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삶속에 작은 꿈을 가진 사나이
불빛이 희읍스레한 A건물 2층 홀에 앉아 그는 여자 손님과 여담을 하고 있다. 손에는 연필과 작은 화판이 들려있다. 가까이 가보니 연필로 대충 그린 젊은 여자의 초상화였다.
나는 그의 곁으로 다가가 수작을 붙였다.그는 심양에서 온 조선족인데 이름은 최명성, 나이 마흔셋, 그런데 서른대여섯 쯤 되어보이었다. 3월 달에 시집온 누나의 초청을 받아 한국에 왔는데, 지금은 고시원에서 숙식하며 일당을 뛰고 있다고 한다. 고시원의 매달 숙박료는 13만원, 비교적 싼 편이었다. 식사만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처음에 와서는 죽산과 철산에서 두 달간 지게차 운전을 했다고 한다.
지게차 운전하는 것이 막노동하는 것 보다 훨씬 쉽겠는데 왜 그만 뒀는가고 물었다.
“글쎄요, 목수가 많으면 집이 찌그러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주인장의 사정이 좀 그래요.”
그는 서울은 사람 살 곳 아니라고 했다. 경쟁이 너무 심하고 말썽이 많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곳이라며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현장에 아저씨들 하고 이야기 나누다 보면 일당 뛰어 별로 남는 것 없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하루 5만 2천원 쯤 벌어 숙비 내고 담배 사 피우고 술 한잔 사먹고 나면 별로 남지 않는다. 그래도 아끼고 아껴 썼었다.
현장아저씨들은 그러면 왜 한국에 왔느냐고 나무람하기도 한다. 그는 웃으며 고개 젓는단다.
"글쎄요, 누구는 오고싶어 왔고, 노가다 뛰고 싶어 뛰는 줄 알아요?"
어쩜 중국에서 돈을 벌지 못한 자기에 대한 원망인지도 모른다.
고생 안하고 돈 벌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은 돈 말이었다.
심양 시내에 낡은 집이 있는데 이번에 재건축에 들었다고 한다. 8~9만 위안쯤 받을만한데 아파트에 들자면 20만 위안은 있어야 한단다. 한국에 올 때는 3천 위안 밖에 안 썼으니 빚은 없다. 석 달 간 번 돈 3만 위안은 이미 보냈다고 한다. 이제 10만 위안 쯤 벌면 아파트 한 채는 살 것이고, 다음은 귀국해 사업할 자금을 마련하면 된다고 했다.
그는 중국에 있을 때도 여러 가지 일을 했다 한다. 심양, 상해, 북경을 다니며 인삼장사도 하고 본지에서 마장 실도 내고, 돈이 되는 것은 해보려고 무척 애쓴 모양이다.
“전 14년을 혼자 살았거든요.”
“예? 14년을 싱글로?”
“결혼했었지요. 서른 살 때 이혼했습니다. 여자는 저보다 나이 여덟 살 차이고요.”
“그런데, 왜 이혼을 해요?”
“글쎄요, 사돈과는 변소 간이 멀어야 한다는 속담이 있잖아요? 그런데 같이 식당을 꾸렸거든요. 그러니 의견이 맞겠어요? 서로가 매일 신경 쓰다시피 했으니까, 제 잘못도 크지요! 그래서 명대로 사는 게 인생이구나! 생각되더군요.”
“허허, 그래요?…”
애는 본래부터 없었으니 부담은 없었다. 그런데 아까운 청춘을 그렇게 흘러 보내다니?
형제들의 형편 들어보니 사회에서 괜찮게 나가는 셈이었다. 누나는 한국에 시집와서 한국 국적을 취득했고 형은 한국에 3년 있다가 8월이면 귀국한다고 하고, 큰 여동생은 심양 4중 회계사이고 막내 여동생의 시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나는 그가 굳이 그런 속사정까지 다 이야기 하는 것을 보고 의미 있게 웃었다. 내가 혼인광고라도 내줄까?
그는 내가 기자인 것을 알고 사뭇 그러기를 바라는 눈치이었다.
나는 어떤 여성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냥 와서 살아주면 됩니다.”
“뭐, 그냥 와 살아주면 된다?”
“네, 한국에 와서 돈 버는 여자이면 더 좋구요, 그러면 같이 귀국해서는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고 중국에서 자그마한 식당이라도 하나 내서 먹고 살면 되지요. 돈 너무 따지지 말구 화목하게 살면 됩니다.”
“어떤 여자면 되지요?”
“저보다 한두 살 많아도 되고요, 이혼했어도 괜찮고요. 만약 자식이 있다면 딸애 하나쯤 있어도 됩니다. 물론 예전의 신랑하고는 깨끗하게 끝냈어야지요.”
“허, 그냥 와 산다는 것도 쉽지는 안겠네요.”
나는 웃으며 농담을 했다. 마음 곱게 쓰면서 서로 받들어 아기자기 살고 싶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라 하겠다.
그는 소학교 3학년 때부터 그림그리기에 흥취를 가졌다고 한다. 그냥 그리는 것이 취미라고! 그동안 스승을 모시고 착실하게 화법까지는 터득 못한 것 같았다.
“아직 시간이 있잖아요? 집에 전화해서 도구들을 사 보내라고 했습니다. 한 십년 취미로 그리다 보면 뭐가 보이겠지요. 명함 내밀만한 화가가 되진 못해도…취미로도 좋습니다.”
나는 그러는 것도 쉽지 않다고 생각했다. 낮으로 나가 일하고 밤으로 그림 그린다는 것, 자기 애호를 살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참 소박하고 마음씨 고운 사내라 생각했다. 이상이 크지 못해도 꿈이 있고 사람을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는 가슴을 가지지 않았나 싶다.
나는 그의 행운을 빌면서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