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문학포럼/2019 작품특집23]전월매의 시 '들국화 여인' 외9수

2019-02-02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 시로 보는 동포문인의 정감세계...

 

 
1. 들국화 여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산기슭 후미진 곳의 들국화
비바람에 흔들리어도
햇살과 이야기하는 들국화
누구와 보리 고개 넘어 왔던가
그날의 아픔은
어디로 동댕이쳤는가
가을 서리를 머리에 이고
노랗게 웃음 짓는
들국화 여인
(2002)
 
 
 
2. 겨울의 기도
 
 
생을 마무리 짓고
조용히
눈을 감는다
 
한 여름과 인연은 끊어지고
즐거웠던 옛일을 뒤돌아보며
사색으로 침묵한다
 
그리고 점지한다
저 멀리 봄의 숨결 들으며
꽃나무 뿌리 내릴 곳을
 
인동초 하나 추켜들고
찬바람을 꾸중하며
살며서 두 손 모은다
(2002)
 
 
3. 꽃은 안다
 
 
한 알의 씨앗을
익히기 위하여
찬 이슬을 이마에 떠올렸다
번개와 천둥을 이겼다
아픔으로 퇴색하고
한 잎 두 잎 꽃잎을 날리며
어여쁘게 죽어가야 했다
그리고 이제 또
한 알의 씨앗을
잉태하기 위하여
한 겨울 언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함을
꽃은 알고 있다
 
 
4.  3월의 길목에서
 
 
진달래나무에 묻어있던
겨울이 비명을 내지른다
겨우내 참고 견디며 몸서리쳐왔던
성화와 굴욕과 두려움도
채 가시지 못한 채
잎은 환희의 파란 미소
가냘프게 짓는다
대반은 푸르스름하고 소반은 누르스름한
넉살에 짓눌린
마음의 어두운 한구석
봄바람이 휙 불어와
아픈 상처 보듬다
그 대가로 연분홍 마음 선물한다
 
시샘에
한때의 호화로움의 그리움에 사로잡혀
겨울은 바람에 멱살 잡히고도 최후 발악한다
봄바람이 모든 꽃 친구들을 동반하면
어쩔 수 없이 에테르처럼 풀리는 시간 속에
그대는 잠시 체념하고 항복하리
 
보슬보슬 촘촘히
언 가슴을 녹이기 시작한다
무덤탈출이다
 
 
5. 벚꽃
 
 
사월의 길목에서
어머니가 이고 오신
연분홍빛 흰 드레스
벚나무 위에 뿌려지면
벚꽃향기 별천지로 찬연하다
 
사월의 며칠
아름답게 환한 미소 지으며
총망히 드레스 걷어 들이며 가시는 어머니가
야속하고 못 견디게 그리워
나는, 잠 못 이룬다
  
 
6.국화와 9월
 
 
국화가 한창입니다
내리쬐는 햇볕과 뒤집히는 햇볕도 한창입니다
잎들은 햇볕들이 다 들고 서있지 못해
정원이 받아서 들고 서있습니다
작년이맘 때 사고로 갑자기 하늘나라 가신 오빠가
국화에게로 자박자박 걸어오는 새가 되어
잠깐 국화꽃과 함께 환하게 빛납니다.
(2011)
 
 
7. 부부
 
 
한 쌍의 신발이 있다
꼭 함께 신어야 한다
칼끝 꽃샘추위에도
생강나무 꽃 햇살에도
우산 없는 여름비에도
황금 빛 낙엽길에도
지저분해졌다고 뒤처진다고
한 짝을 버리면
다른 한 짝은 무용지물이다
물감 같은 노을 속으로 나란히 가려면
땅을 꼭꼭 밟아도 주고
부지런히 함께 닦아도 주고
자꾸 끈을 죄여야만 한다
(2008. 도라지)
 
 
8. 석별
 
 
인연은 갈대 스치는 바람이런가
손잡고 이뤄낸 정오의 태양
꿈꾸며 바라본 황혼의 석양
이제는 그대를 떠나보낼 때
진토에 몸을 푸는 분홍빛 연꽃처럼
서해바다의 부레 없는 상어처럼
항상 은근하면서도 열심히 뛰었던 그 모습
분홍빛도 어느듯 자취를 감추었고
미끈미끈한 비늘도 모두 흩어지고
아무리 불러 봐도 산산이 부서진 그 이름
아무리 소리쳐도 메아리 없는 이 아침에
그대 떠난 빈자리에
한그루의 정한 갈매나무로 호젓이 남고 싶다
(2014. 동포문학)
 
 
9 새벽녘의 꿈
 
 
가물가물 졸고 있는 불빛 마주하느라면
별보다도 더 총총한 생각이
거머리처럼 착 들어붙어
끈적끈적 하루를 집어삼키는데
 
저녁이면 수 천 번 지문과 간통하는 컴 키보드판은
시니 평론이니 하는 활자정보에
종일 분주하고 닦달을 친다
 
미지의 금빛세계를 찾아 황해바다 건너왔건만
낮에는 진종일 그릇 씻고 갈비 굽느라
소나무 껍질이 되어버린 뱃사공의 손
무한대의 노력으로 알의 부화를 꿈꾸지만
번번이 깨어지고 나뒹군다
 
대추나무 우듬지에 매달린 집 한 채
험난한 풍랑 위에 표류하는
상처받은 새
손바닥에 으스러진 유랑민의 꿈
 
 
 
10. 낯선 둥지
 
 
튕길 것만 같은 푸른 하늘 바탕에 아파트는 소리 없이 질서정연하고
제철 따라 무궁화는 의연히 쉬임 없이 피었다 지는데
골목골목 즐비하게 늘어선 한글 간판 거리에서는
팔십 년 전 조상의 흰 그림자들이 얼른 거린다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누구의 핏줄이라 주어댈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분명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익숙한 냄새를 알아 차릴 수 있다.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고향 떠나 우리들은 왜 그리도 먼 둥지로 옮겨가 살고 있는 걸까
간도로, 만주로, 연해주로…
번개가 치고 우레가 울고 후두둑 소나기가 지나간 후에
고즈넉한 거리에서 처마 밑에 빗방울 소리를 듣노라면
언젠가 태어난 적이 있는 둥지로 돌아온 듯한 느낌도 들지만
한없이 외롭고 새삼 서러운 것은
품어주던 어미새들도 떠나고
노래 소리가 끊겨진 나의 가난한 둥지 때문이 아니라
여기에 내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너무 오래 떠돌다 이제야 여기에 이른 까닭이다
(2014. 동포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