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작가포럼/문학작품 특집62]김호웅의 수필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외3편
[서울=동북아신문] 중국 조선족 유명 평론가 김호웅은 연변대학 교수, 박사생 지도교수이다. 그의 평론은 작품에 대한 투철한 이해로부터 나오는 비교적 합리적인 사색과 판단, 날카로운 비평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런데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점은, 그 바쁜 여가에도 짬짬이 발표하고 있는 그의 수필 창작 성과이다. 그의 수필은 거의가 자신이 겪은 사실과 경험을 바탕으로 써내고 있는 논픽션 형식의 글이다.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특수한 위치에 있는만큼 그의 수필은 단순한 문학성을 떠나 학계와 문학계의 자료성적이고 역사성적인 데이타도 내재하고 있기에 중국 조선족 수필 문학에서는 나름대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편집자>
제1편
제4편
한 그루 무궁화
요즘 세상살이가 어렵고 인정이 메말라가고 있다고 하지만 가끔 빈 들판에 핀 가을 국화와 같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이 세상이 한결 따스한 느낌이 든다. 왕유 왕유(王瑜), 한족, 교수, 강소성 무석시 출신. 1934년 5월 19일 상해시에서 태여나 1953년 중경 남개중학을 졸업하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소련 모스크바 레닌사범학원 로씨아언어문학학부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연변에 와서 연변대학교 로씨아학부와 영어학부에서 교편을 잡았고 학과 주임, 학부장 등 직무를 역임했으며 1996년 정년을 했다. 연변대학교의 영어학과 설립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조선족의 외국어 교육 및 영어, 조선어, 한어 비교연구에 관한 다수의 론문과 저서를 내놓았으며 정년 후에는 조선족 문학지에 여려 편의 글을 발표했다.
교수가 바로 그러한 분이다. 왕유 교수라 하면 잘 모르실 분들이 많겠지만 이분이 바로 연변대학의 저명한 영어교수요, 고(故) 정판룡 교수의 사모님이다.
왕 사모님은 1934년 상해에서 태어나 1953년 중경 남개중학교를 졸업하고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구소련 모스크바 레닌사범학원 러시아 언어문학학부를 졸업했다. 왕 사모님은 거기서 만난 정판룡 교수를 따라 연변에 왔고 연변대학교에서 러시아어와 영어를 가르치면서 장장 46년 세월을 하루와 같이 조선족형제들과 함께 살고 있다.
왕 사모님은 1996년에 정년을 했고 2001년 평생의 반려요, 지기인 정판룡 교수를 여의고 외기러기 신세로 지내고 있다. 딸 홍(虹)이네 식구와 아들 진(辰)네 식구가 모두 일본에 있어 혼자 지내는 왕 사모님의 모습이 안쓰러울 때도 있지만, 기실 그는 여전히 이 가을도 지칠 줄 모르고 꽃을 피우는 무궁화처럼 일에 바쁘고 사랑을 나누기에 바쁘다.
자, 연변대학교 서대문 옆에 있는 왕 사모님네 댁으로 가보자.
호쾌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정판룡 교수의 유상이 벽 중앙에 걸려 있는데 그 아래에는 일본에 있는 손녀, 손자 녀석들이 할머니를 위로하느라고 빨갛고 노란 크레용으로 그려 보낸 크고 작은 그림들이 붙어 있다. 토끼나 노루와 같은 착한 짐승도 보이고 퉁방울 같은 눈을 부릅뜬 호랑이도 보인다. 서툴고 우습기는 하지만 애들의 천진난만한 동심과 환상력이 꼼틀거려 볼수록 웃음이 절로 나온다. 정판룡 교수가 앉아있던 안락의자에는 수염이 달린 큰 인형이 비스듬히 앉아 있다. 왕 사모님의 말씀으로는 정판룡 교수라고 한다. 묵직한 테이블 위에는 큰 화분에 자란 무궁화 한 그루가 탐스러운 꽃을 떨기떨기 피우고 있다.
왕 사모님은 바로 여기서 일하고 계신다. 자서전을 쓰고 후학들의 논문을 수정하고 영어강습반 강의안을 짜기에 늘 바쁘다. 정판룡 교수가 작고한 뒤로는 무궁화를 손보아 주는 일도 왕 사모님 혼자의 몫이라 이래저래 늘 바쁘다.
오늘은 왕 사모님의 에피소드 몇 가지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좀 버릇없이 왕 사모님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용서해 주기 바란다.
왕 사모님의 한복차림
우리 제자들은 왕 사모님을 두고 “연변의 왕소군”이라고 한다.
왕소군(王昭君)은 중국 한나라 원제(元帝) 때의 궁녀인데 기원전 33년 흉노(匈奴)와의 친화정책을 펴기 위해 흉노왕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을 갔던 절세의 미인이다.『서경잡기(西京雜記)』에 따르면 원제는 화공들에게 궁녀를 그리도록 명하여 그림을 보고 마음에 드는 여자를 불러들였다고 한다. 궁녀들은 모두 화공에게 뇌물을 주고 아름답게 그려달라고 했으나 워낙 성품이 정직한 왕소군은 뇌물을 주지 않아 추하게 그려졌다. 원제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왕소군을 호한야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였다. 왕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야 그녀의 뛰어난 미모를 알게 된 원제는 크게 후회하였다. 그러나 흉노와의 신의를 저버릴 수 없어 그녀를 보내고는 화공들을 죽여 버렸다고 한다. 아무튼 왕소군의 이야기는 후세에 널리 전송되었고 많은 문학작품에서도 다루어졌는데 원대(元代) 마치원(馬致遠)의 희곡『한궁추(漢宮秋)』를 최고의 걸작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왕 사모님을 왕소군과 동일시하는 것은 심통한 비유라고는 할 수 없다. 왕소군은 흉노와의 화친을 위해 제물로 바쳐진 셈이지만 왕 사모님은 사랑하는 남편을 따라 연변에 왔고 평생 조선족형제들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 사모님은 성씨도 왕소군과 같은 왕씨(王氏)요, 자색에 있어서도 결코 왕소군에 짝지지 않으니 그녀에 비유해도 크게 어폐는 없으리라.
언젠가 왕 사모님네 댁에서 사진첩을 본적 있는데 20대의 나이에 러시아 볼가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이 사진은 요즘 왕 사모님의 자서전 『남에서 북으로 날아와 70년 세월(從南到北七十載)』에도 수록되었는데 가히 20세기 미스 차이나 반열에 올릴 만한 아름다운 용모였다.
왕 사모님은 이젠 칠십 고개를 넘은 분이지만 그냥 해맑은 얼굴에 날씬한 몸매를 간직하고 있다. 제자로서 사모님의 자색을 두고 품평을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지만 우리 부모님의 회갑잔치 때 얼핏 본 그분의 백옥 같은 살결을 나는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큰형 봉웅, 셋째 형 관웅, 그리고 넷째인 나까지 정판룡 교수의 문하에서 문학공부를 했는지라 우리 부모님의 환갑잔치에 정판룡 교수 부부를 모셨었다.
그 날 환갑잔치는 요즘처럼 화려한 호텔에서 한 게 아니라 연길시 광명가의 어느 널찍한 노인 독보조를 빌려서 했다. 아마도 지금의 코스모호텔 뒤에 있었던 것 같다. 환갑상을 차려놓고 어르신들을 모시는데 자연 정판룡 교수는 우리 아버지 옆에, 왕 사모님은 우리 어머니 옆에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울긋불긋 풍성한 한복들을 차려입은 우리 어머니와 안사돈들 사이에 끼인 왕 사모님의 옷매무시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수수한 남색 평복을 입고 오신 것이다.
연변박물관의 사진작가가 카메라를 들고 있다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왕 사모님도 한복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한 구들 되는 자식들을 다 출세시킨 집안의 환갑잔치라고 사진작품으로 만들어 연변박물관에 번듯하게 걸어놓을 심산으로 이른 아침부터 박물관에서 고풍스러운 병풍을 빌려오고 “어동육서, 홍동백서(魚東肉西, 紅東白西)요”하며 직접 환갑상을 차려온 사진작가인지라 그의 아집을 꺾을 수 없었다.
우리 형제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난색을 지었다. 누가 감히 한족인 왕 사모님을 보고 한복으로 갈아입으라고 권할 수 있으랴!
버르장머리 없는 비유지만,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일은 내가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왕 사모님을 조용히 병풍 뒤쪽으로 모셔내다가
“오늘 환갑상을 받는 장면은 연변박물관에 영구히 전시한답니다. 죄송하지만 사모님께서도 한복으로 갈아입었으면 하는 데요…”
하고 한 마디 조심스레 여쭈었다. 그랬더니 왕 사모님은 당신 자신의 옷매무시를 얼핏 내려다보더니
“나두 닭 무리에 오리가 끼인 격이라 생각했어. 헌데 한복이 있어야 입지.”
하고 천만뜻밖으로 한복을 입겠노라고 했다.
나는 얼씨구 좋다 하고 이 소식을 형제들에게 알렸고 누님은 득달 같이 달려가 여벌로 장롱에 넣어두었던 한복을 받쳐 들고 달려왔다. 누님이며 큰형수며가 마치 황후를 모시듯 왕 사모님을 옹위해 가지고 옆방으로 들어가는데 얼마 뒤 방안에서 아낙네들이 호들갑을 떠는 소리가 새여 나왔다.
“과시 미인이야!”
이는 걸걸한 성격의 누님 목소리였고
“아이구, 어쩌면 살결이 저렇게 희지요. 떡가루 같아요.”
이는 큰형수가 혀를 차는 소리였다.
나그네 귀 석자라고 나는 그 소리들을 다 들었고 호기심을 참을 길 없어 슬쩍 열린 문틈으로 들여다보았다. 누님과 큰 형수가 왕 사모님에게 치마를 입히고 나서 저고리를 입힐 차례였는데 두 팔을 벌리고 얌전하게 입혀주기를 기다리는 왕 사모님은 그야말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처럼 아름다웠다. 비둘기 잔등 같은 동그란 어깨, 백옥 같은 두 팔, 이팔청춘 소녀처럼 홍조를 머금은 능금 같은 두 볼, 그야말로 화용월태(花容月態)라 눈이 부셨다.
쉰 고개를 넘어선 분이 저토록 아름다울진대 처녀시절에는 과연 얼마나 청순하고 싱싱했을까! 그래서 천하에 비위 좋고 넉살좋은 정판룡 교수도 시퍼런 대낮에는 도무지 프로포즈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지지리 못나게도 둘이 암실(暗室)에서 사진을 현상할 때에야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덥석 왕 사모님의 손을 잡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날 한복을 입고 앉은 왕 사모님의 모습은 참으로 한 떨기 꽃과 같이 아름다웠다. 더욱이 일개 대학교의 유명한 영어교수가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조선족 노인네들 사이에 허물없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우리 형제들은 물론이요, 연변박물관의 사진작가도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대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후일 이 사진은 확대, 현상돼 연변박물관에 전시했는데 좋이 10여 년은 걸려있었다. 요즘 연변박물관이 진달래 광장 쪽으로 옮겨간 뒤로 그냥 걸어두고 있는지 한 번 확인해 보아야 하겠다.
아무튼 남방의 대도시에서 자랐으되 뽐낼 줄 모르고, 모스크바 유학까지 한 적 있는 영어교수가 가두의 노인네들과 허물없이 앉아 있는 모습, 철두철미 한족이지만 조선족의 풍속과 습관을 존중하는 왕 사모님을 우리 형제들은 우러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왕 사모님 마음은 열두 폭 치마
한평생 서캐를 훑어야 하는 언어학을 전공한 까닭일까, 왕 사모님은 성미가 꼼꼼하고 날카롭다. 영어로 말하자면 노(no)와 예스(yes)가 분명하다. 그녀 앞에서 근신(謹身)하지 않고 흰소리를 치거나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 상대가 남편이든, 교장이든, 제자이든 관계없이 따끔하게 일침(一針)을 놓는다. 우리 제자들은 정판룡 교수한테서는 별반 꾸중을 듣지 않았지만 왕 사모님에게서는 거개가 한두 번씩 코를 떼였다.
왕 사모님은 문자에 밝아 정년을 한 후에도 연변대학교의 최대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간명한국백과전서》를 비롯해《조선-한국학연구총서》의 문자수정을 맡아했는데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얼렁뚱땅 원고를 낸 친구들은 모두 혼쭐이 났다. 원고만 수정해 연구소에 돌려주는 게 아니라 마치 소학생의 숙제검사를 하듯이 직접 당사자를 불러다놓고 깐깐하게 설명을 하고 해석을 하는지라 그네들은 진땀을 내야 했다. 왕 사모님은 설사 연변대학교의 석학으로 정평이 난 학자의 원고라 해도 새까맣게 고쳐서 되돌렸다. 그래서 왕 사모님을 경이원지(敬而遠之)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실은 그의 깊은 속내를 모르기 때문이리라.
왕 사모님은 원리원칙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고 학문적인 문제를 두고는 미주알고주알 캐고 들지만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더없이 너그럽고 대범하다. 그야말로 왕 사모님의 마음씨는 열두 폭 치마라 하겠다. 남편인 정판룡 교수와의 사이도 그런 줄로 알고 있다.
정판룡 교수는 워낙 학식도 인품도 넉넉한 사람이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을 한 품에 안을 만한 호걸남아라 그를 따르는 여성들이 꽤나 많았다. 우리 문단의 해반주그레하게 생긴 여류작가들도 정판룡 교수를 졸졸 따라다녔고 우리 대학의 여성 교수들 중에도 은근히 정판룡 교수를 사모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 한 여교수는 얼굴이 반반하게 생긴데다가 노래를 썩 잘 불렀고 글재주도 좋았다. 정판룡 교수도 그녀를 퍽이나 예뻐해 주는 눈치였는데 그녀는 내놓고 정판룡 교수를 감싸고돌았다.
연변대학교 남녀 교수들이 가끔씩 연길시 중심가에 있는 근사한 식당에 가서 회식을 하고 돌아오면 정판룡 교수와 그녀는 우리와 함께 연변대학교 서대문까지 왔다가는 슬쩍 자취를 감추곤 했다.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호젓한 다방을 찾아가 밤늦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던 것이다. 왕 사모님도 이를 모를 리 없었고 그래서 그녀를 좀 쌀쌀하게 대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2001년 가을 정판룡 교수가 결장암에 걸려 2년 남짓이 고생을 하다가 운명을 하게 될 무렵인데 그 여교수가 조용히 왕 사모님을 찾아왔다.
“사모님, 제가 정 교수님을 하루 밤만 간호하고 싶은데요. 허락해 주시겠어요?”
왕 사모님은 그만 억이 막혔다.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철면피할 수 있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가더란다. 내 남편이 얼마나 멋지고 얼마나 좋았기에 피골이 상접해 임종에 직면한 이 마당에 하루 밤 모시겠다고 나서는 여인이 있단 말인가. 또한 남녀관계를 막론하고 세상의 인심이란 얻어먹을 게 있으면 아첨을 떨고 애교를 부리다가도 얻어먹을 게 없으면 등을 돌리기 마련이거늘 이 여자가 무엇을 바라고 정 선생을 모시고자 하는가. 그게 바로 이슬처럼 맑은 인간의 정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니 그녀가 측은하게 보였고 하룻밤 정 선생을 모시겠다고 하는 그녀의 행실이 결코 밉지 않았다고 한다. 왕 사모님은 그녀더러 하룻밤 정 선생을 모시게 하였다.
물론 그 여교수는 이 일을 두고 왕 사모님을 더없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 왕 사모님 또한 일생에 제일 잘 한 일 가운데 하나가 그 여교수더러 하룻밤 정 선생을 모시게 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자는 시 300수는 생각에 사악함이 없다(思無邪)고 했다. 왕 사모님이야말로 티 없이 맑은 거울과 같은 분이라 그분의 앞에 서면 경건해지지 않을 수 없으며 넋이 맑아짐을 경험하게 된다. 단순하고 천진하지만 인간적 깊이가 있고 아름다운 천품을 지녔지만 언제나 수수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왕 사모님, 그야말로 “물은 깊으면 조용한 법”이라는 어느 명인의 격언을 떠올리게 한다. 왕 사모님의 믿음 속에 정판룡 교수를 하룻밤 시중든 그 여교수도 정성을 다 고였을 것이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체험했으리라 생각한다.
왕 사모님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
며칠 전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문득 전화가 걸려 왔다. 연변병원에 입원한 왕 사모님의 전화였다. 사모님은 요추(腰椎) 통증으로 오래 동안 고생을 하다가 며칠 전 수술을 받고 연변병원 골과병동에 입원을 하고 있었다.
“후슝(虎雄)―”
왕 사모님은 언제나 그러하듯이 일단 내 이름을 불러놓고
“오늘 점심 내 병실로 왔을 때 104호 병실에 있는 한 정실이라는 애를 보고 왔었지.” 하고 말꼭지를 뗐다.
“예, 그랬는데요.”
“글쎄 그 애가 엄마와 함께 방금 날 보러 왔지 않겠어. 고맙게도 음료를 사들고 말이야. 이태 전 정 선생이 만든 아동장학금을 탄 적 있다고 해. 그래서 감사를 드린다고 했어. 얼마나 착해. 헌데 엄마, 아빠가 다 하신을 잘 쓰지 못하는데, 설상가상으로 그 애마저 다리를 다쳐 아홉 달째 병원에 누워있다는 거야. 여봐 후슝, 요즘 자네들이 문병을 왔다가 부조한 돈이 5천 원은 좋이 되거든. 그걸 한정실의 입원비에 보태주고 싶어. 그래도 되겠어?”
“왜 안 되겠습니까? 허지만 사모님도 입원한 신세고 이제부터 돈을 많이 써야 하겠는데요.”
“아니야, 난 입원비를 못 낼 사람이 아니야. 이 돈은 내 돈도 아니구 여러 사람들의 정성이니 이를 정실이를 치료하는데 써야 하겠어.”
막무가내였다. 일단 이 정도로 전화를 주고받았다.
한정실이란 연길시건공소학교에 다니는 소녀인데 올해 정초 이모와 함께 모아산 민속촌에 가서 눈썰매를 타고 쏜살같이 아래로 지쳐내려 오다가 그만 해묵은 소나무 등걸에 부딪치는 바람에 다리를 크게 다쳤었다. 정실이는 수술을 받았으나 골수염이 생겨 재차 수술을 받게 되였다. 그 애의 어머니 박금숙(45세)은 “애비, 어미 모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데 정실이마저 다리를 잃으면 어떡해요?…” 하고 쌍지팡이를 짚고 병원 안팎을 드나들며 온갖 정성을 다했고 그 애의 아버지도 불편한 다리를 끌고 목기공장에 다니면서 아득바득 입원비를 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4만원이나 들어간 입원비를 갚자면 그야말로 하늘에 장대 겨룸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연변TV 『사랑으로 가는 길』 제작진에서는 사회에 향해 구원의 손길을 호소하게 되었다. 마침 우리 연변대학교에서는 정판룡 교수 서거 5주기(週忌)를 기념할 겸 9월 30일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에 협찬을 하게 되었고 사전 준비로 나는 이 광실 기자와 함께 한정실 학생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인데, 그 자리에서 그 애에게 힘이 되라고 김학철 선생과 정판룡 교수의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연 왕 사모님이 지금 115호 병실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아무튼 나는 왕 사모님의 진정어린 말씀에 그만 콧마루가 쩡해났다.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씨인가? 당신 자신도 병상에 누워있는 신세건만 한 조선족 어린이를 위해 5천 원의 거금을 선뜻 내놓으려 하는 것이다.
기실 정판룡, 왕유 부부는 1996년 KBS해외동포상으로 받은 상금 10만 원을 장학기금으로 내놓았고 2001년 정판룡 교수가 투병생활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제자와 벗들이 문병 차로 와서 내놓은 부조금 11만 원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몽땅 장학기금에 보태주었다.《정판룡교육발전기금》설립 10주년을 맞는 오늘 이미 56명의 대학생들이 이 장학금을 받았다.
하지만 왕 사모님이 두 어려운 대학생을 도와준 이야기는 그 누구도 모르리라.
하나는 연변대학교 영어학과 학생인데 길림성 요원시(遼原市) 출신이다. 인형처럼 예쁘장하게 생기고 인사성도 밝고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홍반성 낭창(紅斑狼瘡)이란 몹쓸 병을 앓고 있었다. 이 일을 알게 된 왕 사모님은 이 학생에게 모름지기 1년 학잡비 5,000원 대주었고 이 소식이 알려지매 연변대학교 당국은 그 학생의 2년 분 학잡비를 몽땅 면제해 주는 특전을 베풀었다. 왕 사모님에게 그 학생의 근황을 물었더니 “지금 소주에 살고 있지. 몸은 여전히 아픈 모양인데 내 둘도 없는 멜 커플이지! 가끔 재미있는 이야길 주고받지. 후슝에게는 말해 줄 수가 없어.”하고 방긋 웃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호북성의 오지에서 온 토가족(土家族) 대학생인데 왕 사모님이 가만히 보매 방학마다 집에는 가지 않고 빈 교실에 앉아 공부만 하고 있었다. 왜 방학에 집에를 가지 않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차표를 끊을 돈이 없어서 가지 못한다고 했다. 차근차근 물어보니 방학에 한 번 갔다 오는데 800원이 드는데 부모님은 가난해서 그 돈을 댈 수 없고 설사 돈이 있어도 아까워서 차표를 끊을 수가 없다고 했다. 왕 사모님은 젊은 시절에 구소련에 가서 여러 해 공부를 했고 평생 나서 자란 상해, 무석, 중경과 수 천리 떨어진 연변에 와서 살고 있으므로 부모형제를 그리는 그 학생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왕 사모님은 그 학생에게 800원을 주어 차표를 끊고 3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 부모형제와 상봉케 하였다. 이 학생은 이제 곧 졸업을 하고 사회에 진출하게 된다고 했다.
무궁화는 영원히 피리라
정판룡 교수의 서재에 있는 무궁화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보자.
1983년 이웃으로 살던 연변대학교 김지운(金址云) 선전부장이 정판룡 교수가 무궁화를 각별히 좋아하는 줄을 알고 자기네 자택 베란다에서 기르던 무궁화나무에서 한 가지를 베어 물병에 넣어 뿌리를 내리게 한 다음 예쁜 화분에 담아 선물한 것인데, 올해까지 23년 동안 왕 사모님네 댁에서 무탈하게 자라고 있다. 2001년 정판룡 교수가 작고했으니 18년은 정판룡 교수가 키우고 올해까지 5년 채 왕 사모님이 키우고 있는 셈이다.
요즘 왕 사모님은 썰렁한 가을바람이 불자 정판룡 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여름에 베란다에 내갔던 무궁화 화분을 집안에 들여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담홍색 꽃송이는 대여섯 송이 피었다가는 지고, 졌다가는 다시 피어서 온 객실에 은은한 빛과 향기를 던져주고 있다. 금시 호걸스러운 정판룡 교수가 껄껄껄 웃으며 서재에 들어와 안락의자에 앉아 구수한 이야기를 꺼낼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왕 사모님의 무궁화 사랑은 자별하다. 무궁화를 보면 저 하늘에 계신 남편을 보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왕 사모님이 이토록 무궁화를 아끼는 것은 이 꽃이 바로 남편의 모국인 조선이나 한국의 국화(國花)요, 그녀 자신이 또한 조선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한 그루의 무궁화를 두고 우리 제자들은 왕 사모님과 조금은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 무궁화는 바로 거친 연변에 와서 뿌리를 박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는 왕 사모님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따스한 남방의 대도시에서 나서 자랐고 남개대학교 러시아학과 교수 자리도 마다하고 연변에 온 왕 사모님, 그가 겪어야 했던 고생은 그야말로 일구난설이다. 기후와 풍토에 맞지 않는데다가 1960년대 초반 영양실조로 말미암아 한 쪽 신장마저 떼어버려야 했던 왕 사모님이다. 더더구나 하늘같은 남편을 잃은 이 무렵 왕 사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쓰리고 허전하랴. 또한 왕 사모님에게도 귀한 자식들이 있고 그들은 일본에서 고학을 하고 있다.
하지만 왕 사모님은 이 모든 상처와 괴로움과 그리움을 약한 자에 대한 사랑으로, 조선족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으니 그이야말로 왕 사모님이야말로 21세기의 왕소군이요. 한 그루의 무궁화가 아닐 수 없다. 찬 바람 부는 이 가을에 온 생명을 다 바쳐 한없이 피고 또 피는 무궁화, 그게 바로 왕 사모님이다.
왕 사모님네 댁 무궁화는 내년에도 후년에도 그냥 탐스럽게 필 것이다.
왕 사모님의 쾌유(快癒)를 빌면서 이 글을 마친다.
- 2006년 10월 1일, 깊은 밤
제4편
북청 물장수― 동훈 선생
삼가 동훈 선생님의 영전에 올립니다
방금 한국 체류 중인 서옥란 박사가 동훈 선생의 골회를 모시고 발인하는 길에 있다는 전화를 보내왔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하루만 먼저 부고를 받았더라면 급히 날아가 제주라도 한 잔 부어 드리고 사모님께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하겠지만,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다. 그저 20년 전에 쓴 이 글로 이 불초제자의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다. 오후라, 세월도 무정하구나!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두터운 정치서적이나 철학저서에서보다 한 인간과의 만남에서 더욱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경우가 있다. 1990년대 초 일본에서 1년 반, 1995년대 중반 한국에서 1년 간 동훈(董勳) 선생의 슬하에서 얼마나 많은 사랑과 가르침을 받았던가?
달이 가고 해가 바뀔수록 더더욱 그리운 그 얼굴, 그 목소리! 오늘도 선생님네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서 아름다운 추억의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1. “북청 물장수”의 이야기
선생을 처음 만나 뵌 것은 1989년 12월 중순, 일본 와세다대학 정문 앞에 있는 자그마한 라면집에서였다. 이른 정심시간이라 아직 손님은 별로 없는데 안쪽에 앉아있던 50대 중반의 신사가 조용히 일어나며 반겨주었다. 중키의 다부진 체구, 이마는 약간 벗어졌는데 안경 너머로 한 쌍의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매가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정판룡(鄭判龍) 교수님의 사진첩에서 뵌 얼굴이었다.
선생은 밥상을 사이 두고 좌정하자 우리 대학교의 박문일(朴文一), 정판룡, 주홍성(朱紅星) 등 교수들의 안부를 하나하나 자상히 물어왔다. 표준적인 서울말씨였으나 함경도 억양이 얼마간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선생은 여러 해 객지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문득 지나가는 고향사람을 만난 듯한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선생은 1984년 8월 말 우연히 연변을 다녀간 후 우리 연변대학 중진 교수들과는 깊은 교분을 갖고 있었고 중국에 우리 민족의 대학을 꾸리고 있는 일이 너무나 대견해 젊고 유망한 학자들을 일본에 데려다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공부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김군, 부모님은 다 건재하신가?”
“예, 두 분 다 계십니다.”
“아버님의 고향은?”
“저희 아버지는 평남 평양 출신이고 어머니는 함경도 출신입니다.”
“함경도? 난 함남 북청사람일세.”
“죄송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함경남도 북청(北靑)이라면 지금은 북한의 사과산지로 유명하지만 옛날에는 ‘북청물장수’의 고향으로 유명한 고장이 아닙니까? 옛날 북청사람들은 약수 길어 팔아서 자식들을 공부시켰다고 하던데요.”
내가 한마디 알은 체를 했더니 선생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허허, 그런 이야기를 북청내기들에게 했다가는 귀뺨을 맞는다구요. 자식만을 공부시킨다면 북청물장수가 아니지. 북청물장수 물 길어 팔아 사촌을 공부시키구 마을 젊은이들을 공부시킨다구 해야 할 것일세…”
후에 선생의 주선으로 북청 출신의 사람들과 많이 사귀고 두루 책자를 보고 알게 된 일이지만 예로부터 북청은 교육을 숭상하고 그 자제들이 열심히 공부한 고장으로 소문이 높았다. 조선왕조시대의 유명한 재상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은 “내 만일 북청에 귀양 오지 않았더라면 어찌 높은 학문과 고결한 지조를 갖춘 북청선비들과 교유할 수 있었겠는가?” 라고 했고 백범 김구(白凡 金九, 1876-1949)선생은 가는 곳마다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오는 북청을 돌아보고 “독립된 후 우리나라를 북청과 같은 고을로 만들고 싶다”고 술회한 바 있다. 그래서 “교육 없이는 북청을 논하지 말라”고들 한다.
북청물장수가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것은 조선왕조 철종년대(1849-1863)이다. 당시 권세가였던 안동 김씨 김좌근(金左根, 1797-1869)의 서울 저택에 북청 출신의 김서방이 물을 길어댄 일이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북청물장수들이 서울에 모여들어 본격적으로 물장수를 하기 시작한 것은 고종년대(1863-1907)부터이다. 1868년 북청군 신창 토성리 출신인 김서근(金瑞根)이라는 사람이 서울 돈화문 앞 단칸방에서 기거하면서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올라오는 고향 선비들의 시중을 들었다. 물을 길어다 밥을 짓고 빨래를 했는데 물은 주로 삼청동 공원 안에 있는 약수터 물을 길어왔다. 부지런하고 인품 좋은 북청사람 김서근은 차차 물지게와 물통을 가지고 이웃 주민들에게도 물을 길어다 주었는데 상수도가 없던 시절이라 그 소문은 이웃으로 번져가 물을 배달해달라는 집들이 하루가 다르게 불어났다. 그리하여 김서방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고향에 연락하여 친구들을 불러다 물도가(都家)를 만들었다. 이것이 북청물장수의 시작이며 수방도가(水房都家)의 원조(元祖)로 된다.
수방도가는 점차 서울의 명물로 등장했고 북청물장수들은 물지게로 물을 길어 벌어들인 수입으로 자식들을 서울에 데려다 공부시켰다. 그리고 많은 북청출신의 젊은이들이 서울에 올라오면 수방도가를 거쳐 갔다. 말하자면 지금의 아르바이트 식으로 잠시 수방도가에 행장을 풀고 물지게를 지고 학자금을 벌었던 것이니 만국충절(萬國忠節) 이준(李儁, 1859-1907)도 17세 때 서울에 올라와 수방도가를 거쳐 갔다.
수방도가는 1920년대에 들어와서 수십 개로 불어났다. 그리하여 그들은 상호 연계를 맺고 서로 협동하여 체계적인 운영을 모색했다. 그 산물이 《북청청우회(北靑靑友會)》인데 이 장학회는 여러 수방도가에서 출자하는 자금을 기금으로 하여 북청군 출신 학생들에게 정기적인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활발하게 뒷바라지를 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집집마다 상수도가 들어서면서 북청물장수도 점차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 권학사상(勸學思想)에 투철한 북청인의 교육열은 식을 줄 모르고 날이 갈수록 열기를 더해 서울에만 중산고등학교, 고명상업고등학교와 같은 10여 개 소의 학교를 설립했고 수많은 인걸들을 길러냈다. 이러한 북청물장수들을 두고 시인 김동환(1901년~미상)은 그의 시<북청 물장수>(1924)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새벽마다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 물을 솨아 퍼붓고는
그만 가슴을 디디면서 멀리 사라지는
北靑 물장수
물에 젖은 꿈이
北靑 물장수 부르면
그는 삐걱삐걱 소리를 치며
온 자최도 없이 다시 사라진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다려지는
北靑 물장수
동훈 선생은 함경남도 북청 니곡면(泥谷面) 출신인데 그의 삼형제는 서울에 올라가 하숙을 잡고 공부를 하던 중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그만 서울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선생은 전임 국무총리 이홍구(李洪九) 선생과 동기동창으로 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964년부터 1971년까지는 <서울신문>,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을 거쳐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대통령비서관(政務, 司正 담당), 1975년부터 1979년까지는 통일원 차관(남북 당국회담 대표) 등 정부 고위직에 있다가 1980년 남북평화통일연구소를 창립했고 1989년대 초반 전두환 군사정권이 나오자 정계에서 은퇴했는데 1985년부터는 일본 동경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지내면서 남북통일연구에 집념하고 있었다…
그 날 정심으로는 초밥(壽司) 한 접시에 라면 한 그릇씩 올랐다. 맥주 한잔 청하지 않는다. 처음 뵈옵는 어른 앞이라 술은 주어도 사양하겠지만 빈 말이라도 “맥주 한잔 들지 않겠어?” 하고 물어주지 않는 데는 객지에 온 몸이라 얼마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2. 잊을 수 없는 가이겐(外宛)의 불고기 맛
지금도 젊은이들은 일본에 가면 돈닢이 우수수 떨어지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인들의 천국이지 가난한 나라에서 간 유학생들에게는 결코 천국이 아니다.
매일 학교에 나가 수업을 받고 자료를 수집, 정리해 리포트(소논문 형태의 숙제)를 작성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면 하루가 눈 깜빡할 새에 지나버리고 삭신은 물러날 것만 같다. 나와 같이 장학금을 받는 젊은이들은 그래도 얼마간 점잔을 빼며 지낼 수 있지만 사비유학생들은 일 년 열두 달 365일 다람쥐 채 바퀴 돌리듯 뛰어다녀야 한다. 개중에는 일본에 3, 4년씩 있었다 해도 술집 출입 한번 해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 웬만한 식당에 가도 맥주 한 병에 500엔(인민폐로 35원 좌우), 불고기 1인분에 5,000엔(350원)씩 하니 중국의 한 달 월급을 팔고 팔자 좋게 술집 출입을 할 유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친구가 좋다고 한번 모여 불고기 파티를 열어 보라. “와리깡(割勘)”― 제 각기 돈을 내여 계산을 해도 1인당 1만 엔(인민폐로 500원)씩은 내야 하니 친구 만나기도 무서운 게 일본이 아닐 수 없다.
일본에 가면 그래도 드문드문 대접은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역시 천만에 말씀이다. 나는 일본에 1년 반이나 있었지만 지도교관 오오무라 교수 댁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일본인의 집에도 초청을 받아본 적이 없다. 대학원생이요, 조교요 하는 대학가의 친구들 사이 역시 야박한 “와리깡”이니 중국에 처자를 두고 온 유학생들, 번쩍번쩍 금띠를 두르고 금의환향하기를 바라는 부모처자를 생각하면 슬쩍 구실을 대고 술좌석을 피하는 수밖에 없다. 참으로 부자의 나라 일본이라 하지만 술 한 잔, 기름진 요리 한 접시가 얼마나 그리웠던가?
바로 이렇게 궁상스럽게 지내고 있는 조선족 유학생들 앞에 귀인이 강림했으니 그분이 바로 동훈 선생이었다. 우리는 선생의 지도와 후원을 받고 재일조선족유학생친목회를 조직했고 현지조사, 학술토론회 같은 행사를 자주 가졌다. 1919년 “2․8”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는 동경기독교회관을 견학했고 고구려 후예들이 건너와 살았다는 사이다마현(崎玉縣)의 유명한 고마진쟈(高麗神社)도 참관했으며 일본 제일의 관광명소 하꼬네(箱根), 닛꼬(日光)도 답사했다. 사꾸라 피는 4월, 단풍이 드는 11월이면 아름다운 신쥬꾸고엔(新宿御宛)의 푸른 잔디 위에 노천 파티를 벌리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향수를 달래기도 했다.
파티는 요요기(代代木) 부근에 있는 가이겐(外宛)이라는 불고기집에서 많이 했다. 나는 그렇게 맛있는 불고기를 다시는 먹어볼 것 같지를 않다. 늘 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지칠 대로 지치고 기름기 있는 음식을 먹지 못해 늘 속이 출출하던 우리는 사흘 굶은 호랑이처럼 기름진 불고기를 포식했다. 선생은 한 구들 되는 자식들에게 어쩌다가 좋은 음식을 얻어다가 배불리 먹이고 있는 어버이처럼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고 실없이 젊은이들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리고는 자꾸 술이며 안주를 새록새록 청했다. 술과 안주도 당신 자신이 직접 청하지 않고 나를 보고
“간사장 동지, 술이 좀 부족허구만. 한 잔 더 하지요. 고기도 좀 더 시키고…”
하고 화기 오른 안경을 벗으며 두 눈을 끔뻑해 보였다. 내가 친목회의 간사장 직무를 맡고 있다고 일부러 “간사장동지, 간사장동지”하고 일본식으로 개여 올리는 것이었다. 당신 자신은 친목회의 보통 회원이고 질긴 술꾼인 것처럼 말이다.
선생은 낮에는 절대로 술 한 잔 하지 않았고 일본 소주보다 맥주를 더 즐기는 편이지만 일단 저녁에 우리 젊은이들을 만나 기분이 좋으면 2차, 3차로 대작을 하군 했다. 그리고 술값은 꼭 당신 자신이 내군 했다. 눈치 빠른 친구가 먼저 결산을 하면 크게 화를 냈다.
“이 봐, 동경바닥의 주인은 내가 아닌가? 썩 물러서게. 자네들의 술대접은 연변에 가서 받겠어!”
우리 유학생들이나 방문학자들 뿐만 아니었다. 학술회의나 무역상담 차로 일본에 온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 기업인들 모두가 동훈 선생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선생이야말로 우리 중국조선족들에게는 동경의 급시우 송강(急時雨 松江)이었다.
1990년 8월 제2차 오사카조선학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한 중국 측 대표 96명이 동경을 거쳐 귀국할 때 역시 가이겐 불고기집에서 대접을 했다. 미닫이들을 활짝 밀어놓고 두 줄로 길게 차린 불고기상이 장관을 이루었다. 8월 삼복염천이라 후끈후끈한 화기가 진동하고 불고기 굽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앉은걸음으로 이리 저리 자리를 옮기면서 술잔을 권하는 선생의 모습, 이마며 콧등에는 땀이 송골송골 돋아 있었다. 참으로 보기에 민망했다. 연변사람들에게 무슨 신세를 졌기에, 중국 조선족과 무슨 인연이 있기에 바람처럼 지나오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이처럼 극진하게 대접하는 것일까?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고 그 무렵 우리는 조상의 나라 한국에 가 보고 싶었다. 1990년도라 그때만 해도 친척 초청이 아니고는 한국에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래도 일본에 있는 중국조선족 학자라면 찬스를 잡을 수 있었지만 아직 학문적 깊이가 없는 우리들을 어느 대학교에서 초청해 주며 설사 초청을 해준다 해도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우리 고학생들이 무슨 자금으로 한국나들이를 한단 말인가?
우리의 말 못하는 사정을 손 끔 보듯 하는 선생은 그 당시 오사카 국제해상운수주식회사 사장으로 계셨던 허영준 선생을 찾았던 모양이다. 그 때만 해도 허영준 사장은 재일동포들 중에 손꼽히는 기업인이요, 자산가였다. 그는 일본의 고베항(神戶港)과 한국의 부산항을 나드는 기선(輪船)과 화물선을 가지고 있었고 부산에 크라운호텔, 서울 강남에 리버사이드호텔도 가지고 있었다.
“허사장님, 지금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 젊은이들이 동경대학, 와세다대학과 같은 일본 명문대학에 와서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한국을 모른답니다.”
“일본은 알고 자기의 모국은 모르다니요?”
격장법(激將法)이 바로 들어맞았는지라 동훈 선생은 한 술 더 떴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학을 하는 젊은이들이 아닙니까? 무슨 돈이 있어서 한국관광을 하겠습니까? 하나같이 머리들이 총명하구 열심히 공부들을 하니까 장차 큰 재목이 될 건데참, 나도 옆에서 보기가 딱하군요…”
“아니, 돈이 없어서 모국도 가보지 못하고 있단 말씀입니까? 그 돈은 제가 내놓을 테니 동선생께서는 주선만 해 주십시오.”
마침내 동훈 선생의 주선으로 우리 조선족 유학생 25명(그 가운데 金昌錄씨의 10살 먹은 딸과 金光林씨의 7살 먹은 아들놈도 있었다)은 고베(神戶)에서 오림피아호 기선을 타고 부산을 바라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부산의 크라운 호텔에 묵으면서 3박4일, 서울의 리버사이드호텔에 묵으면서 5박6일, 토끼장 같은 다다미방에서 살던 우리는 금시 중동 석유왕국의 왕자가 된 기분이었다. 매일 관광버스를 타고 노래를 부르면서 모국의 도시와 명승고적들을 돌아보았고 저녁이면 저마다 널찍한 호텔 방을 차지하고 오랜만에 늘어지게 발 편 잠을 잘 수 있었다. 동훈 선생은 허영준 사장네 팀과 함께 서울까지 날아와 우리들에게 일일이 용돈을 주었고 대통령 각하도 가끔 찾아오신다는 유명한 신라술집에서 연예인들까지 불러 풍악을 잡히며 풍성한 환영만찬을 베풀어주었다.
그 때 그 감격과 감동을 어찌 한 입으로 다 말할 수 있으랴!
3. “코리아인도 문화민족임을 알려 줘야지”
선생은 사모님과 아들 동헌(董憲)과 함께 동경에 살고 있었고 그분의 큰따님은 미국에서, 작은따님은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선생네 가족은 동경에서 아파트를 전세 맡고 살았는데 내가 일본에 있는 사이에도 신쥬꾸구(新宿區)에서 시부야구(涉谷區)로, 다시 나카노구(中野區)로 자주 이사를 했다.
아직도 음으로 양으로 민족차별을 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요사스러운 일본인 부동산 업주들은 한국인에게 좀처럼 세를 주지 않았고 세를 주었다가도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이런 저런 구실을 대고 아파트를 내게 했다. 선생네가 신쥬꾸구 쪽에서 시부야구 쪽으로 옮길 때, 우리 유학생 친구들 몇이 달려가 이사를 거들어준 적 있었다.
요통(腰痛)을 심하게 앓고 있는 사모님까지 나오셔서 짐을 싸고 있었는데 우리는 운송회사 직원들을 도와 짐을 메여 나르느라고 땀을 뻘뻘 흘렸는데 선생만은 부지런히 화장실에서 욕조를 닦고 있었다. 당장 내야 할 집인데 괜히 부득부득 청소할 건 뭔가? 오히려 옆에서 보기가 민망스러웠다.
공자님 이사에 책 보따리밖에 없다더니 무슨 책 상자가 그렇게 많았던지! 우리가 5층에서 1층까지 이삿짐을 다 메여 내렸건만 선생은 화장실을 청소하고 나서 구들에 물수건을 놓기에 여념이 없었다. 선생은 허리를 펴고 우리를 둘러보더니
“짐을 다 내려갔으면 창문들을 닦아주게.”
하고 걸상을 내주었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장 낼 집인데 청소를 해선 뭘 합니까?”
선생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선생은 물수건으로 문고리들을 샅샅이 훔쳐내고 있을 뿐인데 사모님이 곱게 눈을 흘기며 끌끌 혀를 찼다.
“저 양반은 이사할 때마다 저런 답니다. 새로 드는 집주인에게 코리아인들도 문화민족임을 알려 줘야 한다고 말예요. 열 번 지당한 말씀이지만 고양이 손이라도 빌어야 할 땐데 번마다 참 코 막고 답답하지요.”
그제야 우리는 얼마간 깨도가 되어 선생을 거들어 일손을 놀렸다.
이젠 집안 어디를 보나 신접살림처럼 알른알른 윤기가 돌았다. 나는 분명 내일 찾아들 주인의 휘둥그런 눈동자를 보는 것만 같았다.
참으로 우리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의 어디에 가서 살던지 밝고 깨끗한 모습을 보여줄 때, 자기의 인격과 품위를 지킬 때 세계인들도 우리를 다른 눈길로 볼 것이 아닌가?
이뿐만이 아니었다. 선생은 사사건건, 구석구석에서 우리 촌뜨기 유학생들에게 귀감을 보여주었다. 우리와의 약속을 단 한 번도 어긴 일 없었고 약속 장소에는 단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와 계셨다. 그렇게 술을 즐기는 분이지만 낮에는 단 한 모금도 술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남색 정복에 반듯하게 넥타이를 매고 다니는 신사 풍의 깔끔한 모습, 그분의 단정하고 빠른 걸음은 우리 젊은이들도 무색케 했다.
“옛날 개념으로는 부자들 모두가 뚱뚱보로 되어 있지만 현대 부자들은 모두 날씬한 편이거든. 여기 일본의 마쯔시다나 쏘니의 회장도 그렇구 한국의 정주영, 김우중 회장도 그렇단 말이야. 그러니 호웅씨도 부자로 되려거든 체중부터 줄여야 하겠어.”
선생은 체중이 90키로로 육박하는 나를 두고 가끔 농을 걸기도 했다.
4. 넉넉한 유머와 백성의 통일논리
동훈 선생과 앉으면 언제나 우리 젊은이들 쪽에서 찧고 까불면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선생은 빙그레 웃으면서 다만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지 절대로 당신 자신의 인생경력이나 인생철학을 도도하게 펴내지 않는다. 혹시 좌중에 젊은이들을 상대로 고담준론을 펴내는 어르신네가 있으면 슬쩍 우스운 이야기를 꺼내 화제를 돌리군 했다.
하지만 선생은 박문일, 정판룡 등 선생들과 함께 앉은자리에서는 가끔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거나 진한 육담마저 꺼내군 했다. 그런 자리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바나나>, <저희야 동그라미가 있어야지요>와 같은 이야기는 영영 잊을 것 같지 않다. 실례지만 이 자리에서 하나만 옮겨보고자 한다.
― 대한민국 어느 기업의 회장 어른께서 양쪽에 쭉 중진들을 앉히고 중요한 회의를 하는 판인데, 비서란 놈이 살그머니 다가와 귀에 대고 한마디 여쭈지 않겠습니까?
“그분께서 오셨는데요!”
비서가 말하는 “그분”이란 물론 회장 어른이 비밀리에 좋아하는 젊은 여자지요.
“왜 또 왔지?”
회장 어른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데 비서란 놈이 슬쩍 원탁 밑에 오른 손을 넣더니 먼저 왼손 장지(長指)와 식지(食指)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이것 아니면…”
하고 다시 오른손 장지를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고 주먹을 불끈 쥐더니
“이것 아니겠습니까?”
하고 소곤거렸습니다.
왼손 장지와 식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는 건 돈을 의미하고 오른손 장지를 왼손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어 보이는 건 섹스를 의미함을 회장 어른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회의 중이지 않는가? 임자가 알아서 잘 모시도록 하게!”
회장 어른이 난색을 하면서 비서를 물리치고 다시 회의를 주최했습니다…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문서를 들고 들어오는 비서를 보고 문득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나는지라 회장 어른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아, 어제 그분은 잘 모셨는가?”
그러자 비서란 놈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또다시 왼손 장지와 식지로 동그라미를 지어 보이면서
“저희야 동그라미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이것으로 잘 모셨지요!”
하고 오른손의 시뻘건 장지를 왼손 식지와 중지 사이에 삐죽이 넣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쯤하면 좌중은 그만 포복절도하게 된다. 말뚝이가 양반을 야유하고 골려주는 <봉산탈춤>의 현대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선생을 모신 자리는 늘 즐겁고 배울 것이 많다.
이러한 선생의 따뜻한 인간애와 뛰어난 유머 감각은 그의 칼럼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30대 초반에 <서울신문>과 <경향신문>의 논설위원으로 맹활약을 했던 선생, 최근에도 <동아일보>와 <문화일보>에 칼럼들을 실어 세계정세의 추이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면밀히 분석하고 현 당국의 통일정책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진단하고 있다. 마침 여기에 필자가 눈에 띄는 대로 스크랩해 두었던 선생의 칼럼 몇 편이 있다. <統一의 논의-‘政治打算’해선 안 된다>(88.7.1), <北京 東京 平壤서 본 서울>(97.12.15), <개혁의 2가지 필요조건>(98.2.4), <통일정책 大道로 가라>(98.2.13), <이산가족문제 접근법>(1998.38), <남북대화 大局的으로>(98.4.10), <‘소떼 訪北’ 남북해빙 계기로>(98.6.15), <北韓 상공에서의 묵상>(98.12.29), <욕심보다 ‘차가운 머리로’>(00.6.19) 등 9편이다. 이는 선생께서 지금까지 제출했고 발표했던 수많은 보고, 칼럼, 논설을 놓고 보면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지만 이 9편의 칼럼을 통해서도 선생님의 사상과 철학을 얼마간 엿볼 수 있다.
첫째, 선생 역시 1천만 이산가족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의 통일철학은 철두철미 순박한 백성의 소원과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선생은 1947년 봄, 병석에 계시는 어머님과 어린 동생들을 두고 북청을 떠났는데 그 동안 아버님은 옥살이와 강제노역, 끝내는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고 누이동생 경희와는 생리별이 되고 말았다. 하기에 선생은 말한다- “50년 세월을 하루같이 헤어진 혈육의 정을 못 잊은 채 끝내는 북녘을 향해 머리라도 돌려서 숨 거두게 해달라는 실향민들의 애통된 호곡에 이제 정말 귀를 기울여 한다. 한을 안은 채 한줌의 잿가루가 된 어버이 유해를 휴전선 북녘에 날려 보내며 흐느끼는 비운의 겨레를 외면하면서 거기에 무슨 민족이요, 통일이요를 외쳐대겠다는 건가.”
선생은 이산가족의 아픔은 도외시하고 제 잇속만을 채우려는 당국자들을 비판한다. “쌀을 주면 군인이 먹으면서 남침할 기운을 차릴 것이기 때문에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통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도 한다. 독일통일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요는 북한동포와 함께 살게 되면 돈이 많이 든다는 것. 비유하자면 옹졸한 졸부 집안에서 노부모도 귀찮고, 남루한 친척 왕래도 싫고 남남으로 살아야 내 돈이 축나지 않는다는 요지다. 결코 축복받지 못할 것이다. 순박한 백성들 사이의 흐뭇한 겨레사랑, 그리고 역사 감정을 함께 이어가는 것이 통일의 원점이 아닐까.”
둘째, 선생은 통일문제를 백성의 논리로 접근하고 있는 것만큼 “통일정책은 민족의 역사에서 큰 발전을 향한 웅대한 과제이므로 그 기조로부터 표현문구에 이르기까지 후대의 기록에 부끄러움이 없을 만큼 격조 높은 것”이어야 하며 “그 동안 쌓인 갖가지 당착 모순 불합리를 청산, 정리하고 이치에 맞고 원칙에 충실함으로써 통일정책은 당당하고 대도(大道)로 가야할 것”이니 “남북관계에서 대결과 승패의 관념은 극복되어야 하고 “너”와 “나”가 “우리”로 되게 하는 데는 정직과 성실이 근본이 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선생은 “오늘날 대명천지에 잔꾀나 속임수에 넘어갈 사람도 없고 공작이나 술수에 의해 나라가 통일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무슨 기발한 계략을 내놓는 경쟁이 된다든지 나라 안팎의 하찮은 관중석을 의식해서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행사나 연출 같은 발상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남북 사이의 접촉, 통일 논의에는 결코 ‘단독’도 ‘밀실’도 없다. 가상(假想)이지만, 남과 북이 마주하는 곳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자리 하나가 마련돼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역사의 눈’이 임하는 자리다. ‘역사의 눈’은 실로 냉철, 엄격하며 후대 역사에 진실을 전하고 시비를 분별해 줄 것이다.” 그리고 “역사의 눈”은 민족사적 정통성 위에서의 민족 발전과 민주주의의 상궤(常軌)를 일탈하지 못하도록 예의 주시할 것이다.”
셋째 선생은 통일정책은 북과의 상관관계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국내 정책의 연장선에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장차 통일된 나라에서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사회상을 미리 우리 주변에서부터 구현시켜 나가는 다양한 노력이 바로 통일정책”이며 “청결한 정부, 질서 있는 공평한 사회를 이뤄 바람직한 통일의 모태를 만드는 개혁이 바로 중요한 통일정책”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훈 선생은 특히 개혁이 번번이 실패하는 원인을 꼬집고 나서 “개혁의 두 가지 필요조건”을 말한다. 첫째는 개혁의 추진주체부터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법이라는 반성기능이 정상 작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필요조건을 논하면서 선생은 다음과 같이 형상적으로 비유한다.
“개혁은 개혁을 이끌 사람들이 ‘규격(規格)’에 맞아야 할 것이다. 수없이 반복된 지난날 개혁시도마다 좌절된 경우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알 수 있듯이,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들이 규격에 맞을 때에만 국민은 한편이 돼주고 그래서 성취도 남겼다. 그 규격이란 어떤 것일까. 간단명료하다. 개혁을 들고 나왔으면 개혁의 전 과정에서 자신에게 엄격함으로써 흠 잡힐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감히 남(국민)에게 도덕률 준수까지 당당히 강청할 수 있자면 그들 자신이 행적과 도덕성에서 양심(良心)으로부터의 합격판정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만일에 규격의 잣대가 헷갈리면 이런 경우를 상상해 보아야 한다.
“세상에 알려진 사기, 변절, 방탕에다가 이혼경력도 있는 사람이 어느 날 말끔히 단장하고 주례석에 서서, 인간이란 정직해야 하고 지조도 있어야 하며 조강지처와는 백년해로 운운하면서 진지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는 손님들은 실소(失笑)할까, 존경할까.”
한마디로 동서고금을 주름잡는 해박한 지식, 역사와 현재와 미래를 꿰뚫는 긴 안목, 종횡무진의 비유와 풍부한 유머, 그래서 우리는 선생의 칼럼을 좋아한다. 바꾸어 말하면 선생을 통해 우리는 열 대학 교수들에게서 배운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배웠다.
5. “연변대학교를 잘 가꾸어야 조선족사회가 살아납니다.”
일본에서 어느덧 1년 반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게 되었다. 선생은 신쥬꾸에 있는 스미도모(住友) 빌딩 55층에 있는 대동문(大同門) 한식관에서 우리 부부를 위해 환송 파티를 차렸다. 그 때 일본에 있던 큰따님과 아드님은 물론이요, 사모님까지 불편한 몸에 쌍엽장을 짚고 나와 주셨다. 초밥에 불고기,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안주들을 많이 청해놓고 양껏 술잔을 내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때 남긴 사진은 지금도 나의 가장 귀중한 기념물로 남아있지만 그 날 연변의 한 젊은 학도에게 남긴 한마디 말은 지금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연변의 명동학교가 유명했다는 말을 들었어요. 안수길 선생의 소설에도 배경으로 나오지만 김약연 선생과 같은 반일투사가 교편을 잡았구 윤동주, 송몽규 같은 민족시인들도 많이 배출했다구 하더군… 일본에 왔기에 하는 말이지만 일본에도 유명한 학교가 있었어요. 저 야마구치현에 가면 쇼오카손쥬쿠(松下村塾)라는 유명한 사숙이 있어요. 명치유신을 주도하고 일본의 근대화를 선도해나간 유명한 인물들, 말하자면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晋作), 이도 히로부미(伊藤博文), 구사카 겐즈이(久坂玄瑞), 요시다 도시마로(吉田稔磨), 마에바라 이츠세이(前原一誠), 시나가와야 지로(品川彌二郞)와 같은 거물들을 길러냈단 말일세. 자그마한 시골 사숙에서 명치정부의 중신(重臣)들을 거의 전부 키워냈다는 말이 되겠지.
아무렴, 왕후장상에는 씨가 따로 없는 법이지. 우리말로 하면 개천에서 용 나고 말이야. 아무튼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간 친구들이 연변대학을 잘 꾸려주게. 연변대학을 잘 가꾸어야 조선족사회가 살아납니다. 헌데 요즘 나를 바라고 일본에 오는 중국의 젊은이들이 뼈가 없단 말이야. 여기 3류, 4류 대학에 와서 뭘 하나. 동경대, 와세다대 같은 명문대학이 아니면 안 돼요. 그런 명문대학에서도 일본인들을 젖히고 수석(首席)을 차지해야지…”
그 날 밤 동훈 선생은 사모님과 자제분들을 먼저 보내고 우리 부부를 데리고 동경의 밤거리를 거닐다가 자그마한 닌교(人形)들을 벽장에 총총 앉혀놓은 토속음식점에 들어가 또 술상을 마주 하고 앉았다. 선생은 우리 내외에게 정교한 손목시계 하나씩 선물하고 봉투 하나를 건네준다.
“일제 텔레비전이 좋다고들 하니까 이 돈으로 부모님께 텔레비전 한 대 사다가 선물하게.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가는 아들놈이 선물이 없어야 안 되지.”
얼마나 마셨을까? 점점 말씀이 적어지고 술잔만 내는 선생, 이 새파란 젊은이와의 작별을 그토록 아쉬워하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마지막 작별은 아카사카(赤坂) 역에서였다.
“잘 다녀가. 그리구 일본에두 늙은 형 하나 있다고 생각해 주게.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 년에 한 번씩 연하장이야 주겠지 허허…”
선생은 물기 어린 두 눈을 슴벅거리면서 돌아섰고 나는 승객들 속으로 사라지는 선생의 뒷모습을 보노라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10여 년 전 선생께서 북청물장수의 사랑으로 키워준 가난한 유학생들이 자랑스럽게 일본 명문대학의 박사학위들을 따냈다. 김희덕씨와 김광림씨는 동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상철씨는 죠지대학(上智大學)에서, 한족인 노학해씨는 쯔꾸바대학(築波大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동훈 선생께서 길러준 20여명의 장학생들 중 그 대부분이 귀국해 연변대학의 중견 교수로, 지도일군으로 맹활약을 하고 있다. 사범학원 원장으로 있는 이학박사 최성일씨, 외사처 처장으로 있는 황건씨, 일본어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권우씨, 도서관 관장으로 있는 한철씨, 그 외에도 조문학부의 김병활 교수, 체육학부의 김영웅 제씨들도 중견교수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참으로 선생께서 심고 가꾼 자그마한 솔씨들이 낙락장송으로 자라난 것이다.
선생은 연변대학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인재들을 양성했을 뿐만 아니라 연변대학의 기초건설에도 많은 기여를 하셨다. 1980년대 중반 선생께서는 대우그룹의 지원을 유치해 한화로 3,000만원에 달하는 한국의 최신 학술도서 1,500권을 기증했다. 지금 전국의 수많은 1,대학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연변대학교 정문도 한화로 2억 원 이상의 자금이 들었는데 역시 선생의 노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마운 동훈 선생, 지금은 동경의 어느 거리를 거닐고 계실까, 아니면 서울의 대우빌딩에 있는 남북평화통일연구소에서 칼럼을 집필하고 계실까? 대한민국 통일고문회의 고문, 동아일보사 21세기평화재단 이사, 명지대학교 교수(겸), 사단법인 평화포럼 이사, 남북평화통일연구소 소장 등 중책을 맡고 일하는 선생은 1989년 이래 남과 북의 교류를 위해 10여 차 조선을 방문했는데 지금도 노익장의 정열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혼신의 정열을 쏟아 붓고 있다.
연하장 한 장 띄우면서 선생의 건강과 가족의 평안을 두 손 모아 빌 뿐이다.
― 1998년 12월 20일 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