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하늘 아래 뜻을 모아 함께 살아간다’

‘동천호조회(同天互助會)’의 뜻 깊은 하루 일기

2006-08-24     동북아신문 기자

 8월 20일 이른 아침, 버스 한 대가 구로에서 강원도 정선을 향해 출발하였다. 버스에는 37명의 남녀(어린이 셋 포함)가 타고 있었다. 거의가 사오십 대의 중장년들, 그러니 한중 수교이전에 입국한 동포들이다. 나도 이들 친목회 결성내속을 알고 싶어 동행하였다.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은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역사적인 대사급 수교를 하였다. 그 후 두 나라는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면서 세계무대에서 동반자관계를 확립하였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꼬박 만 14년 세월이 흘렀다. 양국 간의 상호왕래 인수도 연간 천만인 시대에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도 이 사회의 뒷면에는 아직도 자유왕래를 할 수 없어, 남반도에서 15여년 묶이어 살면서 부모처자들이 살고 있는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우리 동포들이 살고 있었다. 바로‘동천호조회’의 성원들이 그중 일부이다. 

태풍의 북상영향으로 날씨가 흐려있었지만 어디론가 떠난다는 설레임 때문인지 동포들의 얼굴은 밝아보였고 관광버스의 멜로디도 신나게 울렸다. 전해덕 회장과 김광복, 명금자 부회장들이 회원가족들을 돌보느라 애쓰고 있었다. 

나는 전 회장한테 친목회를‘동천호조회’라고 명명한 이유를 물었다. 호조회가 서로 돕는 친목회란 뜻에 반해, 한문으로‘同天’이라 함은 같은 하늘에 뜻을 모아 살자는 것이 아닐까, 평등과 자유, 민주와 권리를 쟁취하기 서로 도우며 살자는? 전 회장은 웃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우리가 이 땅에 정착하는데 어려움이 많으니 서로 도우면서 살자는 취지하에 세운 친목회일 뿐이라고!
   
이날 우리는 버스로 가는데 3.5시간, 귀가에 4.5시간해서 꼬박 8시간 허비했다. 관광비용도 아껴 쓸라 시간도 쪼개 쓸라, 몇날며칠씩 휴가 시원히 낼 수 있는 여유가 없어 보여 좀은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정오 가까이에 정선 화암동굴에 도착해서 구경하고 나오니 오후 한시, 대충 비빔밥을 먹으면서 동포들은 서로 농을 주고받았다. 내 눈에는 3살, 5살, 6살 난 애들이 밟혀왔다. 그 중 한 애는 부모들이 불법체류를 하고 있다 보니 무국적(無國籍)상태이고, 한 애는 중국 할머니네 집에서 자라고 있는데 부모한테 놀러왔으며, 다른 한 애는 어머니를 따라 국적을 올렸지만 아버지는 불법체류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직 국적도 호적도 없는 애를 보는 내 마음은 갑자기 서글퍼났다. 이건 도대체 어느 시대이 이야기란 말인가?   

식사를 끝내자 버스는 정선의 명물 레알바이크 타는 곳으로 이동했다. 시간 타이밍이 맞지 않아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일행은 다시‘삼거리 쉼터’로 가서 준비해온 간촐한 술상을 벌리었다. 사내들은 술이 들어가자 속을 터놓기 시작했다. 자유왕래 할 수 없던 지난시절에 대해 한탄으로 말꼭지를 뗐다. 자기네도 15여년 씩, 이 땅에서 앉은 석동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기 어려워했다.
마흔일곱에 풍을 맞아 치료중인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다.
“뭐, 그러고 싶어 그랬겠어요? 어엉부엉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관건은 돈(화페가치) 때문입니다. 중국 가서 벌 생각을 하다보면 눌러앉아 버리게 되는 거지요.”
모두가 중구난방이다.
“듣자니, 내 친구들은 중국에서도 잘 나가고 있다 합니다. 내가 왜서 허구 많은 세월을 이  곳에서 이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정작 돌아가자면 발이 떨어지지 않을게 아닌가?”
“그래 말이요, 다른 나라에서 살았다면 이래 오래 견딜 수 있었을까?”
“피가 같잖아요? 조상이 살았던 나라, 나의 부모님이 태어난 곳, 그러니 타향 같지가 않지! 나이 들고 보니 그래도 뿌리는 뿌리란 생각이 듭니다. 이제 역으로 귀국해서 살라하면 내가 정말 그곳 환경과 정서에 맞춰 살아갈 수 있을까? 신심이 안 생깁니다.…”
“십오여 년 동안, 깨질 것은 깨지었고 맞춰질 것은 맞춰졌고 잃을 것은 잃었고, 이제 터전을 잡기 시작했지만 골병들고 가슴에 멍들고 나이 먹고 힘 빠진 인생들입니다. 누가 우리의 아픈 인생 알아주겠습니까? 아직도 혼자 사는 이들이 있어요!…”       

나는 가슴이 찡해 났다. 뭔가 이루려고 애를 써왔어도 너무나 많은 아쉬움이 남아있고, 아직도 이방인으로 남아 생활의 어려움과 고통을 무마하면서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아닌가! 근년에, 외국인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구현한다고 법무부가 노력하고 있다지만 세계 어느 선진국도 외국인을 이토록 오랜 시간 방치해 두는 나라가 없다 한다. 하물며 한 핏줄을 타고 난 동포들이 아닌가! 법무부는 하루속히 그들 문제를 해결해 주어야 할 것이다. 사실 그들 가운데 친인척이 있는 동포 상당수가 서울조선족교회의 도움으로 소송을 해서 국적취득을 하였다고 한다. 친인척이 없는 분들이 문제되고 있었다.

귀가하는 길에 버스운전수가 노래방기계를 틀어놓자 몇몇 동포들은 마이크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내 곁에는 피부과학전문회사에 다니는 이향란씨가 앉게 되었다. 마흔을 갓 넘긴 그녀는 15년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다가 법적 소송을 통해 외국인등록증을 해결하고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홍콩을 거쳐 하얼빈, 심양, 상해를 돌아보고 온 그녀는 감개무량했다. 
“기실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고향에 갈수 있는 거리인데 가지 못하고 15년 눌러있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히더군요. 집에 가면 아빠가 문을 열고 마중 나올 것 같았는데… 호, 아빠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던 해에 돌아가셨는데 주위에서 한동안 알려주지 안더군요.…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했는지? 정말 우리인생이 불공평해요.”
그래도 그녀는 입국해서 직장 다니면서 많이 배웠고 지금도 열심히 살고 있었다.
“형제들도 놀랐겠어요?”내가 물었다.
“글쎄요. 호, 오빠는 나를 보더니‘어, 너 그대로네.’하더군요.”
“허, 그래요? 아마도 몇 년이 아니고 너무나 오래 떨어져 있다 보니 감정이 다 무뎌졌나 봐요. 오랜 세월이라 너무 변했을 거라 상상했었는데…사람 외모는 그리 쉬이 변하지 안거던요. 비록 나이는 자꾸 먹지만은…”
그랬다. 세월은 쉬이 늙지 않는 법, 그래서 그들도 이제껏 어려운 삶을 살면서도 주눅 들지 않고 살아온 것이리라!

버스는 밤 열한 시 가까이 되어서야 서울에 돌아왔다.  그때까지 내 눈에는 무국적 아이의 천진난만한 얼굴과, 그토록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도 술 한 잔으로 마음 달래며 늙어가고 있는 동포들의 모습이 자꾸 밟혀왔다. 이제는 이 사회도 그들에게도 빛을 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뭔가 외치고 싶었다. ‘동천호조회’의 앞날이 정말 기대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