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금철의 호주 여행기]호주에서의 8박9일

2017-12-19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오랫동안 계획 중에 있던 호주여행이 끝내 이루어 졌다. 지난해 한국 춘천에서 있었던 세계 한인 축구대회서 중년조 1등을 했던 팀원들을 중심으로 여덟 명으로 구성된 종합팀이 지난 12월 4일 저녁 12시경에 끝내 북경비행장에서 호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북경에서 떠날 때는 차가운 겨울복장 차림이었으나 12시간 좌우의 비행을 걸쳐 우리가 내린 곳은 영상 20도를 훨씬 웃도는 무더운 여름 날씨였다. 시드니 비행장에서 우리는 우선 겨울철 옷차림을 여름철 옷으로 바꿔 입고 안전 검사를 탈 없이 끝냈다. 이어 비행장 로비에서 기념사진 몇 장 남긴 후 마중 나온 여행사 직원의 안내 하에 시드니 중심구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예약된 호텔로 발길을 옮겼다.
 
호텔로 향하는 거리는 별로 복잡한 편은 아니였다. 차들은 질서정연하게 움직였고 거리에 비쳐지는 풍경들은 화려함을 뽐내기 보다는 90 년대에 우리가 중국 어느 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건축 재료들로 어우러져 그대로 외곽에 드러나 있었다. 북경에서 늘 보아오던 번뜩이는 고층 건물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에 여기저기에는 붉은 기왓장을 얹은 단층 건물들이 주선을 이루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는 푸른 숲나무들이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며 도시의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약 반시간 뒤에 우리는 호텔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간단한 휴식을 청 하구 일어나니 저녁때가 되었다. 호주에서의 첫 식사를 해야 했다. 우리는 한인거리에 자리 잡고 있는 강호동불고기 구이집을 찾았다. 식사는 아무 불편이 없었다. 늘 먹던 음식이었고 서빙아가씨들도 모두 한국인들이여서 전혀 어색함 없이 편안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친 우리는 한인상업 구역에서 간단한 쇼핑을 하다가 얼마 뒤 두 대의 택시에 나누어 앉아 시드니 중심에 위치해 있는 유명한 연인항으로 발길을 돌렸다. 시드니 대극장과 시드니대교를 비롯한 유명한 건축물들이 항만 주변을 둘러싸여 있는데 황홀한 야경을 뽐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상업선들과 유람선들이 항구의 여기저기에 정박해 있었다. 길 한쪽 다른 켠에는 또 불빛이 아롱거리는 맥주 바들이 쭈-욱 깔려 있는 것이 한눈에 띄었는데 곳곳에서 젊은 친구들의 생기 넘치는 맥주파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길에는 오가는 젊은 친구들로 벅적거렸고 가끔씩 길 한복판에서 과감한 스킨십도 서슴치 않는 젊은 연인들의 낭만도 시선을 끌었다. 약 두 시간 가량 우리의 눈요기는 계속 되었고 그 뒤 우린 맥주 바에 들려 간단히 맥주 한두 잔씩 거친 후 이튿날 행사를 위해 핸드폰위성 안내기의 도움 하에 걸어서 별로 멀지않은 곳에 자리 잡은 호텔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9시경. 호텔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친 우리는 호텔 앞마당에 모였다가 여행사 안내원이 몰고 온 9인용 차에 다시 몸을 실었다. 오늘은 여러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우선은 하루에도 수십 번 그 자태가 변한다는 시드니대극장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그림에서만 보아오던 건축물을 손만 내밀어도 잡을 수 있는 간격 없는 거리에서 실물로 체험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시드니의 얼굴이라고도 할 만큼 유명한 시드니 대극장이 실제로 눈앞에 나타났다. 건물은 별로 웅장하다고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다른 그 어떤 흡인력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였다. 어쩌면 사나운 바다위에서 자유로이 풍랑을 헤치고 질주하는 거대한 돛배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넓고 푸른 바다위에 둥둥 떠 있는 커다란 흰 조개껍질을 보는 듯도 했다. 흥분 속에서 우리 일행은 여러 장의 뜻 깊은 기념사진들을 남기고 또 다른 곳으로 자리를 떴다.
 
이번에는 시드니극장에서 도보로 가면 약 15분 거리밖에 안 된다는 시드니미술관 청사에 이르렀다. 건물 앞에는 축구운동장 여러 개를 합친 것만큼 큰 푸른 잔디밭이 깔려있고 적어도 수십 년 이상은 돼 보이는 기이하고 거대한 아열대나무들이 여기저기 자리 틀고 서있었다. 뒤쪽과 옆구리 주변에는 엄청 큰 군함과 유람선이 정착한 넓은 항만과 개방된 공원, 그리고 시드니 황가식물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3층으로 된 미술관 청사 진열실에서는 호주 각 시대를 대표하는 유화작품과 인상파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소개에 따르면 이 미술 청사는 1874년도에 일어섰는데 호주 3대 미술관 중의 하나로서 구라파 유화작품들과 아세아 유명 작품들도 심심찮게 진열돼 있었다.
 
이외에도 우린 호주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시드니 성마리아 교당에 잠간 들렸다. 시간이 좀 여유가 생기자 호주에서 돈 많은 사람들만 거주한다는 부자동네에도 가보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성장했다는 부자동네는 거주자들은 별로 많아 보이지 않았으나 집값은 엄청난 것 같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호주 돈으로 오륙백 만원이면 살 수 있던 집들이 최근에 와서는 이삼천만 선으로 치달아 올랐다고 한다. 중국 돈으로 환산하면 일이억 정도 된단다. 지리적으로는 한쪽에 시드니항만을 끼고 자리 잡은 데다 저 멀리로는 시드니 대극장과 시드니대교가 항만을 사이에 끼고 한눈에 안겨왔으며 다른 한쪽 주변에는 귀족학교와 숲을 이룬 동네공원이 편하게 펼쳐져있었다. 말 그대로 인간낙원이었다. 어떤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무얼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지가 궁금했다. 나도 평생 저런데서 한번 살아볼 수는 없을까하는 주제넘은 생각도 잠간 가져보았다.
 
호주의 하늘은 그처럼 맑았고 시드니의 주민 구역들은 거의 다 숲을 이룬 아름다운 공원들과 줄줄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공원들은 개방형이여서 토성을 막고 그것이 내 것이니 돈을 내야 된다고 떠드는 곳은 하나도 못 봤다. 길 가다가도 지치면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쉼터들이 사처에 널려있었다.
 
하루의 여행은 너무 즐거웠다. 저녁은 오래전에 호주에 이주해온 친구의 소식도 알아볼 겸 우리 조선족이 운영하는 시골집( 음식점이름)에 들려보기로 했다. 시골집에서 친구의 소식도 알아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더욱이 거기서 우리 조선족들이 호주에서 살아가는 양상들도 어느 정도 알아보게 된다. 인상 깊었던 건 아이들 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12년 의무제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호주는 대학가기전까지는 일절 아무 비용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학교에서 시간 볼때 피곤하면 업드려 자도 되고 소피가 마려울 때도 그냥 눈치 보지 않고 일어나서 밖에 나가 보면 된다구 한다. 평시에 선생님이 제일 강조하는 것은 성실성과 상식 적인 것에 관한 것들이다. 약자를 위해서 돈을 기부하는 일은 매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는 도덕행위 수단이다. 그 돈이 적던지 많든 지를 떠나. 반장으로 선거되면 공부가 우선인 것이 아니라 애들과 잘 놀아주고 애들을 편하게 기쁘게 해주는 것이 우선이다. 교장도 애들을 마음대로 욕하고 다루지 못한다. 일단 애들의 눈높이에 벗어나면 법적대응까지도 가능하다. 어찌 보면 오늘 우리의 교육 실태하고는 너무나 대조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먼저 애다운 애가 되어서 글도 잘 읽어야지 올바른 마음가짐도 없이 글만 읽는다고 그것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다음날 주제는 호주에 와서 처음 있는 골프장 게임이었다. 중국서 호주로 떠날 때 미리 여행사를 통해 예약했던 행사다. 호주사람들은 약속을 철같이 지킨다고 했다. 아침 여덟시 반으로 예약됐으니 서둘러야 했다. 길가에서 소모하는 시간까지 계산하면 늦어도 한 시간 반전에는 떠나야 했다. 헌데 우리를 실을 차는 벌써 와 대기하구 있는데 떠나야 할 사람들은 아직도 준비가 덜된 채 속만 바글바글 타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전날 저녁에 흥분한 마음으로 약주 한잔 하고 잔 것이 살짝 민폐가 된데다 윗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출구를 제대로 파악 못해서 다른 한 곳에 갖히게 되는 일이 발생하여 몇몇이 예정했던 시간을 잘라 먹었다. 다급한 나머지 일행 중 한명이 호주에서 골프기재상점을 운영하는 친구한테 연락해 우리 사정을 말했더니 그 친구는 마침 자기가 그 골프장의 회원이여서 그 골프장 사장님을 잘 안다며 전화부터 해보겠다고 했다. 얼마 뒤 희소식이 전해왔다. 조금 늦어도 봐줄 터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사장님이 승낙했단다. 한 동안의 소란 뒤 우린 다시 평온을 찾았고 시름 놓고 길을 떠날 수 있었다.
 
우리를 태운 차는 도시 외곽으로 달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좋은 날씨였다. 하늘 위에 뭉게뭉게 엉켜서 떠있는 저 구름들은 어쩌면 또 저렇게 맑고 깨끗한지. 소꿉시절의 나의 옛 친구들도 저처럼 깨끗하고 순수했다. 연이는 나에게 고무가 달린 연필을 선물하며 수줍게 낯을 붉혔고, 흥식이는 마을 앞 도랑물에서 잡은 청개구리를 쇠꼬챙이에 가득 낀 채 조금 떨어진 시내마을에 살고 있는 나한테 들고 와서 개루리 몸체는 탕쳐서 집에서 기르는 닭한테 먹이고 다리 쪽은 잘라서 기름에 튀겨 먹으라고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별로 가진 것 없이 살았어도 정신적으론 많이 건실했던 것 같다. 영혼은 맑았고 꿈은 명랑했다. 요즘 애들한테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골프장에 도착했다. 캥가루가 뛰어다니는 골프장이였다. 중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신기한 장면들이 펼쳐졌다. 긴 다리를 날리며 골프장 한 모퉁이에서 다른 한 쪽으로 쏜살같이 질주하는 캥가루가 있는가하면 골프장 변두리 나무 그늘 밑에서 크고 작은 캥가루들이 서로 한가로이 엉키여 다리를 쭉쭉 벗고 소풍을 즐기는 장면도 보였다. 사진 한 장이라도 잘 남겨보려고 점점 더 가까이에 다가서는 우리를 보고도 급히 도망을 가지 않는 그놈들이 참으로 태평스러워 보였다. 서로가 어울려 사는 공간들이 이처럼 편할 수도 있구나!
 
골프공 한매 날리고 시원하고 맑은 공기를 쭈욱 들이켰다. 마음이 한결 편해지고 힘이났다. 넷이 한조가 되여 18개 홀을 다 정복하기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호주에서 우린 모두 세 번의 골프경기를 치르기로 약속했다. 원래는 두 번만 약속 잡았으나 생각보다 골프장 조건들이 좋고 값도 편해서 한 번 더 치기로 의견을 모았다. 소개에 의하면 호주에서 골프운동은 대중화 운동으로 보급된 지 꽤 오래 되었단다. 대부분 골프장이 한판 골프경기를 치르는데 비용은 인민폐로 이삼백 원 정도 들었으며 회원에 가입할 경우는 차수를 따지지 않고 1년을 무료로 칠 수 있단다. 연 회원비는 인민폐로 1만원에서 1만오천원 사이다. 오후 두시경이 돼서야 우리 골프팀은 모든 골프경기를 끝내고 즐거운 마음으로 샤워까지 마치고 귀환 길에 다시 올랐다.
 
다음날은 일정이 좀 빽빽하니 잡혔다. 오전엔 바다낚시를 가기로 했고 오후엔 당지 우리 조선인들과 축구시합을 하기로 약속됐다.
 
바다낚시는 경험도 필요하고 위험도 좀 따랐기에 우리 일행은 당지에서 경험이 있는 낚시애호가 4명과 합류해 같이 가기로 약속 잡았다. 새벽 다섯 시에 약속대로 움직여 길을 떠난 우리는 한 시간 푼히 지나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태평양 넓은 백사장을 가로 질러 위험한 바윗돌 비탈길을 지나서 철썩이며 다가오는 바다의 사나운 물갈기를 체험하면서 우리는 바다 물살에 평평하게 다져진 바윗돌 하나를 목표물로 잡고 오늘의 낙시 터로 정했다.
 
 
경험 많은 낚시인들이 배동해 주었기에 우리의 노획물도 만만치 않았다. 세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는데 벌써 한 근 이상씩 되는 각종 바다 고기들이 10여 마리나 걸려 올라왔다.
그런데도 전에 20킬로그램 이상씩 되는 고기도 심심찮게 낙았다는 바다 낚시인들은 전혀 만족하는 표정들이 아니었다.
 
펄떡이는 바다고기 몇 마리를 골라 그 자리에서 싱싱한 생회를 떠서 바다인들에게는 항상 필요한 소주 한잔까지 곁들이니 그 맛 또한 천하별미였다. 오후 두 시부터 당지 교포들과 축구하기로 약속되었기에 시간을 너무 끌 수는 없었다.
 
 
11시쯤 되자 우리는 서둘러 다시 짐을 챙기고 아쉬움을 남긴 채 돌아서는 길에 올랐다.
약속된 운동장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냥 뽈만 한창 차고 헤어 질줄 알았는데 운동장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어린애들까지 포함하여 칠팔십 명은 모여 있었다. 타국의 낯설은 땅에서 생활하면서 서로가 소중하고 의지가 돼서 무슨 색다른 일 있을 때면 다들 이렇게 자연스레 모인다고 했다.
 
축구경기가 시작됐다. 우린 먼저 혼합팀을 구성하여 다른 한 팀과 시합을 벌렸다. 그리고 또 우리끼리 두 팀을 묶어 한창 더 경기를 펼쳤다. 승부보다 더 중요한건 만나서 반가운 것이었다. 한나라 한 핏줄로 태어나 생소하고 머나먼 이국땅에서 삶의 터전을 새로이 힘겹게 개척해 나가고 있는 그들이었다. 90년대 초반 까지만도 가물에 콩 나듯 얼마 안 되는 이들만 겨우 지탱해 버티고 있던 처지였단다. 그러다 한 해 한 해 차츰 조선족들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백여 호도 훨씬 웃도는 집중된 조선족 주거지까지 형성됐단다. 호주는 주일 봉급제였다. 일자리가 많아 자기만 부지런하면 1년에 인민폐로 백만 원 이상은 벌수 있단다. 여인들은 옷가게도하고 부동산 매니저로 활약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집에서 애를 키우며 남편 뒤 시중을 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호주에 온지 벌써 20여년이 되는 나의 그 뽈개지 친구도 지금은 중국 돈으로 몇 백만 하는 아파트를 장만하고 딸까지 대학공부를 다 시켰으며 부인은 집에서 가정부녀로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할빈에서 일찍 호주에 발붙인 한 여인은 불법체류여서 그동안 한 번도 중국에 못 들어가고 지난해에야 겨우 호주에서 20년간 보지 못한 딸의 얼굴을 볼 수있었다는 뼈아픈 얘기도 했다. 누구나 다 생활이 순조롭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젠 마지막 여성팀 간의 대결만 남았다. 어린 팀과 좀 나이가 든 팀 간의 대결이었다. 운동장 한복판에서 벌어진 색다른 이 경기는 남자들 경기와는 달리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해보였다. 20대를 중심으로 묶어진 어린 팀은 싱싱하고 생기가 넘쳤으며 40대를 중심으로 묶어진 나이든 팀은 세월의 흔적을 뽐내기라도 하듯이 침착하고 여유 있게 대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40대 팀의 우세가 슬슬 돋보였다. 어찌보면 이 험한 땅에서 금방 꽃봉오리를 터치고 피어나기 시작한 20대의 모습과는 달리 이세상의 험한 풍파와 싸우면서 강하게 단련된 40대의 모습들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기도 했다. 결과는 3:0, 나이든 팀의 승리였다. 나이든 팀은 승리로 어린 팀에게 그 어떤 삶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시합은 모두 끝났다. 우리는 아쉬움을 남긴 채 서로서로 손을 잡고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소중한 기념사진들을 남겼다.
 
“형제들이여, 벗들이여! 잘 계시라! 우리 또다시 만날 때도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자!”라고 나는 속으로 묵묵히 기원했다.
 
2017년 12월 14일
북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