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안나 시인 첫 시집 ‘양파의 눈물’-사물과 마주하기

전기철(시인, 숭의여자대학교 교수)

2017-12-14     [편집]본지 기자

[서울=동북아신문] 고안나 시인 첫 시집 ‘양파의 눈물’ 해설- 사물과 마주하기 

덧없다 느껴지는 순간
이미 죽었을지 모르는
내가 흘리는 눈물인지 몰라
삶이란 어차피 착각이지
겹겹이 쌓인 몸
두드리는 소리
떨리고 벗어지고 쪼개지고
두 손은
휠씬 심술궂지
모조리 다 보여줄 수 없는
간직해 두고 싶은 꿈
고통 없이 끝내고 싶었던 나는
이미 죽고 말았는지 몰라
꽃봉오리 하나
밀어 올리지 못한 나 위해
당신, 울어줄 수 있는가
 
— 「양파의 눈물」 전문
 
우리는 그동안 양파를 까는 사람만이 눈물을 흘린다고 여겨왔지만 그 눈물은 실은 양파가 흘리는 “눈물”이었다. 양파의 깊은 탄식의 목소리는 인간에게 희생당하는 모든 생명체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양파는 이 세상에 태어나 식재료의 하나쯤으로 생을 마친다. 인간의 먹거리가 되는 운명이기에 애초부터 “이미 죽었을지 모르는” 존재인 것이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자신의 “꽃봉오리 하나 밀어 올리지 못한” 양파의 절망감을 우리는 생각하지 못했다. 양파는 자신의 존재가 “떨리고 벗어지고 쪼개지고” 해체되는 것을 생생히 느끼고 있다. 이런 양파의 모습과 인간의 “두 손은” 대조를 이룬다. 이 두 손에는 바로 인간의 탐욕과 오만함, 생명체에 대한 무감각이 나타나 있다. 지구 생태계에서 먹이사슬의 최고 단계에 있는 인간은 가장 비정한 포식자이다. 식물이고 동물이고 먹거리가 되어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있다 특히 가축화된 동물들은 그들의 타고난 수명을 누릴 수 없다. 공장식 사육으로 고통스럽게 일정 기간을 살다가 도축되어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 위 시에서 들려오는 양파의 목소리는 먹거리가 되어 소비품으로 전락해버린 생명체들의 환유로 읽힌다. 인간의 눈물만을 생각해왔던 우리는 고안나 시인의 역발상으로 양파의 눈물을 만나며 양파의 슬픔을 통해 우리에게 헌신하고 사라져간 무수한 생명체들의 슬픔을 환기시킨다. 양파는 무수한 사물들의 눈물이 하나로 응집된 가장 큰 눈물방울인 것이다.
 
마음 밖
몸 빠져나온 생각이지
잠자리 들기 전 쓰는
그림일기
 
먼 벌판 서성이며
머뭇머뭇
모든 것 비우는 시간
잠시, 하늘을 무릉도원
복사꽃 만발하지
 
내 사랑, 몇 발자국 더
비껴갈 때
 
몸 바꾸는
노루 한 마리
 
— 「노을」 전문
 
절창으로 뽑아 올린 위의 시는 고안나 시인의 삶을 응축해 놓은 자화상 같다. 하루를 사람의 인생에 비유한다면 저녁은 수렴의 시간이자 내면으로 회귀하는 시간이다. 떠오르는 태양이 낮을 향해 걸어가고 강렬한 빛을 확산시킨다면 저녁은 그 빛들을 부드럽게 거두어들인다. 우리의 삶과 욕망도 이 자연의 시간을 따른다. 하강, 하심, 비움, 관조의 고요함에 도달하기까지 한낮의 삶은 희로애락의 욕망으로 바글바글 들끓는다. 노을을 마주 바라보며 삶이라는 긴 여정에서 출발점이었던 아이가 바로 우리가 도착해야 할 내면의 모습임을 고안나 시인은 느낀다. ‘노을’은 아이가 그리는 “그림일기”다. 그 그림일기는 천진무구한 아이의 마음이다. 여기에는 인간적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때 잠시나마 현실은 부조리와 갈등이 모두 사라진 이상향 즉 무릉도원이 된다. 복사꽃들이 장엄하도록 아름답다. “모든 것 비우는 시간”과 “복사꽃 만발”은 ‘비우다’와 ‘채우다’로 서로 대극을 이룬다. 그런데 이 대극이 하나로 통합되는 역설을 통해 두 세계는 합일에 이르고 “무릉도원”의 광휘의 시적 자아가 된다, 이때 인간과 사물은 분리되지 않는다. 욕망덩어리인 인간은 온 데 간 데 없고 무욕의 눈망울을 지닌 노루 한 마리만 있을 뿐이다. 노루는 노을의 환유이면서 시적 자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런 자화상은 고안나 시인이 노을을 마주보는 ‘응시’에서 비롯하였다. 그냥 마주보기를 통해서 존재가 저절로 떠오른 것이다.
 
어둡고 두렵습니다
 
당신 창 밑 서성입니다
잃어버린 무엇인가 찾으려는 듯
어둠 속 큰 성냥개비로
번갯불 확 부칩니다
발바닥 찢어지도록 뛰어다녀도
처음부터 방향 잃었는지 모릅니다
무반주 첼로처럼
하필이면 당신의 창가에서
나를 마치고 싶을까요
라일락 향기에 몽롱할 따름입니다
 
— 「밤비 」 전문
 
밤비는 자신의 고독을 독백처럼 읊조린다. 세계를 떠돌았던 밤비는 이제 당신의 창가에서 존재의 소멸을 예감한다. 무언가를 찾으려고 “발바닥이 찢어지도록 뛰어다녀도” 아무것도 찾은 것이 없다. 허무하고 덧없음이 밤비의 우울한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온다. 당신과 밤비 사이에는 창이 있다. 창은 경계이다. 들어서지 못하고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그래서 그 고독은 온전히 밤비의 몫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우울한 방랑자의 고독한 목소리가 시적 공간을 특별한 정조로 물들인다. 고안나 시인은 사물의 대리자처럼 혹은 오라클처럼 사물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대문 앞 쓸다가
모로 누워있는 소주병 하나
쓰레기 더미에 몸 숨긴 채
억지 잠이라도 청한 걸까
제 몸 가둘 곳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분명 쓰레기 봉지를 이탈했거나
제 속을 훔쳐간 누군가에 의해
버림받았을
한 번쯤, 어느 심장에 강하게 박혔을
그러다 헐렁해진 마음에서 뽑혔을
생각은 깊고 가슴은 뜨거운
노숙자처럼,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달빛처럼
알 수 없는 당신의 행방
빈껍데기의 설움 아는가
제 갈 길 찾지 못하고
중얼거리는 소리, 알듯 말듯
— 「술병」 전문
 
 술병은 현대사회에서 소외당하는 것들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시적 자아는 길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술병을 통해서 버려진 것들, 초라함과 쓸쓸함에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한때는 그 술병은 “어느 심장에 강하게 박혔”던 존재였다. 누군가에게 뜨거운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빈껍데기”로 남아 그 어디에도 설 자리를 잃었다. 술병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 수많은 군상들의 모습과 닮았다. 자본에 의해 혹사당하고 나중에는 번아웃 증후군으로 무기력해진 현대인의 모습이다. 사람도 사물도 이 위태로움을 겪으며 살아간다. 어느 순간에 쓸모없는 것으로 버려져서 페기처분 당할지 모른다. 소모되고 버려지는 자본의 톱니바퀴에서 사물도 사람도 부속품에 불과하다. 이 비애를 달랠 수 있는 것은 울음 밖에 없다.
 
바람의 악다구니 견디다 못해
빈 깡통 하나 몸으로 운다
길 떠나던 낙엽들 덩달아 운다
텅 빈 아스팔트 위
어둠이라는 큰 새 한 마리
침묵 삼키는
가로등
가물가물
털어도 털어낼 수 없는 어둠 속
그믐달
나뭇가지에 걸렸다
슬픔 토해내는 소리
껍데기를 위한 진혼곡일까
바람의 발자국 다가올수록
아무것도 모른 채 함께 우는 밤
귀뚜라미는 어디로 갔을까
 
— 「빈 깡통 하나 몸으로 울었다」 전문
 
삭막한 도시를 떠올리는 아스팔트 위에는 울음이 가득하다. 버려진 깡통이 울고 낙엽이 울고 있다. 이 울음은 죽음을 위로하는 ‘진혹곡’이다. 그러나 이 울음은 세상에서 약한 것들이 더 이상 빼앗길 수 없는 오직 하나뿐인 영혼의 소리이다. 이 세상에서 울음을 강탈해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울음은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최후의 표현이다. 약하고 보잘것없고 버림받은 것들의 울음소리를 고안나 시인은 듣는다. 이 울음소리를 듣는 시인은 곡비와도 같다. 시인은 맨 나중에까지 삼라만상의 울음을 함께 우는 자이므로.
 
고안나 시인에게 애정을 받고 있는 사물들은 주로 소외된 것들이다. 무가치한 것이며 버려진 것이며 폐기처분 직전에 놓인 것들이다. 시인은 바닥에 뒹구는 사물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시인은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애정을 갖는다. 그것들은 사물들이다. 그 사물들은 끊임없이 시인에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것들이 한계수명을 다한 한낱 ‘쓰레기’가 아니라 시간에 의해 변형된 존재라는 걸 안다.
 
지금까지 고안나 시인의 시집을 일별해 보았다. 고안나 시인은 사물과 마주보며 그것의 소리를 마주 들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 소리에서 자아를 느낀다. 그 메아리가 내게도 들리는 듯하다.
 
전기철(시인, 숭의여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