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나라때 문화재 장백산에서 발견
일전 문물전문가로부터 국가고품급 진품인 《금대균자오호탁복제반》과 동시기 전문적으로 제사에 사용되였던 《쌍어완》이 감정되여 세상에 알려졌다. 이 두가지 보물은 민간전설속의 장백산 《진산지보》로 녀진족들이 천지가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제사도구와 관계가 있어 그 수수께끼가 풀릴것으로 내다 보고 있다.
7월 15일 오래동안 장백산문화연구를 해온 원의와 그의 친구 마약동은 길림성 무송현무송진마록구촌의 장문로인의 집에서 장백산에서 산삼을 캐던 이야기와 사냥이야기를 취재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장백산의 파묻혀있던 한단락 력사사실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족히 력사학계를 놀래울만한것이였다.
올해 76세인 장문로인의 경력은 곡절적이고 여러곳에서 생활하였으며 장백산삼을 캐고 사냥을 할 때 수차 아짜아짜한 고비를 넘겼다. 그는 일생동안 중초약재를 캐서 살아왔는데 장백산의 2천여종의 식물과 몇백종의 약용식물에 대해 손금보듯이 알고 있었다. 그는 1957년에 장백산삼림조사에 참가하였을때 송강하지역에서 실지림지의 축적량조사와 검측도표를 그리면서 한가지 중요한 일을 겪었는데 장백산 《진산지보》에 관계되는 진실한 비밀을 알게 되였다. 아래의 내용은 장문로인의 구술을 간추린 내용이다.
장문로인이 젊었을 때 우연한 기회에 손씨라는 사냥군두목을 알게 되였는데 그한테서 장백산에 소도 아니고 말도 아닌 괴물이 나타나 천지물을 휘저어 사방으로 튕기게 했으며 산사태를 일으켰다는 장백산 이야기를 듣는다. 그후 마안산일대에서 삼림조사를 할때에도 손씨를 만났고 로수하가 물이 불었을때에 세번째로 손씨를 만났다고 한다. 그때 손씨는 병들어 누워있었는데 장문로인이 반달간 그를 치료해주고 산을 내려올때에 십몇원의 돈을 남겨주었다.
장문로인이 떠나려는데 손씨가 그를 붙잡고 두가지 물건을 넘겨주면서 이는 장백산의 진산지보로서 이 보물때문에 사람들한테 추격받아 심산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였다고 한다. 원래 토비였던 손씨는 이 보물때문에 적어도 6~70명이 죽었다고 하면서 절대 누구와도 말을 하지 말것을 부탁하였고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팔아서 잘 살아가라고 하였다는것이다.
장문로인이 자세히 보니 접시모양의 물건에는 큰 《복》자가 씌여있었고 아래에 다섯마리 범이 그려져 있었으며 그 밑에는 받침틀이 있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큰 백색사발이였는데 중간에 두마리 물고기가 그려져 있었다. 손씨는 이는 하늘에 제를 지낼때 쓰던것이라 말해주었단다. 장문로인은 그것을 가지고 산을 내렸는데 후날 생활이 어려워지자 팔아치웠다고 했다.
장문로인의 이야기를 듣고 원의와 마약동은 《금사 세기》기재를 찾아보았다. 기재에 의하면 소조요무때로부터 장백산 제사가 있었는데 금 대정12년에 (기원1172년) 장백산신을 《흥국령응왕》으로 봉했으며 절을 세웠다고 한다. 금 명창4년(기원1193년)에 다시 《개천굉정제》로 책봉하였다. 기원1175년에 장백산제사에 대해 책봉하고 그 규모를 제정하였다. 지금까지 장백산천지가에는 여전히 녀진의 제돌이 있는데 암석을 쌓아만든것으로서 높이가 약 2메터 된다.
장백산에는 제사지내던 곳으로 보이는 유적들이 많다. 발해왕도 장백산을 성산으로 봉하고 매년 년말이면 단을 설치하고 제를 지냈는데 《랍제》라고 하였다. 청조때 강희황제도 《칙봉장백산지신례여오악(장백산신에게 드리는 례는 오악과 같으게 한다는 뜻)》, 《오악보다 높으나 오악과 동등하게 제를 지내라》고 하였다. 기원1682년에 길림송화강반에서 멀리 장백산에 참배하였고 옹정황제는 1733년에 길림소백산에 망제전을 지어 장백산에 제를 지냈으며 건륭황제는 1754년에 길림소백산에 와서 장백산에 제를 지내고 령을 내려 장백산출입을 금지시켰다. 1999년 8월 19일 《장백산신》이라 새겨진녀진문자비가 장백산천지북쪽 약 40메터되는곳에서 발견되였다.
이상의 사료와 장문로인의 진술에 근거하여 원의와 그의 친구 마약동은 수소문끝에 끝내 보물소지인을 찾아내였고 그 사람을 달래여 한번 보게 되였다.
첫번째 물건은 《오호탁복제반》이였는데 장문로인이 말한것과 기본상 일치하였다. 보물소지인이 장춘에 가서 문물감정을 한적이 있는데 밑받침대와 접시의 높이가 19센치메터, 접시직경은 24센치메터라고 하였다. 전문가의 감정은 《금대균자오호탁복제반》이고 년대는 금나라였다. 급별은 국가고품급 진품이고 중간부분에 붉은색장미색으로 복자가 씌여져있고 밑바닥에 다섯마리 범이 그려져 있다.
두번째 물건은 《쌍어완》으로서 사발직경은 25센치메터, 밑굽높이가 8센치메터, 사발아구리 높이가 3.5센치메터였는데 역시 금나라때 만든자기제품으로 제사에 사용되는것이였다.
지금 이것이 정말 900년전 녀진인이 천지가에서 제사를 지낼때 쓰던 제사도구라고 확정할수 있는가? 만약 정말로 이 사실이 성립된다면 얼마나 큰 력사의의를 갖게 되겠는가!
천년에 달하는 력사를 기록하는 이 두가지 보귀한 문물이 세상에 나타난것은 중국정부가 장백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는데 어떤 작용이 있을는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다. 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