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에서 보내는 네 번째 편지

2006-09-04     동북아신문 기자
북극에서 보내는 네 번째 편지

스칸디나 반도의 맨 꼭대기, 사람이 거주하는 육지의 마지막 끝자락에 NORTH CAPE의 작은 항구 Honnigsvag가 있다.
NY-Alsund에서 배는 더 이상 얼음에 막혀 북진하지 못하고, 육지의 끝을 찾아 방향을 바꾸어 위도를 내려온다.
여전히 일출과 일몰이 없이 해는 머리 위에서 빙글거리며 원을 그리면서 돈다.
NY-Alsund 섬에서 잠깐 기적처럼 그렇게 하늘이 맑더니, 섬을 떠나 밤을 지내고, 다시 하루 종일, 그리고 또 밤의 시간을 지나는 동안도 계속 흐리다.
가끔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하는 수평선만 보이는 수묵화 같은 공간에 갇혀 버린 느낌이다.
희부연한 공간에 농담(濃淡)이라는 말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바다와 하늘이 맞붙어 있는 긴 시간의 바다 위는 시간이나 공간을 구별지을 수조차 없다.
바람 거센 배의 14층 난간에 기대서서 여러 잔 커피를 마시다가 선실의 발코니에 혼자 앉아서 팩 소주 마개를 딴다.
순간 순간 이러한 공간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도 모호하게 뒤섞여 버릴 것 같은 느낌이 오곤 한다.

만 이틀을 달려 가까워진 Honnigsvag 는 원래 빙하에 덮여 있었던 영구 동토의 땅.
지구 온난화와 함께 조금씩 모습을 들어낸 검은 갈색의 황막한 육지의 끝자락.

북위 71도 10분 21초.
노르웨이 식 표기로 NORD KAPP.
가파른 경사의 검은 산과 계곡이 짙은 안개 속에서 조금씩 형체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빙하가 녹고, 얼음조각들이 바다로 떨어져 나가면서 드러난 암울한 갈색의 바위와 절벽의 공간에 이끼 종류의 지표 식물이 얼룩얼룩 무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나무로 지은 집들이 위태롭게 경사지에 서 있고, 집 뒤켠으로 울타리처럼 눈사태 방지를 위한 방책이 세 겹, 네 겹으로 세워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부두에 내려 흙을 밟자 배에서 바라보던 풍경과는 다르게 아담한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거리 곳곳에 크고 작은 못생긴 트롤(Troll) 요정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자주 눈에 들어 온다.
머리는 벗어지고, 코끼리 코에 배가 튀어나온 난쟁이 요정들 중에는 머리가 두 개씩 붙은 놈들도 있는데 노르웨이를 상징하는 요정이라고 한다.
이 놈들은 원래 숲의 어둠 속에서 사는데 햇빛이 없는 이 북구에서 해의 존재를 잊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날 잘못 햇빛에 몸이 노출되면 그 자리에서 돌이 되어 버린다고 한다.
이곳 바위들은 해를 피하지 못한 그 요정들의 시체라는 것.

항구에서 버스로 땅 끝, North Cape를 향해 움직여 갔다.
재미있는 것은 이 버스에는 고장의 역사나 풍물을 소개해주는 가이드가 없는 사실이었다.
텅 빈 공간, 생명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이 황막함을 직접 각자가 느끼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주에 대한 공상 영화를 찍는다면 더 없이 좋을 것 같은 풍경들만 계속된다.
줄곧 안개에 쌓인 계곡과 검은 빛 갈색의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달리는 동안 인간의 문명이 시작되기 이전의 까마득한 세월 저편 속에 던져진 듯한 기분이 자주 들었다.
그렇게 버스가 달리는 동안 신기한 것은 그 죽음 같은 적막의 땅 곳곳에 이끼류의 생명이 확인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러다가 눈이 녹아 흐르는 작은 계곡 곁에서 아, 몇 마리 야생 순록의 모습을 보았다. 쌓인 눈을 발굽으로 헤쳐가며 눈 속의 이끼류를 뜯어먹던 순록의 모습을 직접 확인한 것이었다.
끈질긴 생명력 앞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North Cape로 이동해 가는 동안 그 황막한 땅에 인공의 울타리와 그 울타리 안에 임시로 지은 듯한 집이 한 채 보였다.
여인네 한 사람이 잠시 마당에 나와 있는가 하더니 집 안으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순록을 기르는 가족인가 싶었다. 그들도 여름 한철 이곳에 머물었다가 해가 없어지는 겨울이면 순록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을까, 혼자 상상했다.

안개에 쌓인 절벽 끝에서 차를 멈추었다.
North Cape의 조형물이 천길 절벽 끝에 서 있었다.

거센 바람 속, 안개에 가려진 절벽 아래에서는 세상을 삼킬 듯한 거친 파도소리만 들려 온다.
1912년 '세인트 안나호'의 비극을 다시 떠올린다. 그 무렵은 내가 서 있는 절벽도 어름에 덮여 있었고, 움직일 수 없었던 그들이 타고 있던 배가 바로 내 발 밑 어느 지점에 있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밤낮도 구별 안 되는 희부연 어둠,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얼음 위에서 20개월을 꼼짝할 수도 없이 갇혀 있던 사람들의 절망의 무게.
먹을 것이 오래 전 떨어져 버렸고, 운이 좋은 날 빙판 위에 나타난 바다사자나 백곰을 쏘아 잡아, 문짝이며 마룻장을 뜯어 불을 피워 고기를 익히면서 견디어 내었을 그 극한 상황 속에서 뱃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륙의 몇 나라 소년들이 1988년 이곳에 모여 서로를 이해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세웠다는 둥그런 일곱 개의 조형물이 텅 빈 벌판에 우주 기지 안테나같이 서 있다.

탄자니아의 Jasmine, 브라질의 Rafael, 일본의 Ayumi, 태국의 Sithidei, 이태리의 Gloria, 러시아의 Anton, 미국의 Louice.....둥근 조형물들 앞에 엄마와 멀리 한쪽을 가리키는 소년이 손을 잡고 서 있는 조각품이 서 있다.
조각가 'Eva Rybakken'의 조각품 'Mother and Child'라고 한다.

텅 빈 죽음의 땅, 안개가 품어주는 습도로 그 삭막한 검은 자갈 사이에 푸른 얼룩을 만드는 이끼류 사이에서 신기하게 자잘한 분홍빛 꽃이 보였다.
서울에서 '꽃잔디'라고 들었던 꽃을 닮은 지름 2-3mm정도 작은 꽃이 몇 군데 피어 있어 그 영구 동토에도 생명이 살고 있다는 것을 항변하듯 했다.
뾰쪽한 돌을 찾아 이끼 같은 그 작은 꽃무더기를 뿌리째 뜯어 금속 과자용기에 담아 왔지만 사흘이 지나더니 꽃 색깔이 바래고 시들어 버렸다.

매년 1월 12일에는 이곳에서는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두 달 동안 해가 뜨지 않는 캄캄한 밤만 계속되다가 아주 잠깐 처음 태양이 나타나는 날을 기념하는 것이라 한다.
그렇게 긴 시간 태양을 볼 수 없는 땅이 많다보니 어둠 속에서 사는 '트롤' 요정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라는 짐작이 된다.

오후에는 부두로 나와 한적한 거리를 걸어다녔다.
두꺼운 겨울옷의 주민들이 더러 눈에 보였지만 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행인들이나 작은 가게의 주인들의 체격들이 바이킹의 후예답게 늘씬늘씬하게 크다.
노르웨이에서 질 좋은 석유가 발견되고, 국민소득 4만 불의 경제부국이 되지 않았어도 현재 이 땅에 사람들이 거주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리의 모퉁이를 돌자 야생 모피를 취급하는 작은 가게가 나왔다.
백곰 가죽, 물개 가죽, 순록 가죽....나이 든 가게 여주인의 모습이 백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몽골리안 계통의 키 작은 주인 아주머니가 순록의 뿔과 발톱에 작은 글씨를 새기고 있었다.
honningsvag...North Cape....기념으로 작은 순록의 뿔 조각 한 개를 샀다.
백인들이 이 척박한 땅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순록을 기르며 살았던 원주민의 후예인 듯 싶었다.

갈매기 몇 마리가 배 주변을 맴돌아서 빵 조각을 던져주며 한 참을 어울렸다.
육지나 섬이 없던 바다에서는 보이지 않던 갈매기들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