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5:30, 전철과 함께
위하여, 의하여
알람에 의하여 깨어났다. 어둠에 젖은 새벽이다. 정확하게 다섯 시다. 출근 시간 전 사내 중국어 강의를 위하여 나설 준비가 시작된다. 하루는 이렇게 열렸다.
전철역이다. 다섯시 반에 플랫폼 앞으로 다가선다. 형광판에 글씨가 새겨진다. 자주 보아서 머릿속에 이미 새겨졌다.
- 국민 수입 2만달러 시대를 위하여, 한미 FTA는 반드시 추진되어야 합니다..
- 국민의 안전을 위하여, 간첩 신고전화는 국번 없이 111로..
전철이 홈에 들어선다. 지하철이라고도 한다. 전기로 가는 것이어서 전철이라 함이요, 지하로 다닌다고 지하철로 부르는 것이겠다. 부르기 위하여 이름 지었고, 근거에 의하여 이름 되었다.
동포의 아침이다. 좌석에는 우리 동포, 더 정확하게는 중국동포로 반갑다. 누구도 서로 반갑다는 소리를 해본적은 없는 듯하지만 그렇게 소리 없이 많이도 전철 안에 모였다. 옷차림과 행동거지, 그리고 함경도 억양, 간혹 들려오는 중국말로 알아본다. 아침 그 시간에, 동포로 빼곡한 전철 안 풍경이 서울에서는 약간 이채롭다.
돈을 위하여,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하여, 잘 벌어 돌아가기 위하여, 자식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그리고 또 표현이 잘 안되는 많은 것을 위하여, 하다못해 퇴근 후 피곤해진 심신을 추스르기 위하여, 그래서 술잔을 들고 마저 외쳐보는 그냥 “위하여..”
시대의 흐름에 의하여, 개혁개방에 의하여, 해외진출 붐에 의하여, 친구의 수속에 의하여,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어쩌다가 습관 된 그날그날의 관성에 의하여, 하다못해 아침 알람의 자지러진 소리에 의하여, 그래서 버릇처럼 외워보는 그냥 “의하여..”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원래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전철 안에서는 아는 사람들을 더구나 보기 힘들다. 안면이 없다고들 말한다. 정말로 본적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라고 하면 되겠다.
그래도 매일 그 시각, 그 곳에서 그 전철을 기다리고, 그 전철에 앉아 똑 같은 곳을 지나간다. 무심코 한번 보고, 무심코 며칠 후 또 한번 본다. 이제는 많이 보아 안다고 할 수 있겠다. 50대 바싹 마른 아저씨, 40대 여유 있는 몸매의 아줌마, 30대 나.. 이런 사람들이 거의 비슷한 시각에 항상 똑 같은 번호를 매긴 차량에 앉는다. 어느 역에서 누가 오르는 것 쯤은 이미 익히 알고 있다. 졸고 있다가 옆에서 간혹 보이고, 신문보다 앞쪽에서 우연히 본다. 그래서 안다고 한다. 그래도 정말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사람을 보면 분명 아는데, 또 정작 얘기해보라면 아는 것이라고는 없다.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말하기가 난처하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사람이라는 그럴싸한 표현, 그것으로는 모자라다. 나는 보고 보았다고 할 뿐이다.
가끔은 저들끼리 안다는 표현을 한다. 전철 문을 들어서 자리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반가운 표정이 되고, 즐거운 인사가 오가고, 중국어가 나오고 함경도 억양이 나온다. 자질구레한 얘기들도 많다. 중국에 대한 얘기, 한국에 대한 얘기, 김사장 얘기, 박여사 얘기, 연변 얘기, 흑룡강 얘기, 집에 둔 자식 얘기, 술주정뱅이 남편 얘기..
내 청각도 섬세해져 억양의 작은 차이에도 민감하다. 억양이나 톤이나 말소리 흐름의 강약에 따라 어느 동네 출신인지를 얼추 헤아린다. 서울말과 버무린 것, 경상도와 반죽된 억양, 중국어 단어를 직역한 우리말, 잡다스러운 것들로 말의 색깔이 어우러져 묘하게 그가 그답고, 그녀가 그녀답게 소리가 각각 다르다.
나는 무심하다. 그들을 모르기 때문이다. 눈은 감고, 고개는 아래로 떨군다. 그래도 귀는 열려 소리를 듣고, 기분은 좋아져 웃음이 솟는다. 그러다 피곤하면 그만 정말로 졸음이 엉키고, 환청과 꿈이 몽롱해 오감이 잠잠하다. 꿈꾸는 아침 현실이다.
가지는 것, 남기는 것
무료신문이 있다. 이제는 종류도 많다. 전철입구에 비치된 것을 아침마다 한부씩 뽑아 쥔다. 세계정세에서부터 시작하여 연예계 뒷소리, 스포츠 소식, 만화를 거쳐 오늘의 운세, “오빠, 외로워요, 연락주세요. 24시간 항시 대기”의 강렬한 문구에 요염한 그림도 제법 많이 붙어있다.
졸지 않으면 무료신문 보는 것, 고작 이러한 것으로는 많이 모자라다. 핸드폰을 들고 게임도 하고 문자도 날린다. 그래도 시간이 더 있으면 신문을 다시 집어 든다. 이제는 다른 종류의 것들은 각각 하나씩 뽑아들고 전철에 오른다.
다보고 위쪽에 던져둔다. 가져갈 것도 없다. 손에 쥐고 건사하기에는 불편하다. 던져두면 앞쪽에서 마주보던 친구가 또 집어 든다. 그러기를 몇 번 하고, 신문은 위쪽에 아무렇게나 구겨진다. 누구나 그 속에서 무엇을 가져 머릿속에 두었는지 각각 나름대로 일 것이다.
이번에는 진짜로 신문 자체를 가져가는 분들이 있다. 지긋한 나이에 커다란 자루, 등반 위 신문은 그분에게 종이다. 신문은 소식으로 그냥 좋고, 종이는 무게로 그냥 좋다. 차곡차곡 쌓이면 무게만큼 화폐다. 그래서 전철을 내릴 쯤, 종착역이 다가올 때 등반 위는 항상 깨끗하다.
아침 여행객은 이런저런 얘깃거리를 가졌고,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신문의 종이를 가졌다. 나는 그 신문으로 정보가 될만 한 것을 나름대로 남겼고, 그분들은 신문의 무게로 인한 생계유지비를 남겼다. 그렇게 무료신문은 매일 배포 되는가 부다.
가는 길, 오는 길
가는 길은 약간 상기된다. 아침에 강의해야 할 것들, 제 시간에 들어가야 할 일 때문에 차라리 조금은 긴장되는 편이 낫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몸에 이롭다. 동포의 눈빛에서, 동포의 억양에서, 동포의 몸자세에서 같은 것을 느낀다. 할 일이 있다. 그래서 아침에 출발하는 것이 틀림없다.
가는 길에 눈앞에 할 일을 먼저 생각한다. 이상과 미래는 당분간 미룬다. 10년 대계보다는 바로 해야 할 일이 더 요긴하다. 교과서는 제대로 넣어두었는지, 테입은 갈아 끼웠는지, 문법은 정확하고 쉽게 전달 가능할 정도로 익혀두었는지, 자잘한 것들로 제법 치밀하게 한 번씩 생각해본다.
배낭을 이고 있는 자, 핸드백을 들고 있는 자, 생각하는 듯 한 자, 쉴 새 없이 전화하는 자, 무덤덤하고 무표정하게 밖을 바라보는 자,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자, 화장을 고치는 자, 몸이 불편한지 기침을 끊임없이 하는 자, 그것을 생각하느라 약간 부질없는 내같은 자..
아침을 시작하여 각자 자기 할 것에 골몰한다. 가는 길은, 가서 할 일을 준비하는 것으로 그렇게 펼쳐진다.
오는 길이다. 옷차림도 많이 다르게, 아침 갈 때보다는 훨씬 많은 인파가 밀려들어온다. 세련된 것은 사실 보기에 좋다. 피부색이 건강하면 보는 눈길도 훨씬 부드럽다. 향수 내음에 푸근하고 젊은이들이 보다 많아 산뜻하다. 역시 동포다. 대한민국 동포다. 중국동포는 눈에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다들 출근길을 재촉하는 중이다. 나는, 중국어 강의에 있어서만은 퇴근길이다.
오는 길에는 심신이 게을러진다. 제법 거창한 것도 생각한다. 여유가 생기는 시간이다. 집에 가서 한잠 자야지, 그 생각 하나로 즐거울 수 있다는데 만족한다. 조선족이라는, 추상적이면서 실제적인 무리의 어제와 오늘, 내일까지도 생각해본다. 남북도 생각한다. 해외동포도 그려본다. 눈앞의 토착민들도 그대로 바라본다.
그래서 오는 길이다.
지금까지, 이제부터
지금까지 그래왔다. 중국어 강의를 하는 그 아르바이트를 말한다. 이제는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다는 것과 이제는 하지 않는 것 사이의 차이는 실로 엄청나다. 어쩌다 이제는 못하게 되었다.
이번 달에는 소비를 줄여야겠다. 이미 정든 학생, 아니, 중국어를 배우는데 있어서 만의 학생신분이었던 그 친구들과는 아마 한동안 연락할 명분이 따로 없을 듯하다. 우리는 이미 정들었는데, 그래서 즐거웠는데, 그리고 더 재미있게 더 오래 지낼 수 있는데, 그래도 중국어를 배우는 일이 아니면 내가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니, 그건 좀 울적한 일이다.
지금까지 여기에 있었는데, 다시 들어가다니, “자진출국 동포에 대한 단상”이라는 어느 신문의 기사 내용도 머릿속에 떠오른다. 무슨 감정으로 출국, 아니, 귀국을 했을 런지 내 고작 중국어 강의를 그만두면서 상상하는 것이 가당치도 않을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생각에 울적해진다. 나는, 중국어 강의 시간을 “자진하지 않고 출국”했으니, 기회가 닿으면, 인연이 맺어지면 다시 할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다.
가는 것도, 오는 것도 그래서 양쪽 다 아쉽다. 서운하다. 가고 싶으면 가는 것, 오고 싶으면 오는 것, 가고 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가면서 웃고 오면서 웃는 얼굴, 중국동포로 반갑고 토박이여서 친근한 것, 그런 것을 말하려다 내가 이상주의자로 된다. 그래도 좋다.
이상주의자는 낭만주의자다. 낭만주의자는 낙관주의자다. 낙관주의자는 의미 있는 자다. 의미 있는 자는 의미를 가치로 만든다. 만든 가치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당분간 아침 5:30 전철을 탈 길이 따로 없다. 내가 그 전철을 타지 않아도 그 전철에는 내가 지금까지 보아오면서 모른다고도, 안다고도 하지 못할 정든 사람들로 북적일 것이다.
졸고 있는 자, 신문 보는 자, 기침하는 자, 50대 아저씨, 40대 아줌마..
아침 5:30, 그 전철을 기억한다.
전유재(全宥再, Quan YouZai)연변과학기술대학 생물화공학과 학사. 상명대 정보통신대학원-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STEPI) 협동과정 기술경영학과 석사졸업. 현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 석사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