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그 존재와 미학
1. 조선족은 누구냐?
진부해 보이지만 고전적인 화두를 던지면서 담론을 시작하기로 한다.
- 조선족은 누구냐?
자못 심각하다. 그리고 추상적이어서 오히려 대답이 궁해 보이기도 하는 질문이다. 그런 질문이 먼저 던져졌다. 이것을 어떤 개념으로 정제하면서 존재로서의 조선족을 겸허히 긍정하고, 정체성으로서의 누구인가를 다시 따지게 되는 수순을 밟게 되며, 조선족들이 자주, 끊임없이 그렇게 해왔다. 이 질문은 조선족이란 존재가 건재하는 한 건재한다. 그리고 존재의 이유를 찾기보다는 존재에 의한 해석을 찾는 쪽으로 접근할 것이다.
좀 더 생활에서 가까워 친근하게 안겨오는 물음을 마저 제기하기로 한다.
- 한국과 중국팀이 축구를 하면, 자네는 어느팀을 응원할 것인가?
난감하다. 서둘러 질문에 답해야 할 처지라면 훨씬 더 난감할 것이다. “자네‘로서의 조선족은 이런 질문에도 답해야 할 차례이다. 과연 답해야 할 것이다. 급히 해답을 제대로 주겠다고 말문을 여는 순간 그대는 실수를 할 가능성이 크다. 순진하게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니다. 대답에 급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다시 질문을 던지는 쪽으로 권한다.
- 조선족은 누구냐?
- 민족은 무엇이냐?
- 국가는 무엇이냐?
질문은 이렇게 제기하는 것이 맞다. 상대방이 상정한 구조 속에서 해답을 찾겠다는 조급함을 넘어 자신이 생각하는 구조 속으로 유도하는 문제해결 방식을 취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방식은 언제든지 평등하다. 각자가 자신의 구조를 제시하는 예의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돌아와서, 존재를 언급해야겠다. 존재로서의 조선족을 논한다. 해답은 이미 있다. 미학이 조선족을 조선족답게 한다. 그 미학은 존재가 만든 것이 아니다. 미학이 존재를 만들었다. 미학이 만든 존재로서의 조선족, 그 조선족은 스스로의 역학이 있다. 조선족은 미학에서 시작하여 존재를 개념하며 역학을 구사한다. 결국, 조선족은 미학적, 역학적 존재로서의 그러한 실체다. 이제, 좀 더 소상하게 화두를 풀어야겠다.
2-1. 조선족, 그 존재의 역학
이미 많은 얘기가 있었다. 지금도 조선족에 대한 많은 얘기가 있다. 종합한다면, 궁극적 의미에서, 근거 없는 존재는 없다는 확인절차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 어느 시공간에서 적당히 존재가 실체로서 나타난다. 조선족도 그렇게 나타났다. 그것을 역사, 혹은 과거란 말로 규정지으며 논의가 되어왔다.
그때 상황을 현재에서 반추해본다. 그때 먼저는 국가들이 있었다. 100년 전의 얘기다. 만주 일대는 이씨조선과 청의 힘이 확실하게 미치지 못한 상태로서 존재했다. 공백이라기보다는 힘의 균형이 적절하게 만나고 만나지는 지대로서 만주는 존재했다. 힘의 긴장된 대결보다는 완충 지대로서 있는 그 공간, 그 만주로 한 무리의 족속이 이동을 했다. 그 무리는 조선족을 잉태한 조상이 된다.
그때까지 조선족이라 칭해지지 않는다. 같은 시기 그렇게 건너간 일부를 현재의 러시아에서 고려인이라고 칭한다. 이름 함으로써 특수한 성격을 지닌다는 맥락에서 조선족도 특수한 존재로 되었다. 기실은 똑 같은 전개로 진행되면서 그렇게 건너간 무리가 조선족으로, 고려인으로 불리고 있다. 이 무리를 각각 다르게 이름 한 다른 요인들이 확실하게 작용했다는 증거다. 국가란 실체의 작용이다.
국가의 힘이 작용했다. 이씨조선과 청과 러시아와 일본, 두루 그러하다. 해양세력으로서의 서양 뭇 제국도 마저 논해야 할 것이다. 이런 국가들은 논하는 것이 아니라 통칭 국가라는 존재들이 만들어낸 역학을 논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실체로서의 제 국가를 국가란 단어 하나로 포괄함으로써 상위개념을 상정한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자면, 국가들이 있었고, 국가들 사이 힘의 균형과 완충지대로서 만주가 있었으며, 그 지대로 일부 족속이 이동했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다. 그쪽으로 이동해 감으로써 점차 특수화되어갈 나름대로의 무리를 형성하는 과정의 시작을 이렇게 먼저 언급한다.
역학은 국가만 강하게 나타낸 것은 아니다. 민족이라는 실체 역시 그 힘이 막강하다. 그 무리는 그 민족의 일부로서 이미 존재해 있었다. 배달겨레라고 널리 이름 했던 족속이다. 태고의 명칭으로 이름 함은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 무리는 반도의 그 족속이든, 만주의 그 족속이든 정서적으로 같았다. 기본이 같다는 말이다. 핏줄도 상대적 의미에서 특수화 되었던 무리다. 국가가 있기 전에 종족이 먼저 있었다고 미리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 종족을 국가란 존재가 막강한 힘을 확보하면서 국가의 입장에서 보다 명백한 실체로 개념하기 위하여 근현대에 와서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세계의 흐름, 물결이었던 셈이다.
지금에 와서 조선족은 이 두 가지 역학의 거대한 작용을 동시에 받는다. 받는다는 것보다는 두 가지 역학을 내면화한 장본인으로 된 것이다. 조선족 학계의 일부에서는 이 두 영역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그리고 그 유추의 결론으로 조선족의 2중성 내지는 경계인, 변방人을 언급하며 그것으로 최종 결론을 유도한다. 정확하지 않다. 빗나갔다.
빗나간 결론은 인식론의 철저함이 보장되지 않은데서 오는 소산이다. 많은 귀납을 하였다. 그리고 그 결론을 도출하였다. 당연한 결과로, 결론은 정곡을 찌르지 못했다. 그러나 결론 도출을 위한 사고를 전개 시, 역학에서 시작하여 역학으로 끝나는 연속이었으며, 끝까지 역학의 영역에 머물렀다는 데에서 어쩔 수 없이 그 결론을 미리 노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계다.
2-2. 조선족, 그 존재의 전개 양상
만주지역에 밀집되어 그 특수성을 내면화하던 무리가 어느 날 다시 일정한 규모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20년이 채 안되던 때의 일이다. 중국에서는 그 시작을 현대화와 개혁개방으로 이름 한다. 이동한 곳은 주로 중국 내 도시와 조상들이 떠났던 반도의 남반부다. 그러고도 또 널리 퍼졌다. 국가 단위의 그 어디나 두루 퍼졌다. 무리가 이동하니 사유도 이동한다. 스스로를 재단하던 판단의 척도도 기존과는 달라졌다. 기존이라 함도 맹랑하고 상대적이다. 분류의 시기를 잡을 만한 맥을 몇 개 집어내어 각자 규정을 하고 있기는 하다. 대략 이러 할 것이다.
이동 - 정착 - 땅 지기키 혁명투쟁 - 새로운 개념 국가 형성 및 조선족 명칭 공식사용 시작 - 기근 및 대동란 - 개혁개방 및 현재까지
그러니까 조선족이란 이름도 쓰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는다. 50여년 전에 공식명칭을 부여받은 것이고, 사실 100년 전에 실체가 있었다. 존재론적으로 그러하다. 다만 똑 같은 실체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렀을 뿐이다. 사람 이름 짓기 전에 사람은 먼저 있은 것이나 흡사하다. 많은 이름이 있었다. 조선인, 고려인, 백의민족, 배달겨레 등등 많았다.
가슴아파하는 지성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해체를 우려했다. 무리는 거기서 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렇게 소실되는 것인가를 치열하게 돌아보는 성찰의 진지한 태도가 분명 있다.
그래도 역설은 여전히 성립된다. 100년 전에 땅을 치고 통곡하다가 반도를 떠났다. 100년 후에 다시 눈물을 흘린다. 만주에 가면서 울었고 만주에서 다시 이동하면서 울었다. 감성과 정감은 대폭 눈물을 수용하는 쪽이다. 이것으로는 모자라다. 역학論으로는 모자란 것과 마찬가지이다. 감상주의가 통하지 않는다.
이제는 대체적으로 세계인을 많이 들먹인다. 맞는 말이다. 요새 화두는 많다. 세계화와 지역화, WTO, 문호개방, 고상한 웰빙도 있다. 국부 전쟁과 테러에 대한 논의로도 시끄럽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려운 문제들도 아니다. 한 가지 개념과 실체로 다른 이미 분류된 것을 통합하는 쪽이 아니면 그 반대쪽을 각별히 다뤄 둘 다를 강조하는 흐름이다. 부언하면, 상위개념 하나를 상정하고 그 아래에 수많은 특수성을 수용 및 통합하는 흐름과 특수성을 특별히 강조하여 다양성을 보장하자는 논리의 양립할 수 없을 듯한 심한 맞대결이다. 두 흐름은 너무 다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속성의 준거는 사실 같다. 역학적 범주에서 힘의 크기로 재단하기다.
그 와중에 조선족이 특별히 부각된다. 그러한 실체로서 엄존하기 때문에 논의의 중심을 차지하며 특별히 논의될 상대가 된다. 담론의 장에서 화두로 떠오르는 자체가 정상이다. 이미 언급했던 두 역학이 조선족을 대략 재단한다. 국가냐 민족이냐 아니면 국가와 민족이 다 합쳐진 것이냐를 논한다. 보편성으로의 통합과 특수성으로서의 세분화 대결로 판이 유도된다.
이런 논리의 대결을 회피하는 식으로 새로운 방안도 모색된다. 말하자면 소위 제3의 길이다. 그냥 현대인으로 살기를 주창하면 그만이라는 사유다. 그리고 자못 대범하게 그 이상의 철학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고 역설 받는다. 존재는 존재일 뿐이라는 애매한 대답으로 일관한다. 존재는 이미 철학이고 철학은 모름지기 존재 자체를 지속시키는 보존의 당위 쪽으로 가면 된다는 논리다. 그 이상은 모른다는 태도로 임하기를 거듭한다. 결국 대답 회피다. 사뭇 다른 대답이 또 있다. 무릇 세상 자체가 변하는 속성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속성이라고 강변한다. 대략 맞는 말이다. 말하자면, 운동하고 변화하는 존재에 대한 논의다. 그 상위 개념으로의 천착은 대신 없다.
냉철한 태도로 주시하면 쉽게 발견하게 되는 현상들이 있다. 떠나는 것이나 돌아오는 것이나 결국 무엇인가 큰 힘들의 흐름으로 좌우된 면이 있다. 부정할 수 없다. 엄연한 법칙이기 때문이다. 역학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해석학인 변증법으로 풀어보려고 하면 특히 그러하다. 정반합이 운동방식의 진실이라고 제시된다. 역시 역학으로 치밀하게 짜여 진 논리다. 만주에서의 재 이동 현상에 대해 해석이 되는 논리다. 정확하게 말하면, 무리의 이동이 이루어지게 되는 속성 중 일부를 잘 파악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것으로는 아직 해답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다. 닿지 못한다.
2-3. 조선족, 그 존재와 미학
미학이 존재를 결정지었다고 언급했다. 기존의 많은 해석은 질서가 존재를 만들었다 혹은 존재가 질서를 나타냈다 등등으로 설명되어 왔다. 역시 상대적으로 맞는 해석들이다. 조선족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아마 이러할 것이다. 질서로서의 역학이 조선족이라는 존재를 형성하였다. 혹은 조선족이라는 존재가 스스로의 질서를 형성해 나간다. 이런 해석으로 일부의 진실들을 설명했다고 보아진다. 다만 말 그대로 부분일 뿐이다.
이것들을 통합 가능한 원리가 있다. 미학이다. 역학의 범주, 존재 그 자체의 범주에서 그 윗 차원으로 이동하면 미학의 범주가 있다. 말하자면 조선족이 조선족일 수밖에 없는 미학이 있다. 통합을 위한 목적으로 개념을 통합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과히 의도적이다. 객관성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어설픈 논리나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마음은 갸륵하지만 논리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질타가 생길 소지를 남길 필요는 없다. 겸허하게 인식하고 귀납하여 세상을 다시 연역한 결과로 말할 뿐이다. 즉, 통합되는 원리가 있기에 통합이 되어 질 뿐이다. 이 점을 직시해야한다.
존재는 다만 물질로 존재하지만은 아니한다. 사유와 관념도 존재이다. 다만, 어긋난 사유체계도 있어 논쟁이 생기기는 한다. 그 존재를 잉태한 미학은 결국은 질서이고 질서에 의한 존재의 형성이며, 존재가 나타낸 역학일수밖에 없다. 이 모두를 합쳐 미학으로 칭하고 싶다. 미학에 대한 재해석이다. 존재론이다.
질서는 스스로 존재하는 그 어떤 법칙이라고 잠시 상정한다. 태초의 원리로 작용되는 그런 질서를 말한다. 그러한 질서들의 복합작용이 조선족이라는 존재를 만들었다. 현상을 그대로 설명함으로써 만주에 정착한 한반도의 무리가 현재의 조선족으로 존재되어 있음을 부언한다.
구체적인 해석을 곁들인다. 먼 옛날에 부여국 축제가 있었다. 국가는 종족연맹이었고 종족연맹은 곧 국가였다. 왕은 제사장이었고 제사장은 곧 왕이었다. 그 왕이, 그 제사장이 그 축제를 열었다. 봄과 가을이다. 사마천은 사기에 이를 소상하게 적었다. 밤낮 한주 동안 축제는 계속됐다. 하늘과 땅과 인간은 서로 공존하고 통하던 시기다. 낭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향수병이나 복고주의도 아니다. 미학을 언급할 뿐이다. 말하자면, 미학 속에 질서가 있고 질서는 존재를 만들며 존재는 역학을 나타내어 역동적인 축제를 열었을 뿐이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질서 자체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다. 더 생겨나는 질서도 없고 더 적어지는 질서도 없다. 질서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곧 그대로이다.
그러나 질서들의 비율적인 섞임이 만들어낸 존재는 시공간에서 구체적으로 전개되고 아주 복잡하게 나타난다. 그 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부각되고 분류되고 보다 정교화된 특수한 존재들이 많이 나타났다. 단일민족 단일국가, 단일민족 여러 국가, 한 국가 여러 민족으로 뒤섞이기도 하고 고도화하기도 하며 각자의 존재를 구현하였다. 그 과정이 끊임없는 운동이라는 흐름을 타고 지금까지 흘러왔다. 그럴 뿐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미학에는 존재론과 과정론이 동시 존재한다. 즉, 미학을 규정짓는 질서와 질서를 구성한 물질적 존재가 있으며 물질적 존재는 끊임없는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역학을 나타내는 과정이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질서가 변하는 존재의 전개를 유도한 것이 된다. 결국 존재론과 과정론은 하나이고 하나를 다른 측면으로 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곧 미학이다.
조선족은 두 번 이동하면서 두 번 울었다. 두 울음 다 의미가 있다. 만주에 가면서 울고 만주에서 나오면서 울고 있다. 역학을 규정한 질서의 결과를 삶으로 인식하면서 조선족의 눈에서 눈물이 나타났다. 정감이 작용한 결과이다. 감정은 생명이 만들어 낸 의미와 가치로서 존재한다. 그것이 없다면 눈물은 소금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를 움직이는 질서를 보지 못하면 감상주의에 함몰된다.
미학은 이미 있었다. 그것의 전개는 존재와 역학으로 인식되어 보여졌다. 이제는 이를 정확히 하나로 힘써 다시 인식할 차례이다. 변하지 않는 질서는 세상이 만들어 준 것이 아니고 스스로 있었다. 그 발현과정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다. 합쳐지고, 모이고, 모이고 합쳐지고를 거듭한다. 이것은 단순한 순환론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들을 각자 내재하고 있다.
조선족의 존재도 그러하다. 다만, 이제는 그 질서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그 질서를 잉태한 미학을 고민할 현실이 아닌가 싶다.
3. 화두에 답하며
- 조선족은 누구냐?
이 질문에 답할만한 시점에 와 있는 듯하다. 미학이 조선족을 만들었다. 그 미학은 적어도 민족과 국가의 특성이 특별히 잘 부각된 요인을 내재화한 무리로서의 실체에게서 확실하게 나타났다. 그 무리가 바로 조선족이다.
조선족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당위는 없다. 다만 조선족이라는 실체에 의하여 그 무엇인가를 해야만 하는 무리중의 많은 구성원들이 있을 뿐이다. 왜냐면 민족과 국가라는 의미를 둘 다 잘 체화하고 내재화한 특수성을 가진 자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발현된 민족성과 국가관을 2중성으로 더는 해석할 필요가 없다. 경계인은 더욱 아니다. 굳이 그렇게 고집하면 통합된 객관적 질서를 미처 파악하지 못해 사유의 조화와 명철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무리로서 슬프게 남을 뿐이다.
세계인으로서의 당위로 도피할 필요도 없다. 원래부터 세계인일 뿐이다. 세계인은 별것 아니다.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발현 가능한 요인 중 일부를 특정지어 보다 많이 잘 나타낸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영원히 과정으로서 남는다. 100년 후의 인간이, 더 좁게는 100년 후 조선족이 지금의 현대인으로 칭했던 무리를 더는 현대인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시공간은 100년 후 후손에게 지금의 현대인이 조상으로서의 고대인이라고 말하게 할 것 일다. 그 또한 정답이기도 하고 정답이 아니기도 하다.
간단하게 정리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질서가 있다. 그 질서의 발현을 주도하는 모든 것을 미학의 범주에 넣는다. 시공간에서의 수순에 따른 전개에 의해 존재가 생성되고 역학을 체현하며 그 체현으로 말미암아 미학이 구현된다. 존재론과 과정론은 한 통속으로서 미학에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조선족이 지금 있다. 앞으로도 있다. 한동안 있어 갈 질서가 엄존하기 때문이다. 해체를 슬퍼하거나 존재의 지속에 감격하는 사유 이상을 사유해야 한다. 형성과 해체의 전반 과정에서 존재로서의 조선족이 발현시킨 보편성이, 보다 넓게 두루 섭렵된 질서였고 그 질서의 발현자로서 조선족이 건재했다는 한 가지만으로 조선족의 미학은 강력하다. 국가의 논리와 민족의 논리 이상으로 세계인의 기분까지 두루 섭렵한 족속이다. 이 무리에 대한 인식이 다소 거북했던 이유는 질서의 일부만을 보고, 특히 그 일부의 질서에 의한 역학의 구현에서 이루어진 규모를 보아 보다 왜소한 무리인 것만을 헤아리고 피해의식을 스스로 자처한 것이거나 조선족 일원이라는 현실에 의해 힘써 무조건 조선족의 제반 능력을 강화시키는 노력에 애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그 무엇을 위하여는 없다. 수순을 밟아야 한다. 인식을 혁명할 차례다. 인식을 혁명하기 전에 질서가 먼저 있음은 위안도 아니요 감격도 아니며 슬픔도 아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접하면 된다.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고 난 다음에는, 새로운 인식을 잘 체화한 무리로서의 자긍심을 가져야한다. 아니, 자긍심은 조선족이 존재함으로 인해 내재화되어 갈 뿐이다. 과시도 없고 겸허도 없다. 다만 그러할 뿐이다.
담소하며 축구도 마저 논한다. 한국 응원도 아니고 중국 응원도 아니다. 그 범주에서는 확대된 정서적인 것이 자리할 이유도 별로 없다. 축구는 축구로 먼저 본다. 축구의 법칙으로 축구를 보면 된다.
굳이 더 논하려면 민족을 논하겠다거나 국가를 논하겠다거나 아니면 조선족을 논하겠다거나 그러한 준거를 상정한 후에 시작한다. 이미 있던 모든 것들 중 어떠한 것들이 특히 부각되어 발현되었는가를 따져보면 된다. 존재론과 과정론의 동시성을 주목하면 된다. 이러한 전개가 순리다.
분명한 것은, 조선족은 생성되면서 이미 귀한 존재다. 발달된 인식의 지평을 열어볼 무리로 등장한 것이다. 제법 기분 좋은 일이다.
미학으로 논한다. 조선족의 미학으로 논한다. 그리고 조선족의 존재도 논한다. 조선족의 역학도 논한다. 그것들은 사실 원래부터 하나였다.
2006년 7월 26일
전유재(全宥再, Quan YouZai)연변과학기술대학 생물화공학과 학사. 상명대 정보통신대학원- 한국과학기술정책연구원 (STEPI) 협동과정 기술경영학과 석사졸업. 현재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현대문학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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