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정배 법무부장관님께 인사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서경석목사가 인사드립니다.
이번에 조선족동포에 대한 여러 가지 획기적인 조처들에 대해 우리동포들이 한국정부, 특별히 법무부에 대해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천장관께서 장관으로 오신 후의 일들이라 천장관께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려운 문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한중수교이전에 한국에 입국한 사람들인데 이들은 불법체류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귀국을 해야 하지만 중국을 떠나온 지 너무 오래되어(14-5년) 대부분 도저히 1년간 중국에 돌아갈 수 없는 처지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소송을 하고 행정소송을 하면서 버틸 때까지 버텨보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열흘 전에도 이분들을 교회로 불러 귀국을 종용하였으나 귀국하겠다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이분들에게 탄원서를 써보라고 했더니 다음과 같이 탄원서를 써 왔습니다. 이분들에게 어떤 방안이 없을지 장관님께서 이 탄원서를 꼭 읽어주시고 고민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혹시나 이들에게는 중국체류기간을 1년에서 3개월 혹은 6개월로 단축시키는 방안은 없는지요?
장관님께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서울조선족교회 서경석목사 드림.
탄 원 서 (1)
저는 흑룡강성 해림시 영락촌에서 온 이옥란입니다.
1991년 12월 20일에 건너와서 일가친척 없이 지하철역에서 한달 넘게 쪽잠을 자고 어쩌다 일당이라도 나가면 그나마 여인숙이라도 가지만 꽁꽁 얼어붙은 콘크리트바닥에서 자고나면 몸이 오그라 붙어서 바로 서지도 못하면서 눈물겨운 타향살이 참말로 신물이 날정도로 힘들고 지쳤습니다.
배가 고프면 돈도 없고 아껴야 하니까 라면 한봉으로 하루를 버티곤 했습니다. 사골 우리듯이 우려서 물배만 채웠습니다. 출근하려고 차를 타고 가다가 사고나서 목디스크가 왔지만 여지껏 제대로 된 치료한번 못받았습니다. 일하다가 손도 다쳐서 손이 변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불법체류란 신분 때문에 병원도 못갑니다. 아픈 몸으로 악착같이 벌어서 쓰지도 않고 얘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도 보냈지만 다 소용이 없습니다.
몇 십년을 살아온 남편마저 이제 떠나버렸습니다. 병든 몸에 집도 절도 없는 저를 인제 받아줄 사람도 없지만 여기를 떠나선 살 수 없습니다. 다시 재개할 그날까지 여기서 살 것 입니다.
선처하여 주십시오.
탄 원 서 (2)
저는 한국에서 십여년 생활해 온 장영순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힘들고 많은 혼돈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감히 탄원서를 제출합니다.
저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이전인 91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처음으로 한국 국민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어느덧 흘러 십여년 넘게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 진실된 생각은 더 늙기 전에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찬 마음으로 왔지만 지금 본인은 나이도 60이 넘어 노안과 몸이 쇠약하여 이곳에서도 일을 할 수 없으며 구차하게도 외동딸에게 의지하여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현재 외동딸은 한국 사람과 결혼하여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가 국적을 굳이 취득하고 싶은 이유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려해도 다른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지 않고는 스스로는 생활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딸도 힘이 들지만 언제나 같이 생활하며 함께 있기를 바라고 저 또한 유일한 외동딸과 함께 남은 여생을 같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언제나 떳떳하게 양지로 나오지 못하고 생활해 온 본인의 과오를 항상 가슴 깊게 각성하고 있습니다. 이제 딸과 헤어지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아 아픈 마음에서 간절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높으신 분들의 견해로 부디 제가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선처를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탄 원 서 (3)
법무부장관님 !
안녕하십니까? 국사에 매우 바쁘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중국교포로서 1992년 6월22일에 세상천지를 한 가슴에 앉은 듯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 도착하였습니다.
삶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고 쓰러져가면서 일을 하여도 불법이라는 이유만으로 밑바닥 같은 생활을 하였지만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고 어떤 인격직인 대우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졸인 가슴으로 세월은 흘러 강산도 몇 번 번하고 40대 중년은 어느새 환갑이 되었습니다.
고향의 집도 빈터로 덩그러니 남아있고 그립고 그리운 부모, 언니, 오빠들은 저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살아가는 삶이 너무나 허무합니다.
장관님! 이 땅에서 살아가게 해 주십시오.
두 손 모아 정중하게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한국생활도 익숙해 졌습니다. 삼천리 금수강산의 품속 4천8백만의 가슴 따뜻하고 인정 많은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월드컵 한국 경기 때마다 어린 손녀와 밤새워 춤을 추며 “대한민국 파이팅”을 외치고 또 외쳤습니다.
그러나 슬픔과 상처만 남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남은 여생을 내 민족 조국 조상들의 영혼이 묻힌 이 땅에서 세금을 내고 이웃을 도우면서 살고 싶습니다.
두서 없는 글 이해해 주시고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6. 6. 22.
이 채 옥
탄 원 서 (4)
수고하십니다.
고향을 떠나 한국에 거주한지 어느덧 14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중국을 다 잊어버리고 한국을 고향이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저는 열심히 일하며 정직하게 생활했습니다. 한국은 아버지 어머님의 고향이자 제 고향이나 마찬가지여서 한국을 사랑했습니다. 한국은 여러모로 저희가 열심히 일하며 살기 좋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에 와서 중국으로 돌아가서 살기에는 생활풍습이나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중국에는 부모님도 안계시고 제 가족(남편, 자식)이 없으니 돌아가 살 연고가 없습니다. 중국(언어, 글씨)모두다 잊어버리고 어떻게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겠습니까. 도와주세요. 저희가 한국국민이 되어서 나라를 더 사랑하고 애호하고 열심히 일하면서 살게 해주세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고 좋은 일 많이 하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살기 좋은 나라에서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두 손 모아 부탁드립니다. 꼭 도와주세요. 한국에서 돌아가라고 해도 돌아갈 수 없으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똑 도와주세요. 떳떳이 한국에서 살게 해주세요.
수고하세요.
작성자 김 필 순
탄원 서 (5)
안녕하십니까? 저는 1991년 11월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입국한 김영옥입니다. 출생년월일은 1946년 8월 15일 성별은 여자입니다.
한국에 온지 만 15년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각종 서비스업에 일하면서 한국분들의 따뜻한 도움도 많이 받아 왔으나 또한 설음과 고생도 많이 받았습니다. 일부 한국인들의 멸시와 사기에 걸려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고 단속을 피하느라 항상 마음을 졸이면서, 몸이 아파도 편히 쉴 곳도 없이 저희로서는 힘든 일들을 많이 겪어왔습니다. 지금은 정부의 따뜻한 배려로 형편이 많이 좋아 졌는데 정부에서는 중국으로 1년간 다녀오라고 하지만 15년이 지나는 동안 집은 없어졌고 간다 해도 어디로 갈 것인가 갈 곳도 없습니다.
저희 딸은 한국에서 결혼해서 9월에 해산달인데 신체조건이 좋지 않아 중국에서 자라면서 중국말만하고, 한국말도 잘 못하고 사위도 경제능력이 없어서 제가 많이 도와주어야만 생활을 유지할 수 있고 아이도 돌보아 주어야 할 형편입니다. 그러니 모든 형편으로 보아 이런 딸을 떼여놓고 중국으로 갈 수 없으며, 가면 절대로 안 되며 그냥 이대로 딸을 도우면서 한국에서 살게 해주세요.
한국정부에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외국인등록증을 허락하여 주시면 너무 감사하겠습니다. 외국인등록증를 허락하여 주시면 한국 땅에서 딸과 사위와 손자와 열심히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06. 6. 23.
김영옥
탄 원 서 (6)
존경하는 법무부장관님
안녕하십니까? 장마가 시작되는 이때 건강에 조심하시고 항상 웃으시길 바랍니다.
저는 92년 7월 1일에 한국 땅을 밟았고 그와 더불어 15년이란 세월을 이 땅에서 보낸 유명희 라고 합니다. 그 동안 대통령도 네 번 바뀌었고 젊음과 건강도 15년이란 세월 속에 묻어 버렸습니다.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잘 살아 보려고 했는데 꿈이 다 물거품이 되었어요.
15년간 외국에 있으면서 남편과 자식과 멀리 떨어져서 살다 보니 가정이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경제력의 제한으로 인해서 아들을 공부시킬 수 없어서 제가 한국에서 번 돈으로 아들을 공부시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솔직히 일을 했지만 잡히는 두려움에 인해서 돈을 잘 벌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 해서 집에 돌아갈 수도 없고(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연변에 인젠 저의 뿌리가 없어졌습니다.) 정신적으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배달 일을 하다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20분 만에 사고 냈고 뇌진탕이라는 후유증으로 많이 앓았습니다.
그러나 사고 났다고 해서 연변에 있는 친척들에게 알릴 수도 없었어요. 왜냐면 그들이 저를 바라보고 사니깐요… 빨리 병이 났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병은 잘 났지 않았고 후유증으로 일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러면서 많은 약을 지어먹으면서 언제부턴가 후유증이 점차 나아졌어요. 이런 몸으로 또 일해서 식구들에게 돈을 보낼 수 있게 되었고 저도 마음이 한결 가뿐했어요.
그러다가 저와 남편이 이혼 한 다음 호적에는 저 혼자만 남았어요. 한국에서 돈을 번다고 열심히 했는데, 이런 결과를 얻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죠… 어디에 가서 하소연 하겠습니까? 바보짓 한 저 자신만 원망할 뿐입니다. 아들은 아빠의 호적을 따라가게 되었고 엄마를 잘 알아주지 않았죠…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12살에 두고 온 아이가 어느덧 27살이 되었고 그 동안 얼굴을 한번 못 봤으니. 애한테 돈만 주면 되는가 했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애한테는 잘 해주고 싶었는데 상처만 준 격이 됐어요.
그러나 몸 하나 들이 밀 구석조차 없는 제가 누굴 믿고 집으로 돌아가겠어요? 생각 만해도 치가 떨리는데… 근데 정부에서 저희를 자꾸 집으로 가라고 하는데 손에 뭐 쥔 것 없고 가면 집도 없는 제가 어떻게 살아요?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았기에 한국사회에는 많이 적응했지만 중국사회는 저한테 너무 낯선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돈이 있고 행복한 가정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면 제가 제 발로 이미 갔을 겁니다. 그러나 돈도 돈이지만 중요한 건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떠나갔는데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 심정 장관님 이해하시겠죠?
존경하는 법무부장관님. 저를 구해주실 뿐은 장관님이시라 생각합니다. 가여운 저를 불쌍히 여기시여 선처를 베푸시고 선조들이 살았던 이 땅에서 후세들도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장관님만을 믿겠습니다.
장관님의 건강과 가정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사실 저도 이런 희망을 갖고 한국에 왔는데…
2006년 6월 25일 유명희 드림
탄 원 서 (8)
안녕하세요. 저는 1992년 한-중수교 이전(3월)에 친척방문으로 한국에 입국한 중국교포 최봉녀입니다. 1947년생이며 한국에서 생활한지 이미 십 여 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작년쯤에, 법무부에서 韓-中 수교 이전에 입국한 중국교포는 한국국적취득이 허용된다고 해서 저를 비롯한 많은 교포 분들이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결과 역시 한-중 수교 전에 오신 모든 분들이 모두다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극소수가 국적취득을 했다고 하네요.
이번에 제차 소송이 들어간다고 하셨는데 아무튼 좋은 결과가 나와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우리교포 분들께 좋은 소식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한국생활 십여 년 세월에 이젠 얼마큼 적응도 됐고 지금 중국으로 들어간들 어디 마땅히 있을 곳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1992년 제가 한국으로 오기 전에 시내외곽에 있는 작은 주택에서 살았는데 1996년 재건축으로 그때 당시 아들이 중국 돈 6만원을 보상 받고 그 받은 돈으로 택시를 시작 했습니다. 그러던 중 1998년 겨울에 아들이 몰던 택시가 빙판길에서 전복사고가 나면서 크게 다쳐 1년간 병원에서 누워 있었고요… 큰 사고인지라 아들이 병원에서 한동안 일어서지 못한다고 하고 며느리는 어린 손녀를 데리고 병원간호 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애들이 불쌍하고 무슨 큰일이 생길 가봐 몇 번이고 중국으로 돌아갈려고 생각해 보았지만 갈수 없는 상황이란 것을 저 자신이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단 중국에 가면은 그 많은 병원치료비와 생활비를 어디서 도무지 만들 수가 없는 거죠. 아들이 식물인간이 되던 일단 살려야겠다는 생각에 귀국생각을 포기하고 건축현장 식당에서 월 70만원을 받고 삼 년 동안 꾸준히 일했었습니다. 오직 아들의 눈만 뜨게 할 수 있다면 생각엡.
저희 아들은 이미 퇴원했는데 하반신이 영영 장애로 판명이 돼서 집에 있고 며느리 혼자 액세서리 공장에 가 월 인민페 500원 받고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에 있는 가족 상황이 이런 형편인데 제가 중국으로 가게 되면 서로가 살아가기 더 힘들어 질뿐 오히려 어렵게 살고 있는 아들네한테 큰 부담을 주게 될 겁니다.
그리고 제가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남아 있는 한 중국에 있는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녀가 살아가게 될 겁니다
존경하는 법무부장관님, 저에게 희망을 주십시오. 좋은 소식과 건승을 빕니다
여권번호: 2085142
성명: 최봉녀 (cui feng nu
출생년월일: 1947년 7월 12일
입국년월: 1992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