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찾아 나선 동포여성의 가슴 아픈 이야기

2006-07-10     동북아신문 기자

 <진정한 결혼생활을 꿈꾸었던 동포여성과 결혼을 미끼로 던진 한국남자!

그들의 비극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안녕하세요.

저는 대한민국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중동 XX번지에 살고 있는 박경수씨의 부인으로 되어 있는 조영자입니다.

 

 

저는 1991년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자 10살 난 딸과 네 살 난 아들을 위해 재가를 포기하고 모든 정성을 다 하여 자식들을 키우며 살아왔습니다.

 

2003년 8월 일본에서 유학공부 중인 땅이 방학이 되어 집으러 놀러 왔습니다.

아버지 없이 너무 일찍 헴이 든 딸은 엄마를 하루 빨리 재가 시키려 애썼습니다. 엄마가 재가 안하면 자기도 평생 시집 안 가고 엄마와 함께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실로 긴 것 같으면서 짧은 것이 인생이 아닙니까!

애들이 어릴 적엔 그들을 키우느라 저의 자신에 대해선 아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어느 덧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고 아들은 고등학교에 입학해 학교숙사에서 보내고 있으니 저의 인생이 너무 허무했고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인생을 되찾고 싶었고, 재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애들을 키우면서 부모와 형제들의 너무 큰 방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남자와 재혼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한민국! 우리 조선민족의 자랑인 대한민국! 대한민국남자라면 더 문명하고 존경스러울 것 같았습니다. 또 일흔의 고령이 된 부모님들도 초청해 그이들이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을 밟아보게 할 수 있고 형제들도 초청해 돈 벌게 하면 애들을 키우면서 받았던 은혜에 보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저는 혼인소개소에 정식결혼을 신청하였습니다.

소개소에서 전화가 와서 저는 남자 둘을 만나보게 되었는데 마음에 없었습니다.

세 번째 남자와는 정식결혼이라 해 놓고 정작 소개소에 가보니 협의결혼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똑똑한 한국남자들은 돈을 쓰면서 여자를 데려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면 여자가 첫 시작부터 남자의 돈을 쓰지 않고 남자에게 피해 주지 않는다면, 만약 살다 감정이 맞지 않아 살지 못하면 여자도 피해를 받지 않을 거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아주 현명한 방법이라 생각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남자를 만났습니다. 저는 그에게 정식 결혼하려는 마음을 똑똑히 표명했습니다. 그 남자는 어물어물 자기 태도를 제대로 말 못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식어 그만 두었습니다.


그 후 네 번째 남자를 만났습니다. 역시 저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습니다. 그는 내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국에 와서 당분간은 함께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아, 이런 거로구나! 정식결혼이든 협의결혼이든 서로 마음을 터놓고 약속하게 달렸구나!


다섯 번째 또 전화가 왔는데 이번에는 박경수이었습니다. 저의 입장은 전과 같았습니다. 그러니 박씨는 자기도 배우자가 없고 결혼하려지만 돈도 없으니까 그렇게 알고 수속하자고 했습니다. 그는 시내 버스기사 직업도 있고 나이도 두 살 이상, 장가 간적이 없는 독신이었습니다. 전 말했습니다. 저한테는 자식이 둘이 되고 또 한국남자들은 여자 나이 많이 적어야 좋아한다는데 제가 자격이 되겠는가고? 그는 애들은 있으면 좋을 거고 자기는 여자가 마음씨 착하기만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박씨를 저희 부모형제에게 인사시키고, 또 수속하는데 사진이 필요하다기에 둘은 오랜 부부마냥 손잡고 다니며 사진도 찍고 공원구경도 하며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얼마나 다정다감하게 지냈던지 저는 죽은 남편이 돌아온 것 같았고, 그저 꿈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짧았습니다. 그는 저와 2004년 4월 15일에 만나 8일 만에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함께 있을 때는 좋은 생각만 했는데 보내놓고 나니 나쁜 생각만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전화만 오면 보고 싶으니 한 번 더 오라 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장백산유람도 해야 하니 한 번 오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의 마음을 슬쩍 떠보았습니다.

“이번에 오실 때 꼭 애인을 데리고 오세요”

그는 애인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가 한국 실정을 잘 알고 있는데 한국에선 부인 몰래 애인 두고 있다던데요, 애인 없는 남자는 바보라고 한다던데요?…


저는, 장가도 안 간 당신한테 애인 없을 리가 있겠냐. 꼭 데리고 오라. 그 사람도 장백산구경 얼마나 하고 싶어 하겠냐? 난 마음이 넓어 그런 것 받아들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화내는 음성으로 두 번 다시 그런 말을 하면 전화 안 할 거라면서 한 번 믿었으면 끝까지 믿으라면서 자기는 한 번 먹은 마음 변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다소 마음이 놓이었습니다.   

   

드디어, 10월7일 우리의 결혼이 비준되었습니다.

2004년 10월 19일, 저는 그립고 그립던 박씨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제가 짐을 밀고 나오는데 용이엄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나기에 돌아보니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연길에서 만났던 남편이 아닌 것 같이 너무 우울해 보였습니다.


그는 저한테 음료수를 사주면서 잠간 앉아 이야기 하자고 했습니다.

집에 두 살 이상인 형이 함께 살고 있는데 술중독이라 아무렇게 해도 탓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 이런 걸 속였으니 미안해서 그러나 보구나! 저는 안도의 숨이 나갔습니다.


저녁에 그는 중국 연길에 함께 갔던 친구 넷과 함께 식사하러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한참 뒤 전화가 왔습니다. 여자였습니다. 누군가 물으니 중국 연길여자인데 사귄지 2년 남짓 되고 남편이 있는 여자라 영원히 살 여자가 아니라 했습니다. 저의 마음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날 밤 한방에서 자면서 그는 이부자리를 따로 폈었습니다.

저는 뜬 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이튿날 아침 저는 남편과 여동생한테 가지고 온 선물들을 꺼내놓고 조카들의 부탁을 가지고 왔기에 그들한테 갔다 오겠다고 했습니다.


10월 23일, 저는 남편과 함께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외국인주민등록증을 낸 다음 집에 갔다오려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저를 데리고 가려하지 않고 자기가 출근하겠는데 형님 때문에 집에 있지 못한다며, 돈을 주면 세집 맡겠다면서 잠시 조카네 집에 가 있으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돈을 받겠다는 이야기로구나! 참 억울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싸울 수도 없었습니다. 이런 봉변당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저는 결심했습니다. 함께 살면서 마음을 돌려 세우리라고!


함께 산다면 돈을 준들 무슨 상관이며 어쨌든 한 가정의 돈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사람을 보고 결혼했지 조건을 보고 결혼한 건 아니었습니다. 보았다면 건강한 몸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그의 능력일 따름이었습니다.


저는 일본에 있는 딸한테 남편의 은행계좌번호를 알려주었습니다.

이튿날 남편의 통장에 한화 오백만원이 들어갔습니다.

오백만원! 이 돈은 엄마가 양심 없이 받은 딸애의 피눈물 나는 돈이었습니다.

딸은 일본유학을 가서 1년 반 만에 언어학원을 졸업하고 일본대학 영어학부에 입학했습니다. 건데 그는 엄마와 동생을 위해 공부를 포기하고 돈을 벌었던 것입니다.


며칠 후 저는 남편한테 전화하여 집으로 간다고 하고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헌데 남편은 저를 맞으려하지 않았습니다. 또 조카네 집에 며칠 더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세집을 맡으려면 함께 집을 보아야 할 것이고, 또 당신이 없으면 형은 어떻게 살 수 있는가? 저는 형이 한 집에 있다 해도 괜찮으니까 저를 조카네 집으로 보내려니 생각하지 말라고!


저는 집에 가서 이 구석 저 구석 거두었습니다.


저녁이었습니다.

여자한테서 또 전화가 왔습니다. 식사하러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저도 함께 가자했고, 친구도 두 분 불렀습니다.


저는 저녁식사가 끝나자 그녀한테 말했습니다. 남편이 애인도 없고 결혼하려 한다기에 한국에 왔고 우리는 이제 합법적인 부부이니 제발 물러서 달라고!


두 분은 중국 연길 혼인소개에서 부인을 데려온, 제가 알고 있는 분들로서 저를 데려갈 택시 기사였습니다. 그들은 저의 동의도 없이 무작정 그 여자와 함께 가서 저의 짐을 택시에 싣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금방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의 조카집이 아닌, S선교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 뒤 한 주일이 지나서 박씨는 저한테 휴대폰과 국제전화카드를 사가지고 와서 사용방법을 알려 주었습니다. 주민등록증이 나오기까지 잘 책임지겠다고 했습니다.   

철면피한 인간! 내가 거기에다 뭐라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11중순, 저는 남편 아닌 남편에게 전화해서 엄마와 오빠를 요청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동의하면서 요청서를 보내 주었습니다.


그가 또 찾아왔습니다. 저를 교회에 있게 한 것이 너무 미안하다면서 내가 보증금을 내면 자기가 월세는 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함께 있지 않고서 그의 마음을 돌려세운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보증금으로 남편의 통장에 또 백만 원을 넣어주었습니다.

이 백만 원은 딸이 엄마가 고생할 가봐 생활비로 보낸 50만원에 제가 매일 파출부로 다니면서 벌어 모은 50만원인 피의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 1월이 지나도 세집을 맡지 않고 이렇게 변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겨울이어서 세집이 나는 것 없는데다가, 간혹 난다해도 세가 비싸 봄에 가서 맡겠다고! 저는 또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3월 달이 다 가도 그 사람한테서 감감무속이었습니다.


저는 화가 나 미칠 것 같았습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한테 무릎 꿇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전 하나님 아버지 앞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아버지 앞에 마음을 고백하면서 의지하고 살아왔기에 지금까지 미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그날은 음력 2월 12일, ‘연인절’이었습니다.

엄마의 일을 다소 알고 있는 딸은 이날을 계기로 닭띠 해에 빨간 속벌을 입어야 한다면서 속벌 한 벌 보내왔었고, 초콜릿도 한 봉지 넣어왔습니다. 이날은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니 아저씨에게 드리라며 ‘우리엄마 파이팅!’을 외쳤습니다.

참으로 자식 앞에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났었습니다. 

저는 박씨한테 전화해서 만났습니다.

저는 정색해서 따졌습니다.

“당신은 왜서 남의 앞길을 가로막고 이런 장난을 치지요? 이제 한창 좋을 우리 인생이 얼마나 남았다고 그래요, 미안하지도 않아요? 한 번 먹은 마음 변치 않는다던 사람의 처사가 왜  이 모양인가요?”

박씨는 또 이유를 찾았습니다. 얼마 전부터 자기는 몸이 아파 약을 먹고 있는데 의사가 곁에 여자를 두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저는 준비해 온 백지를 내밀었습니다. 살겠는가 살지 않겠는가, 결정하고 여기에다 사인하라고!

그는 먹을 약이 열흘 분밖에 안 남았으니 다 먹고 병원에 가 검진한 다음 결정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또 수그러들고 말았습니다.


저는 초콜릿봉지를 내밀며 물었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줄 아느냐고?

“오늘은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한테 초콜릿을 주는 날이래요. 딸이 보내온 겁니다.” 

“제가 무슨 자격이 있어 이런 것 받아요? 죄송할 뿐이오.”

“그럼 자격 있도록 노력하면 되잖아요? 전 오로지 당신이 마음 돌리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초콜릿을 그의 주머니에 쑤셔 넣어주었습니다.

그는 헤어지면서 죄책감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일 년만 지나면 빚을 다 물 것 같으니 참아 달라 했습니다.


그날 헤어지고 또 보름이 지났습니다.

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병 때문에 여자를 곁에 둘 수 없다는 남자와 살겠는가 안 살겠는가 하는 건 제가 생각할 문제이지 자기가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판단했습니다.

저는 전화를 했습니다. 인젠 그만하면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느냐고?


그런데 박씨는 전날 제가 만났던 사람이 아닌 다른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보낸 종이를 보고 찢어버렸는데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으며 나한테 돈 때문에 결혼한다고 똑똑히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연길 혼인소개소에다 보낸 자기의 편지를 예들었습니다.    

“혼인소개소 책임자 앞: 저는 조정숙의 남편으로 되어있는 박경수입니다. 저는 조영자에게 죽을죄를 졌습니다. 그녀의 주민등록이 나오기까지 책임졌다가 이혼하겠습니다. 그녀에게 좋은 남자 소개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한테 돈을 위해 결혼한다고 똑똑히 말했다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남자’한테 무어라고 더 말할 수 있겠습니까?

며칠 후 저는 미련 못 버리고 전화했습니다. 너무 화가 나서 그랬으니 이해하라고!

그는 이해한다면서 마음 편히 가지고 건강이나 잘 챙기라고 했습니다.


이튿날, 저는 그와 연락을 하려했습니다. 그런데 휴대폰은 꺼져 있고 집에다 전화하니 어떤 여자가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저녁까지 굶었습니다. 더 이상 전화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6월이 되자 그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돈 좀 꿔달라고! 저는 없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7월초에 그는 또 돈 꿔달라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는 내가 보고 싶다면서 우리식당으로 오겠다했습니다.

이튿날에 정말 찾아왔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애인과 재미있게 살지 왜 왔느냐고 쏘아주었습니다.

그는 애인이 이미 위장결혼하려고 중국으로 갔다는 것이었습니다.

“흥, 그래요? 한 가지 물을게요. 전 당신한테 어떻게 되는 사람이고 누구인지 좀 말해 줄 수 없을까요? 너무 궁금하네요.”

저는 비꼬면서 걸고 들었습니다.

그는 잠간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다했습니다.

저는 화가 났습니다.

“그럼 누구인지 이름도 없는 여자한테 왜서 돈을 꾸려하지요? 지금까지 사기치고 모자라서 또 어찌 하려고요, 이미 600만원 사기 쳤잖아요? 흥, 흥, 이렇게 사기 쳐서 애인의 위장결혼 비용 뽑으려고 그러지요?”

말문이 막힌 그는 자기가 사기 친다 생각한다면 더 할 말이 없다며 돌아갔습니다.

그 뒤 자기통장에 돈도 넣지 않아 전화비는 제가 납부하게 되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저의 체류기간을 연장해 줄까요? 설령 해준다고 해도 남편 아닌 사람을 남편이라 속이고 함께 가서 외국인등록증을 내야하며, 또 주민등록을 신청하고 그와 함께 사는 것처럼 연극까지 꾸며야 할까요?


생각하던 끝에 저는 우리 S선교회 박XX목사님 앞에 문제를 내놓고 상담했습니다. 목사님은 제가 진정 살려고 왔다면 그 남자가 어떻게 하던 남자 곁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씨한테 전화하여 저의 의사를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버럭 성을 내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박씨의 친구(교회까지 데리고 왔던 분)한테 전화를 해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 분은 박씨한테 전화하고 또 다시 저한테 전화를 해주었습니다. 박씨가 자기 친구이지만 작년 중국 연길로 갈 때 여자가 있는 줄 몰랐다고 죄송하다며, 어쨌든 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교회에 있는 짐은 박씨네 집에 가져다 놓아도 될 거라며, 박씨가 전화 받겠다고 했으니 상의해서 처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하니 그는 받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더 만나고 싶지 않았고요!


그렇다고 이렇게 남한테 피해주지 않으려다 자기가 피해 받으면서 돈을 사기 당하고 몸까지 사기당한 채, 실패한 꼴로 자식과 부모님 앞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시집 왔다고 불법자로 갖은 유린을 당하면서 숨어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한심한 것은 저의 자식들이 이 엄마를 위대한 엄마로 존경하고 있는 것입니다.

600여만 원! 자식이 대학공부마저 포기하고 벌어 보낸 피에 절은 돈을 대한민국의 ‘위대한 남자’한테 사기 당하고 실패한 꼴로 나타나기는 정말 죽기보다 싫습니다.


아, 대한민국, 우리 조선민족의 자랑인 대한민국! -저는 지금 대한민국정부 법무부에 간절히 부탁합니다. 절망 속에 모대기고 있는 한 조선족 여인에게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 것이라고 믿고 이렇게 하소연 해 봅니다!


저는 이제 하루 빨리 그 남자와 이혼수속을 밟으려 합니다.

그리고 정당한 법률적 보호를 받으면서 돈을 벌고 생활하려 합니다.

꼭 저를 도와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조영자 올림


2006년 7월 10일


<편집자: 조영자씨의 경솔한 결혼과 처사 및 사고방식에 문제가 없지 않아있다. 허나 그녀의 선량함과 고지식함을 이용해 돈을 뜯어내고 덕을 보려했던 박경수씨는 분명 사기죄를 진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결혼생활을 그토록 소망하고 열애했던 조영자씨의 노력에 감동하며, 또 그녀의 착각에 슬픈 연민을 느끼게 된다. 아울러 결혼을 장사거리로 보면서 애들 장난처럼 여기는 현대인의 비열한 정신과 처사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조영자씨는 국제결혼 피해여성이기에 마땅히 법률의 보호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처지를 개선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 조영자, 박경수는 필명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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