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비는 것만큼 아름답다 (시인 김학송)

2006-08-19     동북아신문 기자

나는 1952년 음력 6월 16일 저녁 6시경, 도문시 화평촌에서 아버지 김기수 씨와 어머니 김국순 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때 우리는 개인집이 따로 없이 아버지가 교장으로 계시는 소학교의 빈 교실에 임시 거처를 잡고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나의 생가였다. 선천적인 약골로 태어난 나는 뼈가 잘 만져지지 않을 정도의 괴짜체질, 두 돌이 지나도록 걸음질도 타지 못했고 심장이 허약해서 우레만 울면 온몸을 덜덜 떨며 앓아야했다. 하다보니 어머니는 늘쌍 나를 업고 문턱이 닳도록 병원에 드나들어야 했다.

옆집의 박할머니는 (참 별일두 다 본당께, 아이가 두 돌 돼도 못 걷다니……)하고 혀를 내둘렀다한다. . 그래도 나는 말썽을 곧잘 일으키는 개구쟁이였다. 어른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가만히 텃밭에 들어가 금방 꽃송이를 터뜨린 오이를 한 움큼 뜯어내는가 하면 익지도 않은 참외를 따서 공삼아 가지고 놀다가 어른들에게 들키어 야단을 맞기도 했다.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 로투구, 금불사, 룡정 등 곳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1963년 전국적으로 성시 인구를 대폭 줄이는 (정간)때 어머니를 따라 고향인-화평촌(지금의 곡수촌)에 돌아와 호구를 붙이었다. 나는 화평소학교에 다니었다. 공부는 꽤나 잘하는 편이였고 특히 작문을 잘 써서 칭찬을 많이 받았다. 내 글이 모범작문이 되어 선생님이 학생들 앞에서 읽을 때면 나는 쑥스러워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만큼 나는 천성이 나약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줄난 학생이었다. 곡수에서의 생활은 어려웠다.

 첫 한해는 10평도 안되는 생산대우사 사양원실에서 여섯 식솔이 붐비며 지냈다. 소의 분변냄새가 코를 찔렀고 밤이면 소들이 싸우고 뒤척이는 소리에 잠을 설칠 때가 많았다. 그때 장남인 내 나이 13세, 그 아래로 학길, 학이란 동생이 있었는데 모두 코흘리개 철부지들이었다. 미구하여 학만이와 인옥이가 태어났다. 입이 둘이나 불어나니 어머니의 부담은 더 커졌다. 아버지는 용정에 계셨는데 한 달에 한번 꼴로 잠깐씩 집에 다녀왔기에 손님이나 다를바 없었다. 집안팎일이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생산대 노동은 기본이고 집수리, 도깨짐승 키! 우기, 화목하기, 터발과 자류지 가꾸기, 모두가 어머니 혼자 섬약한 몸으로 떠메야 했다. 그래서 잔약한 나였지만 가끔 어머니를 도와 나서곤 했다. 어느 해 9월초, 우리 모자는 뒷산에 올라가 비지땀을 쏟아가며 죽기내기로 신고하여 여름에 땔 나무 100여 단을 간신히 해놓았는데 10여일 후에 가보니 누군가 몽땅 도덕질해가고 한 단도 없었다. 그때 빈산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하시던 어머님의 애처로운 표정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1965년 7월, 나는 화평소학교를 졸업하고 도문시 1중에 들어갔다. 그때까지 키가 유난히 작고 약골이었던 나는 (애기)라는 별명을 달고다녔다. 어느 날 등교하는데 학교 호교대의 여학생 몇이 내 앞을 척 막아서며 (얘, 나가라, 조끄만 애들이 여기 와 놀아선 못써!……)하며 축객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나는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었다. 

  초중 2학년 첫 학기에 문화대혁명이 터졌다. 처음엔 삼가촌을 비판하더니 잇달아 전국적인 운동으로 번져 져 학교당지부 장원필서기가 투쟁의 첫 과녁으로 되었다. 뒤이어 교원들에게 대자보가 나붙고 본격적인 파벌 싸움이 시작되었다. 홍위병들은 철갑모를 쓰고 몽둥이를 들고 거리로 쏘다니며 혁명을 하느라 동분서주하였다. 나는 명의상 (12, 9)반란파 조직에 가입했으나 활동에는 소극적이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덧없이 세월만 흘러갔다. 1968년 10월 25일 학교에서 졸업식을 가졌다. 세 개 학급이 동시에 졸업했다. 이름하여 로산제(老三屆)라 부른다.

  나는 고향마을로 돌아왔다. 공부하던 걸상을 둘러메고 12리길을 걸어 힘없이 집에 들어서니 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낙루하셨다. 한창 공부할 나이에 농민이 되어버린 어린 아들을 보는 엄마의 맘이야 오죽했으랴? 그때까지 얼마 자라지 못한 나의 키는 동년배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고 체중은 25킬로그램도 되나마나하였다. 호미 들 변변한 힘도 없었다. 호미를 들기도 힘겨워하는 17살 애숭이 청년이였던 나는 자존심이고 뭐고 팽개치고 집에서 막내 여동생 인옥이를 보는 일을 맡아했다.

여동생을 업고 엄마가 일하는 밭으로 찾아가 젖을 먹이자니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남 보기가 민망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참담한 세월의 연속이었다. 나는 내 처지에 신심을 잃고 점차 소침하고 우울한 성격으로 빠져들었다. 담약하고 소심한 자신이 미워졌고 도무지 기를 펼 수가 없었다. 나는 자신감을 잃고 점차 소침한 성격으로 빠져들어갔다. 생산대에서는 저녁마다 정치운동을 하느라 각종회의를 열었는데 동년배들은 당당하게 제 소리를 내며 피 끓는 젊은이답게 청춘의 열기를 뿜고 있었다. 하지만 오직 나만은 꾸어온 보리자루처! 럼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숨도 크게 못쉬며 침묵했다. 누구도 내 존재를 의식하지 않았다.

 동기동창들인 홍식이, 창준이, 학남이, 춘자, 신애, 영옥이……걔들은 모두가 화려한 사춘기를 자랑하듯 멋도 부리면서 제법 청년의 티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사춘기가 아직 먼 곳에 있었다. 아예 사람 축에 들기도 어려운 판에 어찌 사춘기고 뭐고 할수가 있었으랴?…… 

   체질이 허약한 나에게 생산대에서는 힘이 덜 드는 소몰이를 맡기였다. 그래서 나는 목동이되었고 마침내 오랜 실업에서 해탈될 수 있었다. 나는 개산골에 들어가 소와 동무삼아 세월을 보냈다. 일이 있다는 게 내겐 큰 위안이었다. 조금은 외롭고 적막하긴 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여유로왔다. 인생의 본능적인 환희가 서서히 내 가슴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일년에 한번씩 찾아오는 소들의 발정기는 치열한 사랑전쟁이다. 미친 듯한 정욕을 못 참는 암소가 수소 앞에서 암내를 흘리며 한들거리면 수소들은 이리저리 날치며 뒤쫓아 다닌다. 암소한테 덮치는 수소의 그 진 붉은 연장을 보는 순간 내 가슴에는 야릇한 정서가 물결쳐왔다. 동물의 그 짓을 보며 내 사춘기도 시작되였다. 

   소몰이를 하면서부터 나는 조금씩 키가 자라고 체질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자비감의 수렁에서 조금씩 헤어날 수가 있었고 마음이 개운해져 정치활동에도 참가하기 시작했다. 그 후 청년단에 가입하고 미구하여 단지부조직위원이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집단생활의 정취와 오묘한 정회를 맛보게 되었다. 나는 이때에야 비로소 나에게도 청춘기가 찾아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였다. 시에서 조직한 제1기 통신원학습반에 참가하고 돌아온 후 홍위대대에서는 나에게 홍위간보(등사판) 편집을 맡기였다. 산재부락을 동분서주하며 취재하고 집필하고 편집하느라 피곤할 때도 많았지만 스스로 좋아하는 일이어서 그런지 심정은 마냥 유쾌하기만 했다. 나는 생산대 벼 육모관리원, 과학실험소조조장 등을 맡아하며 과학영농에도 힘을 쏟아 부었다. 온 몸에 흙을 게바른채 신나게 뛰어다녔다. 나는 농민들로부터 부 지런한 청년, 총명한 청년이란 찬사를 받게 되였다. 1975년 5월 1일 나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내가 농민들의 최고의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의 감동은 지금껏 이어져내려오고있다. 

   농촌에 있을 때 내가 몹시 사모한 처녀가 있었다. 우리 마을에 내려온 하향지식청년이었는데 자그마한 키에 영롱한 눈빛을 가진 예쁘장한 여자애였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마음이 확 끌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아무리 보아도 마냥 귀엽기만 했다. 자나 깨나 그녀 생각뿐 이였다. 어떤 모습으로도 그녀는 발랄하고, 상큼하고, 생명감이 철철 넘치는 천사 같은 녀자애였다. 나의 옹근 영혼은 그녀한테 미쳐있었다. 아주 광적인 집착이었다. 헌데 그것은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었다. 그녀는 나의 존재에 별 관심이 없는것 같았다. 못생긴 얼굴에 작은 키, 용기도 자신심도 없고 게다가 장래라곤 꼬물만치도 보이지 않는, 못난강아지 같은 나에게 관심을 가질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헌데 이상했다. 가능성이 없을 줄 번연히 알면서도 그 녀에게 쏠리는 내 집념은 갈수록 더해만 갔다. 일터에서, 회의실에서 길가에서 그녀만 보면 가슴이 활랑 거렸다. 그 어떤 미묘한 정회가 막을 수 없이 밀려들면서 내 온 정신을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아쉽게도 그것은 나 혼자 앓아야 하는 열병이었다. 참으로 지독하고 견디기 어려운 혼자만의 가슴앓이였다. 

   중국의 유명한 여류시인 근효정은 (가장 심각한 사랑은 짝사랑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말의 진실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면에서 우연하게 겪은 나의 광적인 짝사랑 체험은 신의 축복과 다름이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 정신적 사랑의 절정을 체험하게 했다는 점에서, 또한 내 시정(詩情)의 영원한 고향이 되었다는 점에서 너무나 고맙고 소중하게 추억속에 남았다. 

   후에 다행히 그녀와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였다. 함께 공청단 사업을 하고 대대간보를 꾸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생산대 청년단서기였고 나는 그보다 서열이 한 급 낮은 조직위원이였다. 그래도 그녀와 함께 일한다는 자체가 나에겐 큰 다행이고 더없이 즐거운 일이였다. 회의가 끝난 한밤중이면 나는 주동적으로 구실을 만들어 그녀와 미팅을 청했다.온 몸이 화끈 달아오르고 심장이 고동쳤지만 그런 내색은 낼 수 없었다. 나 혼자의 흥분인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청단사업과 원고 쓰는 문제를 에워싸고 자주 의논하고 얼굴을 맞대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났다. 어느 여름밤이다. 5리쯤 떨어진 아랫마을로 취재 갔다돌아오는 길, 단 둘이였다. 휘영청 달이 밝았다. 달빛은 우릴 위해 온 비단을 펼치는 듯 했고 개구리들도 우리의 앞날을 축복하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듯이 느껴졌다. 시적인 정취가 온 누리에 차 넘치는 황홀한 밤이었다. 죽도록 좋아하는 여자와 나란히 걷는 그 설레임이란 아, 이루 말 못할 화려한 감동이었다. 온 몸이 성감대가 되어 처녀의 향기에 전율하며 나는 까무라치듯 취해 있었다. 밤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환상적인 기분이었다. 길이 너무 짧게 느껴진다. 오래오래 걷고 싶었다. 저 하늘 막 끝까지, 그녀와 함께 그냥 한없이 걷고 싶었다. 그녀의 영원한 커플이 되여…… 물도랑이 앞을 막았다. 먼저 건너간 나는 물에 빠지지 않도록 그녀의 손을 잡고 살금 당겨주었다. 그녀도 서슴없이 손을 내밀었다. 첨으로 그녀의 손을 잡아보는 순간이엇다. 전기에라도 닿을 듯 가슴이 찡 해났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야릇한 느낌이 발끝에서 시작하여 몸 전체에로 퍼져나갔다. 최초로 느낀 정시적인 오르가즘이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이 기분인 듯 했다. 후에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장래를 약속했다는 소문을 듣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집까지 찾아간 어리석음까지 저질렀다. 후에 그녀는 헤어 나오기 어려운 복잡한 인간관계의 거미줄에 한을 품은 채 훌쩍 우리 마을을 떠나버렸다. 준비되지 못한 나의 가긍한 풋사랑은 거기서 막을 내려야했다.

  농사일이 무척 힘들었기에 그때 젊은이들은 거개가 농촌을 벗어날 수 있기를 바랬다. 헌데그 길이 외나무다리처럼 좁았다. 군대에 가는 길이 아니면 빈하중농의 추천을 받아 상급하교에 진학하는 길 밖에 달리 길이라곤 없었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래서 노력하고 열심히 버둥질쳤던 게 분명하다. 나에게도 행운이 차려졌다. 1975년 9월, 수많은 경쟁 적수를 물리치고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된 것이다. 추천 받기가 자못 힘들었기에 과거에 급제한 듯이 주변의 반응도 뜨거웠다. 지금의 청화대 가기만큼이나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입학소식을 듣는 순간 나의 머리는 금세 폭발할 듯한 큰 어지럼증을 느꼈다. 

   내가 간 학교는 엉뚱하게도 야금지질학교, 전공은 지질탐사였다. 얼마 안 지나 이 학교가 나의 취향과는 거리가 십만 팔천 리나 떨어진, 별 재미가 없는 학교임을 알아버렸다. 시간마다 돌을 앞에 놓고 침적암이요 화성암이요 무슨 무슨 성분이요 어떤 어떤 광물과 공생하오 하는 따위 시시한 공부였다. 졸업 후의 진로를 알아보니 더구나 한심했다. 고작해야 광산이나 지질대에 분배받게 되는데 일년치고 절반이상 심산에서 외롭게 지질망치를 들고 다녀야 하는 힘든 사업이란다. 나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외로움을 못 견디는 성격이어서 그랬던지 아무튼 그렇게는 살 수 없다는 게 나의 결론이었다. 그래서 전업공부에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나를 조롱하는 듯한 운명이 미워졌다. 그렇다고 별 뾰족한 수도 없는 세월이었다. 늘 학교근처에 있는 남호에 나가 홀로 산책하였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모대기다보니 장춘에서의 학창시절은 근사한 낭만이나 자랑스런 추억도 없이 허무맹랑하게 흘러가 버렸다. 인상 깊은 일이라면 76년 9월 9일 모택동 서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던 그 시각의 아득한 서글픔, 그리고 당산지진소식에 ! 경악하던 일. 그리고 내가 독감에 걸려 누었을 때 최 모모양이 내 빨래를 해주던 일……그리고 고향서 수리전력학교에 온 최춘계가 우리학교에 놀러왔던 일……대충 그런 일뿐이다. 

   장춘시 2년간 학업을 마치고 졸업할 때 나는 무조건 고향 가까이로 가겠다고 탄원했다. 학교 측에서는 내 요구를 받아들여 도문과 가까운 훈춘 소서남차금동광에 배치했다. 새로 건설된 광산이어서 모든 조건이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훈춘에서 150리나 떨어진 원시림 속에자리한 광산엔 이발관도 없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버스가 통하는 말 그래도 꽉 막힌 오지였다. 그것도 거의 전부가 한족뿐이고 조선족은 별반 없었다. 당시의 관례대로 금방 배치 받아 온 학원생들은 본 전업에 종사하기에 앞서 무조건 1년 이상의 막노동이란 시련을 거쳐야 했다. 내게 차례진 일은 기건대, 집짓는 공사장에서 시멘트 나르고 모래나 치는 따위의 허드레 일이였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지자 아픈데도 많아졌다.

1년 쯤 지나서 별 쓸모없다고 판단한 광산 인사처에서는 마침내 내가 도문으로 전근하는데 동의했다. 날듯이 기뻤다. 광산서 일할 때 한 번쯤인가 400미터 지하막장에 내려가 일해 봤는데 온 종일 햇별 한 오리 못 보고 화약 냄새가 맵게 풍기는, 물이 가득 고인 곳에서 허리도 못 펴고 일하는 광부들의 고생을 제눈으로 볼수 있었다. ! 그런 일을 대를 물려가며 한다고 생각하니 측은하기 그지 없었다. 막장에선 인명사고도 자주 발생하는데 한 쪽다리가 떨어져나가는것쯤은 경한 사고였다. 그 때로부터 20년이 지난 98년에 소서남차금동광을 찾아가니 옛 생각이 아련히 떠오르며 눈굽이 젖어들었다. 나를 알아보는 것은 바람과 그곳을 지키고 있는 청산들뿐이었다. 나는 인생의 덧없음을 절감하여 코마루가 시큰해났다. 

   1978년 11월 나는 소서남차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도문시 연주공사, 석유공사 등 단위에서 적사공, 물가원, 보위간사, 공청단서기 등으로 일했다. 그러나 모두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심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늘 마음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허둥거려야했다. 

  차차 속열이 성하며 눈병이 자주 생기고 내 몸은 아예 감기가 지나가는 역전이 돼버렸다. 내 몸과 영혼은 자신만을 위한 더 확실한 자유로운 선택을 수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내 영혼이 바라는 일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깜깜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내 인생에서 맞이한 또 하나의 시련이였다. 하필이면 그 곤혹기에 일생의 최고 중대사인 혼인문제에 부닥쳐 경황도 없이 화급하게 선택했으니 어찌 빗나가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어찌 보면 나의 시상(詩想)이 영글라고 하느님이 준 시련이었는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니 길다면 한없이 길고 짧다면 한없이 짧은 인생에서 별로 해놓은 일이 없이 아깝게 놓쳐버린 내 젊은 날이 눈물겹게 안타깝고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