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산맥/김춘택 작] 도깨비 숲 <제1부 제1화>

2019-03-05     [편집]본지 기자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공일구(2019) 백천문화미디어「소설산맥」〈연작저널〉입니다.
   오늘은 3월 4일, 월요일, 좋은 하루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김춘택의 연작소설「도깨비 숲」의 첫 번째 시간입니다.
   청취자 여러분께 즐거운 감상의 시간이 되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연작소설―
―김춘택 작―
―도깨비 숲―
―제1부 결의도깨비 편―
―제1화. 도깨비명당―
 
   선암(仙岩)촌은 올해로 딱 100년 역사를 먹어온 마을이다. 그러니까 조선에서“3.1독립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그 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를 피해 중국 간도로 피신했던 세 명의 독립지사에 의해 세워진 마을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마을인 것이다.
 
   선암촌은 100년 전에 마을이 생겨서부터 지금까지 순 조선족만 100호가 살아온 마을인데 이상하리만치 이 마을의 호수는 100년 동안 100호에서 한 호도 덜지 않고, 한 호도 더하지 않게 불변백호(不变百户)의 맥락을 신비하고, 경이로울 정도로 이어왔다.
 
   선암촌은 조선족집거구의 수부 도시에서 불과 20리도 채 되지 않은 시교마을이었지만 자기의 고유한 조선족시골전통문화나 조선족시골풍속을 지켜감에 아집이 너무 강해 도시의 불미스러운 문화가 비집고 들어와 마을의 기강을 무너뜨릴 틈은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선암촌은 인구 100만에 달하는 도시의 가까운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무형의 성곽에 둘러싸인 조선족시골전통문화와 조선족시골풍속의 보루라고 할 수도 있었다.
 
   선암촌의 가장 대표적인 조선족시골전통문화라 하면 전통상여문화라 할 수 있었고, 가장 대표적인 조선족시골풍속이라 하면 도깨비신앙풍속이었다. 이런 전통상여문화와 도깨비신앙풍속은 100년 전에 선암촌에 뿌리를 내려서부터 선암마을사람들의 영혼에 두 갈래의 거대한 산맥처럼 뼈골로 자리 잡아왔다.
 
   선암촌의 전통상여문화와 도깨비신앙풍속의 기원은 선암촌을 개척하던 1919년 5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조선에서 그 해의“3.1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세 명의 독립지사인 상례학자 김지설(金地说), 풍수학자 조천언(赵天言), 불교학자 도진(道振) 스님이 검거를 피해 간도를 왔다. 그들은 신선의 얼굴모양을 한 바위가 있는 선암 땅으로 와서 선암마을을 세웠는데 그때 김지설에 의해 선암마을의 전통상여문화가 뿌리를 내리고, 조천언에 의해 도깨비신앙풍속이 뿌리를 내렸다고 했다.
 
   선암마을을 세울 때 풍수학자 조천언이 풍수를 보았는데 그는 신선의 얼굴모양을 한 북쪽 선바위를 배산(背山)으로 하고, 선바위 밑으로 흐르는 선하(仙河)를 건너 남쪽 땅에 세 곳의 명당자리를 정했다고 한다. 그 중앙에 난 바둑판처럼 평평한 땅은 이승명당으로 보아 마을을 앉혔고, 그 동쪽의 둔덕 땅은 도깨비가 나는 명당으로 보아 그 혈을 끊어주었으며, 그 서쪽의 둔덕 땅은 저승명당으로 보아 무덤을 쓰는 공동묘지로 삼았다는 것이다.
 
   선암마을을 세우기에 앞서 풍수학자 조천언은 세 곳의 명당자리를 개복하는 풍수제를 올리도록 했다. 그는 우선 마을자리인 이승명당의 동서남북 네 곳의 방위에 각각 좌 청룡, 우 백호, 남 주작, 북 현무 수호신의 나무모형을 만들어 묻고 손수 풍수제를 올렸다.
 
    다음으로 저승명당의 중앙에 나무로 깎은 시신모형을 만들어 묻고 상례학자 김지설이 귀신제를 주도하게 했는데 그때로부터 김지설에 의해 선암마을의 전통상여문화의 엄격한 체계가 형성되어 역사의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조천언은 도깨비명당에서 도깨비가 나와 창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도깨비의 혈맥을 끊는 풍수제를 올렸다. 조천언은 먼저 사람을 닮은 도깨비모양을 열두 살 아이의 크기로 나무를 깎아 만든 후, 그 나무도깨비인형의 목과 네 사지를 톱으로 잘라내었다.
 
   조천언은 그 여섯 토막으로 분리된 나무도깨비인형을 도깨비명당의 동서남북 네 방위에 나누어 묻었는데 동쪽 방위의 중앙에 나무도깨비인형의 머리를 묻었고, 북쪽 방위와 남쪽방위의 중앙에 나무도깨비인형의 양쪽 팔을 하나씩 묻었으며, 서쪽방위의 중앙에 나무도깨비인형의 두 다리를 나란히 묻었고, 도깨비명당의 중앙에 나무도깨비인형의 몸통을 묻었다. 이는 도깨비의 몸을 나누어 그 산생(产生)의 혈을 끊는 법술로 이른바 분괴단혈(分怪断血)이었다.
 
   분괴단혈을 마친 조천언은 도진 스님더러 염불을 올려 머리와 사지가 잘린 도깨비 신의 원혼을 달래주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얼굴에 도깨비를 잡아먹는 괴물의 탈을 쓰고, 백포장삼(白布长衫)을 입고 춤을 추었는데 그는“사람이 사는 땅에 어찌 도깨비가 공생하겠사옵니까? 사람과 도깨비가 만나면 서로가 피곤하고 괴로울 터임에 오늘 저희가 그 도깨비의 혈을 끊었사오니 하늘 신이여, 땅의 신이여! 부디 이 땅의 도깨비 신을 잠재워 주시옵소서!”라고 천신(天神)과 (地神)에게 기도를 올리면서 도깨비명당 주위를 아흔아홉 번 거침없이 돌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넋을 잃고 말았다.
 
   넋을 잃고 쓰러졌던 조천언은 반나절이 되어서야 깨어나더니 도진 스님에게“저는 진짜로 커다란 괴물이 되어 도깨비 신을 잡아먹고 왔습니다. 도깨비 신의 집착은 몹시 사나웠습니다. 절대 도깨비명당의 혈을 끊어 도깨비 가문의 대를 끊을 수 없다고 별 지랄발광을 다해서 내 아예 그 놈의 뼈까지 다 씹어 먹고 나왔는데 스님께서 한번 이 도깨비명당의 혈이 얼마 동안 끊길지 천기(天机)를 봐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러자 도진 스님이 그때까지 목탁을 두드리며 외던 염불을 멈추고 한참 동안이나 손가락을 움직거리며 셈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대는 천신도 아니고, 지신도 아닌 인간으로서 법술을 부렸으니 그 영험은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의 기도가 잠시 천신과 지신을 감화시켜 그들의 힘을 빌려 도깨비 신을 굴복했으나 영원히 도깨비 신의 신력을 정복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의 도깨비명당이 잠을 자는 시간은 고작 백년입니다. 백년 후에는 도깨비 신이 깨어나 자신의 혈맥을 다시 찾아갈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걱정 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곳에서 도깨비의 가문이 다시 문을 연다고 해도 악을 행하는 도깨비가 아닌 이 마을을 수호하는 선한 도깨비들만 출몰하여 이 마을에서 발생하는 악과 비리와 불륜을 징벌할 것입니다. 그대는 비록 도깨비명당을 완전히 파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악의 도깨비는 물리쳤습니다.”
 
   도진 스님의 천기누설을 들은 조천언은 자신의 법술에 만족을 하지 못했지만 큰 위안을 받았다. 그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으로서 곧바로 선암마을이 도깨비명당을 좌우지 할 수 있는 대안을 내놓았다.
 
  “인간의 조화가 거기까지라니 어쩌겠습니까? 스님의 혜안으로 보아온 천기에 만족을 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선암마을은 세 곳 명당의 조화를 입어 번창할 수 있도록 풍수제 제도를 세워야 할 것입니다. 이승명당은 수호신을 심었으니 더 이상 풍수제를 지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저승명당은 김지설 지사님의 주도하에 상례의 도를 지켜 가면 그만이기도 하겠습니다. 다만 도깨비명당은 도깨비 신의 심기를 이미 건드려 놓았으니 해마다 도깨비신공양제를 지낼 수 있도록 그 제전을 만들어야겠습니다.”
 
   이로서 선암마을에 도깨비명당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그 면적은 동서로 300미터, 남북으로 200미터의 공간이 되었다. 조천언은 선암에 좋은 이승명당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조선이주민들에게 도깨비명당 구역 안의 잡목을 뿌리 채로 뽑아버리고 공터를 만들게 했으며, 그때로부터 그 공터의 도깨비명당에서 해마다 도깨비 신을 추앙하고, 공양하는 도깨비신공양제를 올리도록 했다.
 
   선암마을의 도깨비신공양제는 선암마을의 역사가 길어지고, 선암마을의 개척공신들이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후로는 그 공양제의 성격이 변하여 도깨비축제의 형태인 민속놀이로 퇴화되었지만 해마다 도깨비 명당에서 민속놀이를 하는 풍속만은 그 맥락을 더 튼튼히 이어갔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 월요일에 연작을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