지도 않은 정책을 믿고 귀국하라니?”
저는 어머님의 걱정과 우려를 충분히 이해하게 되어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재입국을 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띄었고, 2006년 4월에 ‘자진귀국 프로그램’이 또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는 저도 불법체류신분이기에 어머님에게 함께 귀국하여 1년을 푹 쉰 다음 재입국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님은 또 기막힌 처방을 내렸습니다.
“참 좋은 정책이다. 정말로 출국했다가 재입국하고 싶구나! 그러나 내 나이 예순 하나인데 여자 몸으로 현장 일을 하다 보니 거의 성한 곳 없이 골병들었다. 일을 그만두고 니 말대로 귀국을 한다면 재입국을 하기 전에 쓰러져 남은 인생을 누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네 아버지한테는 미안한 일이나 어쩔 수가 없구나! 1년이라도 더 벌어 갈게. 이러다 잡히면 집으로 갈 거다. 그러니 니라도 귀국해서 아버지를 돌봐야 한다.…”
어머님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그렇게 젊고 예쁘고 활달하던 어머님이었는데?…저는 더 이상 종용할 수 없었습니다.
중국에 홀로 계시는 아버님을 돌봐드려야 했기에 저는 재입국 희망을 안고 2006년 5월3일 혼자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산가족이 되었습니다. 난 어머님한테 정말 묻고 싶습니다. “어머니, 우린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요?…”
참을 사랑하는 '世界 속의 朝鮮族 멀티미디어'/동북아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