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후에 한식점 하나 내는 것이 꿈인 남자

-재입국 동포 송정웅씨를 만나 사는 이야기 들어 본다

2006-07-06     동북아신문 기자

  손정웅씨의 가족은 아들 하나 부인해서 셋, 아들은 이제 열일곱 살 중학생이고 부인은 마흔 하나, 연길 동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가게 수입은 별로라 한다.

그는 연길에 있을 때 한국식당의 주방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하기에 작년에 귀국했다 1년 쉬는 기간에는 연길에 있는 한국식당에 가서 일했고, 입국 한 달 전에는 택시기사도 했다 한다.


고국에 첫 발을 들여놓았던 때는 2000년 8월 31일, 그는 4년 7개월을 서울에서 보냈었다. 빚을 내서 브로커한테 8만 위안을 주고 오다보니 빚이 불어나서 갚을 때는 12만 위안이나 되었다 한다.


처음 와서는 호텔의 시트를 씻는 일을 했었는데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아픈 몸을 겨우 지탱하면서 술 담배도 전혀 하지 않았지만, 빚 갚고 나니 3년이 지나도 별로 남는 게 없었다.

그래도 불법체류 하기보다는 자진귀국 했다가 혜택 받고 입국해서 떳떳이 일하는 게 마음 편하고 좋을 것 같아 귀국했다 한다.


“그래도 아내가 장사를 하면 생활이 괜찮겠는데요?”

“장사가 안 됩니다. 먹고 사는 형편이지요. 애 공부도 시키고 하니 일 년에 한화로 2백만  쯤은 보태줘야 합니다. 더구나 고등학교에 붙지 못하면 한화로 270만원 씩 내고 공부를 시켜야 하니 머리 아픕니다.”

“애가 고등학교에 다닌다고요?…올해 시험을 봐야 하겠네요?”


손정웅씨는 그렇다고 했다. 애가 능력대로 시험을 봐서 고등학교를 가든지 직업고중을 가든지 능력대로 진학시킬 할 예정이라고 한다. 애에 대한 희망 크게 품지 않는 것 같은 느낌, 기러기부부가 되어 자식교육 제대로 시키지 못한 것이 마음 아프지만, 현실은 현실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한국 갔다 온 친구들은 어떻게 사느냐고 물으니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글쎄요, 한국에서 벌어와 아파트도 사고 착실히 살림하는 친구도 있죠.…그런데 다들 그러지 못하더군요. 매일 술 놀이하고 노래방 다니고, 돈을 물 쓰듯 합니다. 1년에 7만 위안(한화 850만)이나 맹탕 쓰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니 중국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당신들은 한국에 가 죽도록 일해 벌어오지만 우리는 앉은자리에서 당신들이 벌어온 돈을 번다고 합니다. 그게 해외로 돈 벌러 갔다 온 중국조선족의 실정이거든요!”


그는 처갓집의 예를 들었다. 막내처남은 외국에 가서 돈 벌어와 아파트를 하나 샀을 뿐, 나머지는 이래저래 탕진해 버리고는 또 배타고 돈 벌러 간단다. 수속비용 대달라 어떻게 애 맡기고 간다 어쩐다, 옆 사람까지 볶아대니 피곤해서 어디 살겠는가고 했다. 종국적으로 조선족들의 삶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 꼬집고는 한숨을 내 쉬었다.

동감이 가는 말이었다.

 

나는 이번에 입국하면서 당신은 어떤 좋은 아이디어를 가져왔느냐고  물어보았다.

 

“솔직히 저는 음식 업에 흥미 많거든요. 이제 몇 년 벌어가서 청도나 상해 쪽에 가게라도 하나 낼까 합니다. 한화로 5천만 정도 벌면 되겠는지?…전 돈을 아끼는 편입니다. 연길에서 회사택시를 몰 때도 퇴근해서는 집으로 걸어 다녔어요. 남들이 비웃기까지 했지만 대수롭지 않습니다. 얼마나 힘들게 번 돈인데? 아낄 것은 한 푼이라도 아껴야지요!”

 

“그렇잖고요. 건데 그때 가서 5천만 원을 주고 중국 연해지구에 가서 식당가게 하나 뽑을 수 있을까요? 해마다 집값이 무지 뛰고 있는데…”

 

“글쎄요…사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요? 그래도 꿈은 가져야겠죠.”

 

“네, 잘 생각했습니다. 살다보면 어려움이 또 생기겠지만, 인생이 어렵다고 꿈을 갖지 않으면 종국에는 아무 것도 성사할 수 없지요!”


나는 진심으로 그의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