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청신하고 유다른 향기, 작가다운 작가와 독자다운 독자의 기우
1. 작가다운 작가 강준용 편
‘한민족글마당’편집인 임병애 작가의 말이다. 작년 가을, 어떤 문학인모임에 있은 일이라고 한다. 문단에 꽤 이름 있는 한 소설가가 이런 말을 했다 한다.
“강준용, 그 놈 완전 문학에 미친놈이다. '선글라스를 낀 동지' 그 작품, 그런 작품을 써내다니 미친놈 아니야? 섬찍하여 그 작품 한국 문학상 후보에 내가 추천했다. 방자무도한 놈이나, 임병애씨 분명 가서 강준용한테 전하세요. 내가 그 작품, 문학상 후보에 추천했다고!”
200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베트’를 쓴 소설가 유민씨는 강준용이를 떠올리면 이상의 작품 ‘날개’를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강준용이란 작가를 아는 사람들의 평은 거의 비슷하다.
25여 년 간 수락산 밑에 칩거해 있으면서 소설 창작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어온 작가, 먹고 입고 생활하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콧구멍만한 방에 칩거해 있으면서 라면으로 배고픔을 달래면서 수많은 명작을 독파하고 창작에 혼신을 쏟아 부어왔었다.
그는 완벽한 혼자이고 절대적인 혼자만의 세상에서 냉철한 작가의식을 키워왔었다.
그는 인맥이란 개념조차 모른다. 그런 것이 그의 삶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기에 건방지다, 무정하다, 냉혹하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작가의 창작정신과 작품에 머리를 숙이고, 그의 순박하고 순결한 마음씨에 반해 떠나지 못하고 있다.
간혹 곁에서 건강 좀 챙기라고 신경 쓰면 작가는 머리부터 흔든다.
“괜찮아, 이렇게 살다 가면 그만이지. 아파트 있으면 뭐하고 부자가 되면 뭘 해? 나한테는 하나도 소용없다. 내가 한생을 걸어온, 그토록 좋아하는 소설을 쓰다가 어느 날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혼자 가면 그만이다!…그러나 넌 절대 나같이 살지 말거라.”
하기에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와 같은 작가는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다 말한다. 냉혹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에 등을 돌리고 홀로 외나무다리를 걷는 작가적정신이 너무나 강직하고 황홀하기만 하고, 또 너무 외로워 보이어 처절하기까지 해난다.
일단 작품을 말하면 그의 머리는 너무나 명석하다. 비상한 기억력과 예리한 눈길을 갖고 있는 그는 누구의 작품이든지 가차 없이 비평한다.
대한민국에서 원고료로 사는 몇몇 안 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 그 중에도 그는 제일 빈한한 작가에 속한다. 그런데도 잡지사에서 원고요청을 하지 않으면 절대 글을 쓰지 않는다.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내지 않는다. 써놓고는 1년이고 2년이고 놔두고 다듬고 또 다듬는다. 한 편의 단편을 지어 백번까지 다듬는다.
그러나 일단 원고요청이 오면 그는 최선을 다해 목숨 걸고 완성해 나간다. 작품이 곧 자신의 생명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9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창작했고, ‘스콜’, ‘천재의 울음’, ‘별나라를 지나는 소풍’ 등 3부의 장편을 발표하였다. 현제는 대하소설집필 중에 있다.
그는 속인(俗人)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금자탑을 쌓았거나 쌓고 있는 중, 한국 순수문학의 대표적작가로 자리매김했었다.
강준용의 작품세계는 인간의 고독과 더불어 소외당하는 이 사회 최하층인간들의 아픔과 절실한 세계가 휴머니즘으로 핍진하게 그려져 있다. 글을 읽으면 구절과 표현들이 마치 콩알 구르듯 생생하고 또렷하게 전달되지만, 작품 전반에 걸쳐서는 특유의 의식과 표현으로 무게를 더하며 유다른 감칠맛을 남기고 있다. 그만이 캐릭터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영양출신인 강준용은 삼십대까지는 영양의 큰 부자 집 아들이었다고 한다. 문학을 시작해서부터 그는 재부를 초개같이 여기고 오로지 소설적인 삶을 지향해 왔었다.
“30년을 부자로 살았으니 이젠 가난뱅이로 사는 것도 의미 있는 인생이 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살아왔었다.
세속의 눈에는 무정하고 비정해 보일지 모르지만, 작가의 가슴 속 깊은 곳에는 순백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 그는 두만강을 좋아했고 오월이면 온 산을 하얗게 뒤덮는 연변 모아산(연길과 용정 사이)의 사과배꽃을 좋아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는 동포 시인과 동포 작곡가가 지은 ‘눈이 내리네.’이었다. 두만강 기슭에 초가집 짓고 흐르는 우리 민족의 강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싶은, 인간 본유의 질박과 평화를 사랑한 것이다.
그런고로 작가는 중국조선족문단과 특유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작가적인 삶은 구경 어떻게 살아야 하고 글은 구경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었다. 충분한 의식과 감동을 주면서 동포문학의 탈피를 이끌어 주었었다.
해마다 한민족글마당 ‘해외동포문학상’을 제정해서 창작성과가 뚜렷한 조선족 동포작가 몇 분을 선정해 수상식을 거행해 왔었다.
없지만은 성의껏 만들고 뭔가 못줘 안 달아하는 마음씨와 끈질긴 노력은 동포문담에 미담으로 남고 있다.
작가다운 작가, 그는 오직 강준용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그에게는 명언 하나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뿐이다!”
*강준용 약력-52년 경북 영양출신.[월간문학] “하얀궁전” 과 [예술계] “개의 행복”으로 등단. 한민족글마당 편집인. (참조 한민족글마당 홈페이지 http:// gul.fu.st)
2. 독자다운 독자, 김혜숙 ‘초설회’ 회장 편
김혜숙씨는 평소 작가 강준용과 개인적으로 알고 친분을 쌓아온 사이가 아니다. 인연이 있었다면 같은 영양사람 이란 점이다. 영양태생으로는 문단에 널리 알려진 조지훈, 오일도 시인, 이문열 작가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강준용 작가의 삶과 작품에 매혹된다.
그녀는 문학 소녀였다. 그녀의 꿈은 시골학교에서 풍금을 치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여선생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은연중 남편을 만나 사업가가 된다. 자식을 낳고 살림을 살면서 부족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돈을 벌게 되었다.
돈 번 사람은 돈으로 끝나는 것이 세속 흔히 보는 사정 이야기이다. 그런데 김혜숙씨는 왜 고독한 작가 강준용과 그의 작품세계를 선택하고 거기에 빠져들었을까? 눈 속에 돋아나는 파란 풀- ‘초설회’란 애독자클럽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일까? 그녀가 운영하는 ‘초설회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의혹은 인차 풀리게 된다.
문학인이 되지 않았으나 그녀는 문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의 평생은 독서로 일관된다. 특히 문예물 독서가 전부였고, 한국문학은 물론 세계 문학을 탐독했다. 우연히 강준용의 작품을 접한 그녀는 작가의 작품과 문학예술적인 삶에 매료된다. 문예물은 예술로 승화되어야 하고 작품에는 작가의 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독서론에 부합되었다.
작가의 전 작품을 독파한 그녀는 홈페이지에 부지런히 독후감을 남기고 있다. 작품을 파고드는 의식과 글 솜씨에는 고급독자의 예리함이 그대로 묻어있다. 그녀는 초설회의 초기 사명을 이렇게 규명했다.
“황금만능주의에 점령당한 오늘날 사회는 사람들의 근본을 파괴하여 악성 이기주의로 채우게 합니다. 초설회는 소설가 강준용의 문학예술적인 삶과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마당으로 순수한 문학예술을 통해 순수와 인본을 찾아보려는 의도를 두고 있습니다.”
“초설회는 작품 평 및 토론하는 일반적인 독자 회를 탈피, 회원들의 의식과 사고를 기본에 두고 친목으로 교류하는 진일보적인 인간생활을 가지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회를 이끄는 방법도 고품격이고 낭만적이고 사고적인 데 두려합니다.”
작가들과의 만남, 강준용을 비롯한 순수문학인들을 초청해 초설회원들과의 작품토론 및 작품 전반에 대해 논의. 회원 독후감 발표. 독서 토론회조직. 정기적인 독자모임과 고급독자 양성 등. 문학인들과 초설회원들과의 만남을 정기적으로 주선하고 문학인과의 세계여행을 기획하고 회원간의 원만한 온라인교류를 통해 좀더 실질적으로 고급 문예작품 독서보급을 지향시키려 하고 있다.
김혜숙 회장은 이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초설회’의 운영방침을 이렇게 독서에 초점을 맞추면서 문학의 묘미와 작가의식 발굴, 예술적 감흥 공감대 형성하기 등에 둔 것이다. 갓 뗀 발걸음 폭은 비록 작지만 화려함을 버리고 순수하고도 진지한 유대를 만들려는 애틋한 몸짓이 엿보이는 발상이었다.
지금까지 부를 쌓아 왔지만 그런 것 초개같이 여길 수 있는 초연한 마음, 인간 본연의 의식과 수더분한 행동거지, 순수한 지향성!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를 위해 기꺼이 헌신해서 강준용 문학을 비롯한 한민족의 진정한 문학예술을 꽃 피우는데 자그마한 힘이라도 바치려는 끈기 있는 노력! 또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바른 양심과 빛을 찾아보려는 몸짓이 마치 수수한 무명치마의 팔락임처럼 너무나 순박하고 예뻐 보인다. 감동과 감사가 만개 한다.
초설의 향기는 이제부터 차츰 온양되고 산뜻하고도 뜻 깊게 풍기게 될 것이다. 누구든 고급 독자라 판단되거든 초설회에 가입하여 고급 독자가 되어보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가족처럼 친분을 가진 좋은 회원들이 그대를 맞아 줄 것이다.
초설회 홈페이지: http://cs.jo.st
3. 초설회에 부친 강준용 작가의 글
님들과 나
문학을 한다고 세상을 헤맬 때 나한테는 측근이 없었다. 나의 미래가 확실하게 보였는지 사람들은 나를 멀리했다. 그 누구도 나로 인해 이익 볼 일이 없으니 내가 필요치 않았다. 그야말로 날쌘 놈이었다.
항상 이방인처럼 빈민들 주위로 겉돌았고 누구 하나 나에게 관심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됐고 현실의 기쁨과 슬픔과 괴로움을 혼자 맛보고 느껴야 했다. 세상은 온정한 것이 아니라 비정함의 반석으로 이뤄진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삭막하고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그 냉정의 반석위에서 삶을 지탱하는 방법을 익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신의가 있고, 늘 남을 위해 나를 조금 손해 시켜야 한다는 내 기본사고는 삭막하고 비정한 주위의 냉기로 인해 전혀 다른 변의력을 받게 됐다.
두엇 평 갓 되는 텅 빈 방에서 원고지와 마주 않아 나는 나를 이해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잉태시켰다. 비록 그들은 허구의 인물로 그려지나 나에게는 실지 인물과 같았다. 나는 그들이 나를 이해하도록 캐릭터 노출에 노력했으며 그들이 슬픈 일을 당할 적에 나는 서러워 혼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간혹 이들이 해학적으로 그려져도 그 사고의 끝에는 늘 비극이 연출됐다. 사람이 위대한 것은 웃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릴 줄 알기 때문이다. 눈물은 마음이 드러내는 자아의 분신이다. 자아를 표현하는 진한 엑기스가 눈물이 된다. 그러나 나는 곧 그 눈물을 잃어버렸다.
세상은 더불어 사는 것이라 배웠으나 나는 홀로 사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누구든 나와 더불어 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누가 있든 없든 나는 책을 읽고 소설 습작을 했다. 책 많이 읽었다는 사람 중에 나도 빠지지 않을 것이다. 공부보다도 할 일 없어 책을 읽었다. 예술, 문화, 사회, 경제, 철학, 종교, 과학 심지어 의학서적을 비롯하여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덕분에 나는 남들이 가지는 술좌석의 주색 유흥과 스포츠 및 취미 활동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돈 드는 일은 전혀 하지 못했다. 한참 나이의 청 중년기를 20여 년 책 읽고 글 쓰는 일에 보내고 나니 남는 것은 소설 쓰는 재주 밖에 없었다. 그 중에 민중서관에서 나온 이희승 저 국어대사전을 다 외운다고 청승 떤 일이 내게는 남들이 가지는 재미난 추억거리 중에 하나이다. 이런 무모한 내 꼴을 지켜본 정공채 시인은 남들한테 나를 소개 할적마다 국어대사전을 외우려는 문인이라고 했다. 사실 국어사전은 나의 심심풀이 놀이용으로 아직까지 나의 가장 측근에 앉아 내 손때를 타고 있다. 단어 헌팅이야 말로 나의 유일한 낙이고 소일거리이다.
등단 후 몇년 동안 나의 타협하지 않은 고집 탓에 나는 계속 문단에서도 외톨이가 되어 언더 그라운드의 소설가가 되었다. 그러나 나를 이해하는 분들이 한 두 명 나타나고 나에게는 다시 내가 잃어버렸던 눈물이 생겼다. 나는 지금까지 소설을 써서 밥을 먹어야 하고 이름을 얻어야한다는 판단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설가가 직업이라고도 여기지 않았다. 그냥 소설을 쓰는 것이 좋고 소설을 쓸 적에 나는 내가 살아있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감히 말하건데 진짜로 소설을 써 보면 글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참으로 신기하다. 글자들이 개울물처럼 흘러가고 뭔가에 부딪히며 여울을 일으키고 깊은 물에 들며 소리 없이 움직인다. 나는 이 소설의 물살과 흐름과 그 물의 흐름이 지워내는 그 분위기를 좋아한다. 글자 하나에 전체의 물 흐름이 달라지기에 나는 글자 하나를 생명으로 여긴다. 그것들이 완성되어 조용히 흘러갈 때 나는 소리 없이 흐느껴 운다. 나는 내 소설을 사랑한다.
나는 내 소설의 이러한 문체를 초설체라고 짓는 건방진 일을 저지른다. 초설은 내가 좋아하는 단어이고 내가 지은 나의 호이다. 20대 초 늦겨울 날 나는 하얀 눈 속에서 피는 파란 풀 싹을 보고 신기함에 반했다. 흰색과 푸른색의 대비도 경건했으나 동토의 땅을 뜷고 당당하게 자신을 보이는 그 풀의 저력에 반했다. 나는 그 풀이 되고 싶었다. 더러운 세상이 아닌 하얀 진실의 세상에서 나는 나의 삶을 살아 보리라 판단했다. 그러나 세상은 눈처럼 희지 않았다. 나는 나를 초설(草雪)이라 부르고 싶었다.
세월은 흘러 나는 90여 편의 초설을 피워냈다. 자연의 숲 속을 흘러내리는 강물처럼 내 작품은 잘나지도 못나지도 않고 물 흐르는 대로 자연이 흘러가고 있다. 내 작품이 걸작이든 추작이든 남이야 무슨 평을 하든 나는 전혀 관계없다. 나는 내 좋아하는 초설을 피워 냈을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나는 내 작품에 최선을 다했고, 작품이 좋지 않다면 이건 내 능력의 한계이다.
이제 허적거리며 혼자 걸어온 25여 년, 내가 피운 초설을 보며 아끼는 분들이 나타났다. 이제 나는 나 혼자서 눈 속에 자라는 그 외로운 투쟁자를 보지 않아도 된다. 그것의 저력과 신비감과 순수성을 이해하는 이들은 곧 나의 벗으로 파생되어 나에게 눈물을 흘릴 자유를 준다. 나의 문학생활을 깊이 이해하고 따라준 임병애 소설가님께 고마움을 드린다. 그녀는 수많은 문학인들 중에 그래도 초설처럼 살아가고 있는 유일한 문학인이다. 미진한 나를 좋게 여겨주는 문단의 내 친한 문인 분들이 있는 한 초설은 강건하게 자랄 것이다. 근자에 초설을 찾아 먼 길을 유랑해온 소설가 유민의 애착심도 내 마음에 감동을 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초설을 보며 직접 가꾸는 김혜숙 회장님의 초설 사랑에 고마움을 드린다. 외진 곳에서 저 혼자 피고 진 탓으로 감동을 은닉시키며 피는 초설의 모습을 노출시켜준 그 성의는 무엇보다 값진 것이다. 김순옥, 김태현, 박노겸, 권영원, 구본설, 금동효, 김석진 등 - 초설을 보려고 참가해 준 회원분들께도 감사드린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다. 이 말로 초설회원님들께 보답하고자 한다.
그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