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작가포럼/문학작품 특집67]리춘화의 시 '사진액자' 외11수
2019-03-29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 리춘화의 시는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시의 내적 운률의 리듬을 터득하고, 또 그것을 타고 시상을 펼치면서, 시의 완성도를 한결 높여가고 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시상, 즉 사색의 진화라겠다. 생각하는 시가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직설적인 표현을 거부하며 시속에 생각을 담아가고 있는 것 같다...<편집자>
1.
사진액자
이역 땅의
이른 숨결 느끼며
눈뜬 흐름들
첫 여행길의
색다름 찾아
지금도 나 헤맨다
오랜 시간
시들한 감각들이 흩어져 있는
도시의 고인 물에서
집에서 일터
일터에서 집
여러 해의 일자형 왕복 속에
액자 속으로만 굳혀가던
생각들과 이미지가
틈새를 밀고 냇물로 흐른다
전철 타고 서울 누비면서
흐름에 몸담고
흐름에 생각 담으며
외형이 아닌
안으로 창구 내며
오늘도 흐른다
2019년2월4일
2.
가을 여자
난 지금 유리창에 갇혔다
내 속에 전세 놓으려
비집는 푸른 잎 느끼면서
긴 호흡 불러본다
젊음의 뭉클함
거침없는 폭포수에
잠깐 홀린 듯 멈칫
손끝에 닿는 벽에
쉰 목소리 부딪친다
환절기 문턱에 올라오니
먼지 낀 바퀴
굴러가는 소리 들린다
단풍 비 내리는 거리가
눈 쌓인 거리로 겹쳐지고
그 사이로 새 길이 돋는다
우주는 흐르면서
자기 궤도에 갇혀있다
2018년 11 18
3.
흔적
더듬고 싶다
곳곳에 스며있는
형체 없는 체온을
기억은 휘-청 헛발 딛고
내 등교 길도 다듬어지고
그 거리 지나는 나는
한낱 투명 인간이다
옛날 김삿갓이 떠오른다
앵두가 담넘던
엄마이야기 지워졌고
층집에서 봄이 꽃 피는
새 풍경화가 펼쳐졌다
거듭 호흡해온 배경이다
손금 같았던 고향에서
난 미아(迷儿)가 된다
추억이 숨 쉬는 쉼터가
흔적조차 없어졌다
원 주소가 지워졌다
엄마 없는 고향은
아픔으로 멀어진다.
2018 10. 18
4.
찰랑
찰랑-
마음에 파문이 인다
무엇이지?
다만 진동으로
무게를 느낀다
이름 모를 감각 조각들
꿰 놓고
딱지 붙이려 한다
그간의 몸부림짓거리
여의도의 비속에서도
햇빛과 윙크했었지
바뀌는 강가를 읽으며
그렇게 시냇물은
졸졸 흐르고 있다
참다웠니?
긴 침묵...
삶에는 구경꾼이 없다.
2017년 5월
5.
상실 그 여음
아픔 한그루
허울 벗는다
겨울에 알몸만 남는다
해살 같은 엄마는
어둡게 떠나셨다
의자에 앉은 채로…
뿌지직-
바줄 끊어지는 소리
지금도 만져진다
나 승냥이 같이 울었다
내 지각(地壳)에 지진이 났다
그리고 그 뒤
간헐적인 통증 겪으면서
난 폐품처럼 고장 났다
예고 없이 하나 둘 떠나버린
저문 저 하늘 밭에
바래진 이야기는
가슴 벽 굵게 긁어놓고
아픔으로 봉인된다
2018년 11월 30일
6.
가는 길
가끔 막히었다
가끔 끊기였다
사막지대다
질식사하는 끝머리에서
홀연 생이 번개 친다
스르륵 문 열고
기척 없이 온다
환한 얼굴로 탁 치며
길을 낸다
2018. 12. 16
7.
점
흐릿한 점
언제 쑥 들어왔지?
가지 뻗는다
옛 사진 배경 숙의한 모습
언뜻언뜻 수천만 인구
멈추어주며 다독이는
아 무엇이지?
익숙한 듯 생소한 것
어떤 의미로 다가서는 것은
빛주고 세월 주고
심혈 기우려
싹 키우는 일
인연은 점으로 나타나
입체로 움직이고
점으로 떠난다
타향살이 몇 년 세월
인연도 흐르는 물이다
2018 12. 22
8.
미련
이미 멀리 사라졌다
지진의 폐허 남겨두고
현실이 슬며시 커튼 친다
거리에서 얼핏 보았다
얼굴없는 뒷모습을
혼 들린 듯 뒤 쫓았다
간절한 맘이 잡으러 해도
그리움으로 밧줄 꼬아도
붙들 수 없는 거리다
남아있는 웅덩이만
그 시간을 기록하고
가끔 신음한다
소중한 것일수록
상실의 균열이 깊다
청명날 담밖에는
아지랑이가 아른 아른
엄마가 쓰는 봄편지인 가봐
9.
긴 줄
여러 이름으로
나를 채우는 감옥이었다
다른 세상에서 왔다
하나는 고대에서 왔고
하나는 현대에 머무르고
툭탁 부수고 고치고
해도 비뚤게 달아놓고
근시안경 착용하고
고서를 끼고
과거에 머물러 있다
재해 지구에 간 듯
적신호만 한 수레 보낸다
이탓저탓 세상 흉보는 새에
빛이 시들어 말라버리고
사막이 펼쳐지고
역사가 빗장 건다
탯줄 끊고 철새처럼
훌 날아 떠나서는
냇물 앞에도 서보았다
뒤돌아보는 시선 느끼며
아, 이 긴긴 줄은 무엇이지
2019년1월22
10.
늦잠
아침이 바위에 눌리여
눈 뜨니 지각이다
지구는 차량이다
매 순간 버리고 담고
엇갈리는 희비극
늘 쉬고 싶다는 생각이
폐차를 만든다
이웃언니는 일흔에도
춤이 아이돌이다
하루가 배달된다
빨대들로 건강이 수입된다
폐차도 중고도 수리하면
속도 내기는 마찬가지다
내 속의 채찍소리는
줄타기 탐하는 사치는 아니겠지
2018년12월
11.
숨 쉬는 것
가슴에 많은 칸이 있다
금이 생긴 비좁고
거미줄 얽힌
작은 칸에 갇혀 있는
짐승을 방생한다
내 생각의 오지(奥地) 가
붙들어둔 보디가드
너를 놓아준다
세월이 남긴 종양(肿瘤)을
수술 칼로 자르고
벙어리 무덤 만들며
안으로만 겨냥한 총소리
어두운 수림 지나서
순리 찾으라
웃음 짓고 내보낸다
2019년 1월
12.
담 너머
번져지는 불길
날름날름 혀를 내민다
가지 타고 넘어온 봄이다
앵두가 눈뜨면
이웃시선도 담 넘을까
홍조띤 앵두
한 알 따 입에 넣어본다
봄이 천천히 번진다
지나간 나날의 향연(香宴)
풍년의 약속도 씨앗 묻는다
항아리에 봄 몇 줌 따 넣고
꽁꽁 덮어둔다
과일즙 빚듯
술향 빚 듯.
2018년12월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