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박철산] 엄마의 뜨락, 아버지의 울타리
베스트셀러 고량주 설원문학상 응모작품
2017-03-04 [편집]본지 기자
금방 자식들을 바래주고 돌아서는데 “뻐꾹 뻐꾹” 뻐꾹새가 울어댄다.
위챗의 동아리 창에 들어가니 누군가 붉은 반점이 덕지덕지 붙은 귤을 올렸다. 설전에 시장서 살 때는 멀쩡했는데 이틀이 지나니 이렇게 변질했다는 것이다. 자기처럼 장사꾼들한테 속지 말고 이런 귤을 사지 말라는 충고이다.
가짜와 위조 상품이 살판 치는 세월이다. 수박이나 참외에도 주사기로 설탕물을 주입해넣고 말로는 유기농남새라 하지만 화학비료나 농약을 쳐 소비자들을 속여 넘겨 판다. 남새도 시름 놓고 사먹기 무섭다.
불현듯 엄마의 뜨락 텃밭에서 여러 가지 싱싱한 제철남새를 뜯어먹던 시절이 떠오른다. 고무재골 고향집에는 엄마의 알뜰한 뜨락이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처럼 펼쳐 있다. 엄마의 뜨락은 언제나 아버지가 세워놓은 울바자가 병풍처럼 지켜 준다. 한 눈에 안겨드는 엄마와 아버지의 작품이다.
엄마의 뜨락은 언제나 아버지의 울바자부터 시작된다.
해마다 탈곡이 끝날 때면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수수깡을 두 수레 씩 나누워 준다. 아버지는 그 수수깡을 볏짚으로 다시 자름 자름 묶는다. 그리고 땅이 얼기 전에 괭이로 집 서쪽 모퉁이부터 뒤쪽, 동쪽 모퉁이까지 드자형으로 옇게 파고 수수깡을 울바자로 세운다. 그리고 안 팍으로 해바라기대로 띠를 대고 새끼로 단단히 틀어 묶는다. 아버지가 세워준 울바자는 매서운 서북풍을 막아주고 붕붕 창호지가 울부짖는 기나긴 매서운 겨울을 이겨 나가게 했다
이듬해 봄, 하늘과 땅 사이를 금실은실로 이어 놓으며 봄비가 차분히 내려 땅 누기를 주면 아버지는 이랴 낄낄 소를 몰며 지탑을 잡고 가난을 갈아엎는다. 그러면 엄마는 이랑 이랑을 타가면서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밭고랑에 행복의 씨앗을 묻는다. 감자, 고추, 옥수, 오이 따위를 심으며 풍년 가을를 꿈꾸는 엄마의 얼굴에는 행복의 미소가 하얀 김처럼 피어오른다.
씨앗을 뿌린 후면 아버지는 겨울에 세웠던 울바자를 뽑아내고 키 높은 수수깡을 도끼로 허리를 잘라내고 엄마는 그 수수깡을 다시 볏짚으로 나래를 엮는다. 그리고 아버지는 짬짬이 시간을 타서 괭이로 집 뜨락의 주위를 돌아가며 구멍을 파고 수수깡나래로 울바자를 세운다.
엄마의 뜨락은 언제나 깨끗하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신의 터전을 갓난아기 보듬듯이 알뜰살뜰 정성들여 가꾸었다. 가물면 물을 주고 풀이 날세라 김을 잡고 또 잡고 그래서인지 뜨락은 언제나 풍성하였다. 검푸르게 독이 오른 싱싱한 풋고추, 야들야들한 상추와 체격이 늘씬한 오이, 빨갛게 익은 토마토, 토실토실 살이 오른 감자와 방치 같은 찰옥수수…이 모든것은 결핍시대에 우리가족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식량이었고 채소였다. 하교 후 집에돌아 오면 나는 군입질할 것이 없어 엄마의 뜨락에 들어가 싱싱한 오이와 빨간 토마토를 뜯어먹곤 하며 배고픔을 달래였다.
엄마의 뜨락에서 제일 인기를 끄는 것은 그래도 우리 집의 유일한 돈줄기인 해묵은 앵두나무였다. 아무 곳에서나 뿌리 내리고 꽃이 피고 열매 맺기까지 앵두나무는 적응성과 생명력이 강하다. 앵두꽃은 수수한 시골아낙네의 얼굴을 닮았지만 빨갛게 농익은 열매는 애교부리는 규수의 입술처럼 비유되어 자주 시인들의 붓끝에 오르곤 한다.
이 스무 그루의 앵두나무는 엄마가 외갓집에서 앵두나무묘목을 얻어다 옮겨 심은 것인데 몇십 년이 지났건만 탈 없이 잘 자라고 열매도 엄청 많이 열렸다.
해마다 앵두철이 오면 나는 엄마를 도와 앵두를 따곤 했다. 다른 과일과는 달리 앵두는 열매가 작아 한알 두알 따기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였다. 차라리 앵두나무 밑에 비닐을 깔고 앵두나무를 흔들면 빨리 딸 수 있었으나 엄마는 그렇게 하면 앵두가 상해 값이 떨어진다며 극구 반대했다.
장날이오면 엄마는 토실토실 농익은 빨간 앵두를 아버지가 손수 결은 버들나무 광주리에 흰 보를 살짝 덮어가지고 20여리 상거한 작은 진에 가서 앵두 한 고뿌에 50전씩 팔았다. 온 종일 뜨거운 햇볕에 얼굴이 타고 땀 흘리며 판 앵두수입은 단돈 10원이 되나마나 했다. 엄마는 그 돈이 아까워 한 그릇에 37전 씩하는 시원한 국수 한 그릇도 사먹지 않고 집에서 가지고간 강냉이떡 한 조각으로 점심을 떼우고는 무거운 다리를 끌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호박잎에 물이 갚이는 계절에 앵두판 돈은 나의 학용품과 생활비의 내원이었다. 그때 철이 들지 못했던 나는 앵두 파는 장날이면 괜히 맘이 설레며 도무지 공부에 집중 할 수 없었다. 하교후면 엄마가 장에 갔다 돌아올 강가의 길목에서 엄마마중을 한다. 헴이 들어서가 아니라 나로서의 딴 속셈이 있어서였다. 엄마의 머리 위에서 빈광주리를 받아들고 걸으면서 손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저 광주리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 어서 빨리 보를 풀어보고 싶었으나 길가여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집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나는 광주리의 보를 풀었다.
맙시사, 그럼 그렇겠지. 광주리 안에는 새로 산 남색 운동화가 들어 있었다. 뽈 차기를 각별히 좋아하는 내가 늘 옆구리가 터진 운동화를 신고 뽈을 차는 것이 안스러워 큰맘 먹고 샀다는 엄마의 말에 나는 두 팔을 벌리며 “와”하고 환성을 올렸다.
앵두나무는 우리 집의 돈 나무였고 생필품을 해결하는 공급처였다.
엄마의 뜨락은 내 동심을 키워줬고 가족과 자식에 대한 사랑과 정을 한몸에 느끼게 한 행복의 터전이었다.!
엄마의 알뜰한 뜨락을 더 잘 지켜주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은 해마다 바뀌어 지는 울바자에서 넉넉히 볼 수 있었다. 울바자는 아버지의 자존심이었고 튼튼한 울타리는 남자와 힘의 상징이었다. 외부로부터 오는 침범과 위협을 막자면 울타리가 견고해야 한다는 것이 아버지의 신조였다.
아버지는 언제나 마을에서 맨 먼저 울바자 갱신에 신경을 썼다. 겨울이면 20리 상거한 북골에 들어가 해묵은 싸리나무를 해오고 나중엔 미츨한 참나무를 해다간 울바자를 새로 세웠다. 그리고 몇해 후에는 아예 하얀 백양나무 널판자로 깔끔한 울타리를 세웠다. 허나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울타리였다.
열두 살의 어린나이에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고향을 등지고 두만강을 건너 올 때부터 언제든지 형편이 좋아지면 다시 고향에 돌아간다고 별렀지만 결국 고향에도 가지 못하고 가족들을 위해 더 견고한 벽돌담장도 만들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나갔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세대들의 거주문화에는 언제든지 떠나간다는 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기에 타민족들과는 달리 집도 대충 초가집을 짓고 울타리도 대충 풀이나 쑥대로 막으면 고작이었다.
언제부터인가 할아버지세대들의 3세4세들이 자기들의 나서 자란 고향 땅을 버리고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할아버지들의 고향땅에 찾아가 정착하는 붐이 일었다. 고향마을이 사라지면서 언제나 생기와 정이 넘치던 엄마의 알뜰한 뜨락도 이젠 갈색의 옥수수 밭으로 변해버렸다.
비록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어도 온가족이 함께 언제나 화기애애하고 웃음이 넘치던 보금자리가 그립고 생기와 활력이 넘치던 엄마의 뜨락이 그립다. 아 ,잊지 못할 엄마의 뜨락, 아버지의 울타리여!
박철산 프로필
중국 룡정시 출생. 시정부 공무원, 퇴직.
청년생활잡지 화신문화상, 대미문화상 우수상 수상..
중국동포타운신문 수필대상 수상